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엔드 포커스]"글을 쓰고 싶소" 유태준씨의 ‘南과 北

  • 입력 2003년 5월 22일 16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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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북의 체제를 견디지 못하고 남으로 온 유태준씨. 그는 이후 다시 북으로 갔다가 남으로 오는 길을 택했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일까. 동아일보 자료사진
1998년 북의 체제를 견디지 못하고 남으로 온 유태준씨. 그는 이후 다시 북으로 갔다가 남으로 오는 길을 택했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일까. 동아일보 자료사진
10일 오후 5시경 서울 종로구 종로 1가 인도에서 30대 중반의 남성이 1인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겁먹은 듯한 6, 7세 가량의 꾀죄죄한 사내아이가 옆 배전반 위에 앉아 있었다.

남성은 자신의 주장을 적은 가로 1m, 세로 1m20 크기의 대자보 두 장을 들고 있었다.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은 내용을 훑어보다가 이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나쳐 갔다.

남성이 들고 있던 대자보의 제목은 ‘나와 아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내 달라’였다. 30여분 뒤 남성은 대자보를 접고 아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탈북자 유태준씨(35)와 그의 아들 윤호(7).

유씨는 98년 11월 탈북해 남으로 왔다. 대구에서 택배회사 등을 전전하던 유씨는 2000년 6월 중국을 통해 입북했다. 그러나 2001년 11월 다시 탈북해 이듬해 2월 남으로 돌아왔다. 재탈북한 뒤에는 “북한 국가보위부 감옥 담을 넘어 도망쳤다”는 등 조사과정에서 진술한 내용 중의 거짓말이 드러나 탈출 배경에 의혹이 일기도 했다.

지난해 12월 유씨는 북한주민 접촉 신청을 하지 않고 북에 간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재판이 진행 중이던 11일 “선고 공판에 두 번이나 출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기 의왕시 서울 구치소에 구속 수감됐다.

남과 북 어디에도 발 딛지 못하고 방황하는 그는 누구인가.

● 소설을 좋아하던 청년

1994년 7월 9일 함경남도 함흥시. 도당위원회는 오전부터 중대방송이 있으니 TV를 보라고 주민들에게 알렸다. 낮 12시경 TV는 검은 리본이 드리워진 김일성 주석의 영정을 보이며 그의 죽음을 알렸다.

유씨의 어머니 안정숙씨(60·98년 탈북)는 대성통곡했다. 그러나 아들 유씨는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덩실덩실 춤을 췄다.

“너 뭐하니? 너 때문에 우리 망하겠다야.” “엄마 앞이니까 내 이러지. 걱정 마시우.”

유씨가 어렸을 때 평양 인민경제대 교수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안씨는 김책공대를 나와 외국서적을 출판하던 외국문출판사에 다니고 있었다.

출판사 일은 바빴다. 오전 2시경에 들어와 오전 8시 출근하느라 아들을 제대로 볼 시간이 없었던 안씨는 아들에게 장난감 삼아 책을 건네줬다. 유씨는 10대 때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고난의 길’ 등 허가된 외국 서적 말고도 어머니가 몰래 가져온 톨스토이, 셰익스피어, 빅토르 위고 등 세계문학전집을 읽었다.

어머니는 무력부 후방총국 군의국장(장군급)과 재혼했다. 그러나 90년 ‘말 한마디 잘못한’ 죄로 유씨 가족은 함흥으로 쫓겨났다. 유씨는 “새 아버지 잘못 만나서 망했다”고 원망했다.

유씨는 함흥에서 당시 중앙석탄판매상사 사장이었던 어머니 대학 선배와 ‘힘 있는’ 친척들의 도움으로 함남 석탄판매소 판매지도원 자리를 얻었다. 함남 지역 탄광에서 캐낸 석탄을 공장과 지역 당에 분배하는 일을 맡는 그 지위는 권세가 대단했다. 공급이 달리는 석탄을 더 많이 받으려고 공장 지배인과 도당 간부들은 담배도 피지 않는 그에게 노동자 두 달 임금 값어치의 영국제 담배를 안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외골수처럼 정직했다고 한다. 간부들이 어머니에게 잘 봐달라며 뇌물을 놓고 가면 다시 갖고 가라고 전화를 했다. 석탄이 탄광에서 판매소로 올 때 으레 중간에서 새던 일도 없어졌다.

유씨는 당 고위간부의 딸과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안정된 지위를 갖고 있음에도 체제에 대한 회의는 깊어져 간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 안씨에 따르면 글을 쓰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되뇌는 아들에게 “그럼 한번 써보라”고 권해도 유씨는 벽에 걸린 김정일 사진을 보며 “저 새끼 아래서는 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96년 간부급들이 백두산 답사를 떠날 때는 홀로 국경을 넘겠다며 나침반을 준비해 갔었다고 한다.

98년 11월 유씨는 아들 윤호를 데리고 탈북했다. 평소 탈북 의사를 밝히면 펄쩍 뛰던 아내에게는 평양 할머니 댁에 다녀온다고 했다. 당시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아 쌀 500g만 있으면 원이 없겠다고 했을 정도였지만 그의 집에는 쌀이 닷 말이나 있었다.

● 북에서 겪은 것

2001년 8월 14일 평양 인민문화궁전. 유씨는 북의 기자들과 인터뷰를 했다. 그의 곁에는 부인 최정남씨도 있었다.

“나는 남조선괴뢰정보원의 모략에 걸려 남조선에 나갔다가 ‘국제결혼’을 구실로 다시 빠져나왔습니다. 내 아들 윤호를 공화국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입북한 뒤 유씨가 가진 두 번째 기자회견이었다. 이 자리에서 유씨는 “아들의 목소리도 알지 못한다고 한 어머니를 저주한다”고 말했다.

어머니 안씨는 당시 국내 한 신문에 “아들은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 말을 쓰는데 라디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함흥 말씨”라며 “아들이 아닌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이 기자회견이 끝나고 11월 초순 유씨는 자신이 수용돼 있던 평남 평성 양정사업소를 탈출해 그달 말 북한을 다시 탈출했다. 탈출과정은 아직까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유씨 자신도 구체적으로 어디를 거쳐서 어떻게 돌아왔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다.

다만 유씨는 2000년 6월말 아내를 만나러 함흥시의 처가를 찾아갔다가 잡힌 후 큰 육체적 고통을 겪었다고 어머니 안씨에게 밝혔다.

함경북도 무산에서 잡힌 유씨는 화물차 적재함에 묶인 채 함흥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보위부원들이 그를 역 광장에 내려놓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그를 발로 밟고 차기 시작했다.

“이 새끼야, 다른 사람은 굶다가 살려고 마지못해 가는데 너는 배가 부른데도 도망갔나.”

유씨는 이후 평양으로 옮겨져 시보위부와 국가보위부 감옥에 약 8개월 간 수감된 것으로 알려졌다. 유씨는 이곳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고 말했다.

남으로 돌아온 후 유씨는 어머니 안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곳에서는 벌레가 제 우상이었어요. 쥐며느리, 바퀴벌레, 나방을 다 잡아먹었어요.”

● 남에서 겪은 것

유씨가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지 5일째인 15일, 기자를 만난 어머니 안씨는 “태준이가 나오면 정신병원에 입원시켜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 2월 다시 남으로 온 뒤 유씨는 “빨리 집을 달라. 나가서 윤호와 혼자 살겠다. 어머니와는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98년 정부에서 받은 대구의 임대아파트는 유씨가 입북한 뒤 정부에 몰수된 상태였다.

아들 윤호가 할머니나 삼촌인 유씨의 이부(異父)동생 이근혁씨(22)와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뺨을 때리기 일쑤였다. “근혁이 때문에 내가 이 모양”이라며 두서없이 화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안씨는 이러다 살인나겠다며 통일부에 집을 얻어달라고 요청했지만 재판이 끝나야 한다는 말만 들었다. 결국 유씨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쪽방을 얻어 나갔다.

그곳에서도 유씨의 이상한 행동은 이어졌다. 아들에게 밥만 계속해서 먹이거나 고기에 향수를 뿌려 먹이기도 했다. 아들에게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말라고 하는가 하면 “네 이에 도청장치가 달려 있으니 입을 벌리지 말고 이야기 하라”며 혼을 냈다고 한다.

유씨는 2001년 3월 자신을 돕기 위해 결성된 시민단체 ‘피랍탈북인권연대’측에 빨리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써 달라고 재촉했다. 인권연대측은 서울지검에 탄원서를 냈다.

올해 3월과 4월 열린 두 차례 공판에 유씨는 모두 참석했다. 재판정에서 그는 “아들에게 엄마가 필요해 아내를 설득하러 북에 갔다”며 선처를 호소했지만 검찰은 징역 1년을 구형했다. 인권연대측은 구형과 선고의 차이를 설명했지만 유씨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

이후 유씨는 세종로 교보빌딩 앞에서 윤호를 데리고 1인 시위를 했고 지난달 25일로 잡힌 선고공판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9일 2차 선고공판에도 나가지 않았다.

17일 서울구치소 접견장에서 기자와 만난 유씨는 어머니의 걱정과는 달리 정상적으로 보였다. 10분간의 접견 시간 동안 그는 초면의 기자에게 빅토르 위고의 ‘93년’이라는 작품을 가장 감명 깊게 읽었다며 책을 구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1793년 혁명의 와중에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을 배경으로 한 그 작품의 주제는 ‘인간성의 회복’이었다고 유씨는 설명했다. 접견장 철창 너머로 엷게 웃던 그는 “여기서 나가면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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