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정의 시네마 세러피][영화]'스캔들…'을 보고

  • 입력 2003년 10월 16일 17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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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영 중인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는 몸과 마음이 서로를 견제하고 말과 진심이 서로를 배반하는 ‘선수’들의 좌충우돌을 담은 연민의 기록이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현재 상영 중인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는 몸과 마음이 서로를 견제하고 말과 진심이 서로를 배반하는 ‘선수’들의 좌충우돌을 담은 연민의 기록이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현재 상영 중인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는 두 여자와 한 남자가 서로 사랑하고 배신하는 내용의 멜로영화다. 하지만 이 유려한 멜로의 포장을 한 겹 벗겨 내면 남는 것은 오히려 각자의 겉과 속이 서로를 견제하고, 몸과 마음이 따로 놀며, 말과 진심이 서로를 배반하는 내면의 드라마다.

세 주인공 가운데 마음속 전쟁에 가장 미숙하고 심한 동요를 겪는 이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조원(배용준)이다.

언뜻 보기에 그는 가장 갈등이 적은 사람 같다. 그는 학문이 깊은데 벼슬도 마다하고 서화나 즐기며 살고 있고, 용모를 가꾸는 데다 기호품을 즐기는 데 있어 매우 고상한 취향을 가졌다. 또 사랑에 연연하지 않고 스포츠를 하듯 여자를 유혹하는 게임을 하며, 그에 걸맞게 깔끔한 매너와 다양한 유혹의 기술을 구사할 줄 안다. 요즘 말로 하면 ‘쿨 가이 (Cool Guy)’ 이자 ‘선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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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곁들여 볼 비디오/DVD]'위험한 관계' 외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며 모든 여성에게 어필하는 조원 같은 인물 또는 행동패턴을, 유명한 바람둥이 돈 주앙(Don Juan)의 이름을 따 ‘돈 주앙이즘(Don Juanism)’이라 한다.

이들은 스스로의 매력에 자신만만하지만, 그 화려함이란 매우 피상적이다. 이렇게 겉으로 과시되는 남성성의 이면에는 거세당하는 데 대한 두려움과 성적인 불안 혹은 열등감이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진정한 사랑의 감정에는 되레 미숙하고 메마르며, 성적인 관계를 갖고 나면 상대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고, 막상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게 되면 도망쳐 버리는 것이 특징이다.

열등감과 두려움의 근원은 남자아이들이 4, 5세경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를 경험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머니를 놓고 경쟁하기에는 아버지가 너무 거대한 상대이며 자신은 너무 불충분하다는 데서 무력감을 깨닫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남자들은 그런 두려움을 없애고 성적인 온전함을 확인하기 위해 숱한 여성들을 유혹하고 정복하려 한다.

조원이 여성과 관계를 갖고 나서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 남기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남성성이 온전함을 확인하는 작업처럼 보인다. 게다가 몇몇 그림에는 그의 성기가 크게 과장된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 않은가.(그가 현대를 살았다면 아마 디지털 캠코더나 카메라를 이용했을 것이다. 어쩌면 인터넷에 게시하기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의 불행은 “진심인 척 했을 뿐인데 진심이 되어 버렸다. 내가 믿을 수 없을 때가 가장 두렵다”는 고백처럼, 여자를 유혹하면서도 자신의 본심이 무엇인지 헷갈려 하는 데서 시작된다.

본심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불행과 절망은 점점 깊어지는데, 이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됨에 따라 마음 속 깊이 숨겨둔 무력감과 불안이 고개를 들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원작 ‘위험한 관계’에서는 주인공인 발몽 자작이 그의 정복대상인 투르벨 법원장 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깨닫고 있는 상태에서 돌진한다. ‘스캔들’의 조원은 훨씬 더 취약한 사람이다. 조원은 집으로 찾아온 숙부인(전도연)에게 “당신이 사랑한다는 걸 안 순간, 내 사랑이 변하더이다”라고 말하며 그녀를 피하려 하는데, 붉어진 그의 눈은 곧 그의 말을 배반한다. 그가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나약한 마음과 마주하고 있음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다.

숙부인의 시동생이 조원의 등에 칼을 꽂는 장면은, 그의 마음이 글자 그대로 ‘정곡이 찔려’ 버렸음에 대한 은유인 것 같기도 하다.

또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어머니 같은 여자-이는 금지된 정절녀 숙부인이기도 하고 게임에 이겨 차지하게 된 연상의 친척 누이 조씨부인(이미숙)이기도 하다-를 정복해 버린 데 대한 조원 자신의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에게 내린 징벌이기도 한 것 같다.

‘스캔들’은 그렇게 우왕좌왕하다 좌절해 버린 조선시대 ‘선수’에 대한 연민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무릇 어디선가 유혹과 배신을 반복하며 그것을 자랑으로 삼는 겉만 번지르르한 남정네를 만나거든, 돌을 던지기 전에 한번쯤 긍휼히 여겨 바라볼 일이다.

유희정 정신과 전문의· 경상대병원 정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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