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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4월 26일 18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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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나’는 작가 자신과 거의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의 어머니는 “손복녀라는 통속적인 이름”으로 살아왔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성도(聖徒) 손안나’라는 이름으로 관 속에 누워 있었다. 삶의 궂은 일들을 평생 도맡아 하다가 온갖 주름을 안고 누운 ‘맑은 행주 같은 모습’이었다. 소학교 교육만 받고 열여덟 나이에 시집와 아홉 남매를 낳았지만 그중 셋은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다. 마흔여덟 나이에는 변호사이던 남편과도 영별해야 했다. 남은 것은 지루하고 고단한 ‘하숙 치는 일’이었다.
아이들의 다 떨어진 내의를 기워서 입고, 깊은 밤이면 남겨진 밥을 모아 먹고는 부른 배를 가누지 못하던 ‘둔한 모습’…. 그 세월 가운데 가장 어려웠던 것은 6·25전쟁 중 피란 갔다가 세 들어 살던 중국집 이층에 불이 났을 때였다. 그 힘들었던 시절의 후미진 ‘용당’ 마을 집을 먼 훗날 장성한 차남과 함께 물어물어 찾아갔던 어머니는 기억마저 흐릿한 아흔두살의 ‘옛날 이웃’을 만나 아무 말 못하고 울기만 했다.
경지에 오른 작가의 캐릭터 다루는 솜씨와 능란한 완급조절, 소재마저 자신의 삶과 밀착돼 글 속의 ‘어머니’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따뜻하고 숭고하면서도, 히스테리를 부리고 욕심내는 나이 든 한 어머니의 삶이 ‘나’의 회상 속에 드라마틱하게 드러난다.
이 책은 5월 ‘가족의 달’을 앞두고 펴낸 것이다. 작가는 서문에서 자신이 “나이 든 어머니의 비명과 고통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손에 검정 칠을 한 거지 할망구’처럼 대했다”며 진저리 처질 만큼 자학하고 있다. 이 시대 ‘비정한 자식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려는 것 같아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권기태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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