[오동진의 영화파일]8인의 영상 거장 ‘텐 미니츠 첼로’

  • 입력 2005년 1월 20일 15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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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 ‘물의 이야기’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 ‘물의 이야기’
이탈리아의 거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에서 영국의 마이크 피기스와 체코의 이리 멘젤, 헝가리의 이스트만 자보와 프랑스의 클레르 드니, 독일의 폴커 슐뢴도르프, 그리고 미국의 마이클 레드퍼드와 프랑스의 거장 장 뤼크 고다르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감독이 만든 10분짜리 단편 모음집 ‘텐 미니츠 첼로’는 이들 감독의 이름만으로도 영화 팬들이라면 귀가 솔깃할 작품이다.

물론 영화는 그리 만만치 않다. ‘텐 미니츠 첼로’는, 예술에는 역시나 고된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예술적 진보를 위해서는 고행의 관문을 통과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런데도 참 이상한 것은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의미를 알 듯 모를 듯 이마에 잔주름이 저절로 그어지다가도 막상 영화가 끝나고 나면 새로운 삶에 대한 혜안과 통찰을 얻은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 극단적 비상업 영화의 미덕은 바로 그 지점에서 찾아진다.

이름값만으로도 무게감이 만만치 않은 이 작가들은 각각에게 주어진 단 10분의 러닝 타임만으로도 시간의 영원함과 인생의 덧없음을 독창적으로 표현해낸다. 그러면서도 모두 다른 장르, 다른 스타일의 작품들을 실험적으로 선보이고 있다는 데 이 영화의 특징이 있다. 예컨대, 레드퍼드는 2146년의 미래사회로 날아가고, 피기스는 디지털 카메라의 분할 화면 안에 머물며, 멘젤은 무성영화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한다. 영화철학자 고다르는 과거 자신이 만들었던 가장 난해한 작품들만을 골라 콜라주해낸다.

사람들마다 편차가 있겠지만, 아마도 연작 중 가장 대중적으로 접근하기 쉬운 작품은 멘젤의 ‘One moment(단 한번의 순간)’가 아닐까 싶다. 영화 속 주인공은 체코 유명배우의 실제 모습이다. 그는 과수원(같은 곳)에서 잠이 들어 있으며 꿈속에서인지 아니면 현실에서인지는 구분이 되지 않지만 어쨌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자신의 기억 속 순간들을 더듬어 나간다. 10분의 시간 동안 한 남자의 새파랗게 젊은 시절부터 말년의 초췌한 모습까지를 파노라마로 지켜보는 것은 섬뜩하면서도 엄숙한 느낌을 준다. 인생은, 영화의 첫 장면처럼 어쩌면 일장춘몽에 불과한 것이거늘 사람들은 마치 영겁의 세월을 살 수 있다는 듯 순간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살아간다.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수많은 ‘원 모멘트’들. 하지만 모두가 다 지나간 과거일 뿐이다.


베르톨루치와 자보, 슐뢴도르프는 지나온 작품의 이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종종 사회적 이슈를 다뤄왔던 사회파 감독들답게 이 짧은 단편에서도 자신의 정치 사회적인 메시지를 남겨두려 한다. 베르톨루치는 이탈리아에 정착한 한 인도 남자의 모습을 통해 유럽 속 이민자들의 고단한 삶을 슬쩍 들춰낸다. 자보는 단 10분이라는 시간만으로도 헝가리의 중산층 가정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사회적 불안감을 드러낸다. 쇨렌도르프는 독일이 여전히 ‘내 안의 파시즘’의 문제를 안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니의 ‘Vercy Nancy(낭시를 향해서)’ 같은 작품은 속된 말로 많은 사람들의 머리에 쥐가 나게 만들 것이다. 철학자 장 뤼크 낭시와 그의 학생인 듯 보이는 안나가 기차여행을 하면서 나누는 대화가 이 영화의 전부다. 대화의 내용은 예컨대 이런 것이다. “차이를 수용하는 모든 관념이 사실은 차이를 지우려는 것이고 차이를 눈에 띄지 않게끔 하는 거지. 즉 차이를 못 보게 한다는 거야. 하지만 차이는 여전히 있어.” 낭시의 얘기인즉, 차이를 없애는 것 곧 ‘등질화’만이 능사가 아니라 차이를 차이로 인정하는 새로운 형태의 ‘융합’ 혹은 ‘동화’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극장에 앉아서 꼭 이런 철학적 담론을 들어야 하는가는 철저하게 관객들 개인의 몫이다.

이것과 비교하면 슐뢴도르프가 독백 형식으로 차용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난해하긴 마찬가지여도 좀 더 인간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쇨렌도르프는 이렇게 되뇐다. “만약 지나가지 않으면 과거란 없다. 만약 다가오지 않으면 미래도 없다. 그래서 존재하는 게 없다면 현재도 없다…과거의 현재. 이것은 추억이다. 현재의 현재. 이것은 숙고이다. 그리고 미래의 현재. 이것은 기대이다. 살면서 미래를 위해 계획하는 행동은 한 번 행하고 나면 과거가 된다 …주여 아직 시간이 뭔지 모르겠나이다. 신이여, 우리를 계몽으로 이끄소서.” 영화를 다 보고나면 이런 염원이 들 것이다. 신이시여. 우리를 ‘텐 미니츠 첼로’로 올바르게 인도해 주소서. 28일 개봉. 15세 이상.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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