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전대표 김민기 "겸손하지 않으면 '미운놈들' 닮아 갈텐데"

  • 입력 2003년 3월 11일 18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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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는 “새 정부 문화인맥들이 과거를 전복하려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미워하던 사람들을 닮아가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 -홍콩=오명철기자
김민기는 “새 정부 문화인맥들이 과거를 전복하려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미워하던 사람들을 닮아가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 -홍콩=오명철기자
《‘운동권’이 모두 ‘기득권’이 돼 버린 현실에서 김민기(52)의 존재는 ‘아침이슬’만큼 영롱하다. 한 번도 남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한 적이 없을뿐더러 20대에 이미 ‘전설’이 된 자신의 삶과 노래를 늘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10년째 운행 중인 ‘지하철 1호선’을 몰고 아시아의 권위있는 예술제인 ‘홍콩 아츠 페스티벌(2월 14일∼3월 9일)’에 다녀왔다.

쿠르트마주어가 지휘하는 프랑스국립오케스트라를 비롯해 함부르크 발레, 슈투트가르트 오페라단, 허비 행콕 등이 참가한 국제적 문화 행사에 뮤지컬로는 유일하게 초청을 받은 것이다.

4박5일 동안 그의 곁에서 공연에 대한 소감과 우리 현실에 대한 진단, 그리고 대학로 터줏대감으로서 이제는 ‘문화권력’이 된

후배들에 대한 생각들을 들었다.》

―소감은….

“잘된 것 같아. 홍콩 공연예술아카데미 내 리릭시어터에서 열린 세 번의 공연이 모두 매진됐고 관객들의 반응도 뜨거웠지. 지금껏 1800회가량 공연을 했지만 이번에는 1000석 규모의 대극장이라서 ‘적응’하는 데 조금 애를 먹었어. 한국에서는 이 작품을 코믹하게 받아들이는데 여기서는 정치풍자극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차이가 있지. 중국 본토만 해도 덜 보수적이었는데 홍콩은 일찍부터 국제화해서 그런지 합리적 보수성 같은 것이 엿보이더군. 하지만 젊은 관객들의 열의와 극장의 젊은 스태프들의 헌신은 정말 감동적이었어.”

―‘지하철 1호선’으로서는 독일 중국 일본에 이은 네 번째 해외 나들이였다. 이 작품이 앞으로 어디까지 운행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가.

“정말 신들린 작품이야. 94년 뮤지컬을 공부한다는 심정으로 원작자인 폴커 루드비히 선생의 작품을 우리 현실에 맞게 번안해 무대에 올렸지만 이 작품이 여기까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어. 지금까지 시대 상황에 맞춰 세 번 개작했지만 1990년대가 우리 사회에서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시대의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다시는 고치지 않겠어.”

―솔직히 ‘지하철 1호선’을 통해 보여지는 90년대 한국의 현실과 최근의 대구지하철 방화참사 사건 등이 겹쳐지면서 이 부분이 외국 관객들에게 어떻게 비칠질까 해서 부담스러웠다. 이제는 월드컵 등을 통해 나타난 ‘다이내믹 코리아’ 같은 부분을 담아내야 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이미 내가 시대의 주체가 아닌 관객이 됐기 때문에 거기까지는 내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해. 나는 내가 겪은 시대의 그늘진 곳을 담담하게 전달해줄 뿐이고 이를 위해서만도 할 일이 너무나 많아. 우리 사회의 밝은 부분을 담아내는 것은 다른 이들의 몫이지.”

―새 정부가 출범했고 많은 이들의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지난 정부에 이어 이번 대통령 취임식에서도 ‘내 나라 내 겨레’ ‘상록수’ 등 당신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새 정부에 대해서는 어떤 기대를 갖고 있나.

“시대는 늘 바뀌어야 해. 바뀌는 게 아름답지. 하지만 30년 전 내가 만든 노래가 아직도 울려 퍼지는 현실이 부끄럽고 서글퍼…. 나는 내 노래가 필요없는 시대에 살고 싶거든. 새로운 세력들을 존경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잘해주기를 바랄 따름이야. 다만 한 가지, 마피아들처럼 떼 지어 몰려다니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들이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시기는 단지 5년에 불과하거든. ‘노래 권력 30년’인 내가 ‘정치 권력 5년’을 걱정하는 것이 우습지 만….”

―새 정부의 파워 엘리트들이 너무 아마추어적이라는 우려도 있는데….

“과거에는 뻔뻔한 인물들이 많았지만 지금 드러난 사람들은 그래도 참신해. 현실적으로 그들이 ‘최선(最善)’이긴 하지만 ‘최고(最高)’일 수는 없기 때문에 더 좋은 ‘대안(代案)’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

―평소 친분이 있는 문성근 명계남 이창동씨 등이 새 정부의 ‘문화 실세’로 부각되고 있는데….

“다 ‘먹물 딴따라’들이지 뭐. 연출 감각이 절정에 오른 창동이는 정말 아까워. 앞으로 그의 영화는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아. 성근이와 계남이도 굳이 자기를 드러내지 말았으면 좋겠어. 한꺼번에 많은 일을 하려고 들기보다는 문화적 개혁에 대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상상력을 주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딱 한 가지, 미운 놈 닮아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과거에 활약하던 사람들을 전복(顚覆)하려고 하면 미워할 수밖에 없고 그럴수록 그들을 닮아갈 수밖에 없거든. 제발 겸손해지라고 말해주고 싶어.”“공연 한 편 올리는 것이 미사일 한 방 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그는 긴장을 풀기 위해 맥주를 밥처럼 먹곤 한다. 이번 홍콩 공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먹은 맥주가 웬만한 시골 저수지 분량은 되는 것 아니냐”고 묻자 그는 “에이, 뭐 그렇게까지…. 하지만 국제 규격의 수영장 정도는 될 거야”하며 웃었다. 이번 공연에도 에르메스 한국지사장 전형선 사장과 가수 윤도현 등 그의 ‘추종자’들이 홍콩까지 달려와 온갖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보다 훨씬 행복한 사람이다.

▼10월 2000회 맞는 '지하철 1호선' ▼

극단 학전 대표인 김민기씨의 요즘 소망은 ‘지하철 1호선’의 2000회 공연을 맞는 올 10월말이나 11월초 원작자인 폴커 루드비히와 베를린의 원작극단을 한국에 초청하는 것이다.

“2001년 원작극단의 1000회 공연 때 베를린시의 초청으로 모든 경비와 개런티를 지원받아 독일에 다녀왔다. 그 답례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3일간 원작극단의 공연을 하고 우리 극장에서 그들의 축하를 받아가며 한국에서의 2000회 공연을 자축하고 싶은데 2억원가량의 경비를 마련할 방법이 없다.”

원작이 번안돼 본바닥보다 외국에서 더 인기를 끄는 것은 아주 드문 사례. 원작자 루드비히는 세계 40여개국에서 공연된 바 있는 ‘지하철 1호선’ 중에서도 한국 버전의 독창성과 사회성을 가장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번에도 그는 홍콩까지 날아와 관객들과의 대화 시간에도 참여했다.해 “만족을 모르고 작품을 계속 고쳐온 김씨와 훌륭한 배우, 젊은 음악인들에게 찬사를 보낸다”고 감사를 표시했다. 도와달라며 손 벌리는 일을 극구 사양해온 김씨는 “이번 홍콩 공연에도 국제교류재단의 이인호 이사장님이 많은 도움을 주셨는데 더 이상 괴롭혀 드릴 수는 없다. 하지만 동방예의지국의 체면이 있는 것이 아니냐.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경비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홍콩=오명철기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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