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영원한 현역' 남덕우 산학협동재단 이사장

  • 입력 2003년 1월 2일 17시 23분


남덕우 산학협동재단 이사장./신석교 기자
남덕우 산학협동재단 이사장./신석교 기자
“이게 무엇인가요?”

녹음기 겸용 MP3 플레이어를 탁자 위에 내려놓는 기자를 보며 노(老)경제학자는 호기심을 드러냈다. 설명을 하자 감탄사를 내뱉으며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지난달 27일 남덕우(南悳祐·79) 산학협동재단 이사장을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인터넷으로 유엔식량농업기구(FAO) 등의 홈페이지를 뒤지며 세계 쌀 재고량를 찾아보던 중이었다.

남 이사장은 6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재무부장관, 경제담당 부총리, 국무총리 등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친 경제계의 ‘원로’다.

원로는 ‘낡은’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미국 월가의 이름난 펀드 매니저들은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울 때면 원로 경제학자들을 찾아 한 수 가르침을 듣는다. 통찰력 있는 원로는 책에서도 배울 수 없는 ‘암묵지(implicit knowledge)’를 풍부히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남 이사장은 정치적 입장이나 경제적 견해가 서로 다른 한국의 정재계인사들이 두루 그 ‘암묵지’에 귀를 기울이는 드문 인물이다. 연구실과 정책현장을 넘나든 경험에서 비롯된 ‘암묵지’가 풍부한 원로로 인정받는다. 팔순을 바라보지만 ‘과거형’이 아닌 ‘현역’이다.

● 새로운 것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

어느 정도 이상의 나이가 되면 컴퓨터 그 자체보다는 마우스 더블 클릭을 더 버겁게 여긴다. 그러나 남 이사장은 “컴퓨터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라고 말했다.

그는 80년대 초반 IBM이 개인용 컴퓨터(PC)를 내놓기 이전부터 전문가용으로 나왔던 컴퓨터 ‘K 프로’를 애용했다. 미국 스탠퍼드대 초청교수 시절 논문을 쓰기 위해 손에 익힌 게 시작이었다.

83년 무역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이 ‘두꺼운 철판’으로 된 PC를 사무실로 옮겼더니 직원들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궁금해했다. 그 뒤 IBM 데스크톱 PC가 보급되면서 그는 무역협회 내에 1인 1PC 시대를 열게 했다.

남 이사장은 지금도 세미나나 회의장에 들어갈 때면 필기도구 대신 소설책 크기의 소니 노트북 PC ‘바이오’를 챙긴다. 어쩌다 펜으로 메모한 것도 즉시 컴퓨터에 옮긴다. PC에 입력된 정보는 필요할 경우 밤샘 작업을 거쳐 다음날 회의 때 쓸 프레젠테이션 자료로 만든다. 파워포인트 등 다른 소프트웨어도 매뉴얼을 보며 스스로 익혔다.

그는 “방청객으로 참석한 세미나 등에서 예기치 않게 연설을 요청받을 때가 있는데 그럴 경우 PC를 들고 나가면 그 안에 저장된 정보를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남 이사장은 평소 붓글씨 쓰기, 골프를 즐기지만 사진 찍기도 좋아한다.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필요한 사진을 찍은 뒤 컴퓨터에 띄워 이모저모 편집해본다. 예전에 아날로그 사진기로 찍어 놓은 사진도 스캔해서 컴퓨터에 보관해 두었다.

집무실 서고에 책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지만 그가 주로 정보를 얻는 곳은 인터넷이다.

“책이 이렇게 많은데 다 번거로워요. 매번 대학 도서관에 보내기도 하지만 자꾸 고이고…. 인터넷에는 웬만한 정보는 다 있으니까 자꾸 손이 키보드로 가게 되지요.”

● “지금까지 본 누구보다 학구적”

그에 대한 주변 사람의 평가는 비슷하다. 비슷한 예를 찾기 어려울 만큼 학구적인 인물이라는 것.

남 이사장이 98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원로자문단이 된 이후 줄곧 가까이에서 그를 지켜본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은 “지금까지 봤던 재계, 관계 원로 가운데 그만큼 학구적인 사람을 보지 못했다. 연구는 일정 연령이 넘어서면 안 하거나 못하기 마련이지만 그는 자신이 연사로 초빙되지 않은 세미나라도 조용히 방청석에 앉아서 경청한다”고 말했다.

원로자문단 모임을 운영해온 전경련 이승철 상무는 “그의 연설은 늘 정확한 최신의 사실에 입각해 현안을 다룬다”며 “지(知)적으로는 젊은이 수준의 건강성, 역동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 이사장은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지 묻자 “천성”이라고 답했다.

“나는 심심해서 못산다는 말을 도저히 이해 못해요. 인터넷 찾아봐야지, 영어·일어 잡지 읽어야지, 한국 신문 읽어야지, 책도 들여다봐야지, 붓글씨도 써야지, ‘제국의 아침’도 봐야지…. 집에서고 밖에서고 오히려 시간이 없지.”

현안을 놓치지 않는 그의 공부는 결국 현실정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남 이사장은 현재 한국 중국 일본의 경제계 인사들이 참가하는 동북아경제포럼의 한국위원회 위원장이다. 이 기구를 통해 그는 한국이 앞으로 동북아의 물류 중심지가 될 수 있고, 돼야 한다는 주장을 몇 년째 펼쳐왔고, 지난해 4월 DJ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국가 실현방안’을 발표했다.

또 90년대 초반부터 그는 동북아 경제개발은행을 만들자는 주장을 펼쳐왔는데 처음에는 반대하던 일본이 최근 ‘지지’로 방향을 틀었다.

그의 주장은 때로 다른 전문가에 의해 고스란히 원용되기도 한다. 남 이사장은 소액주주에 의한 집단소송제도 도입 여부를 둘러싼 논란을 보며 “대륙법 체계를 받아들인 한국에서는 당사자가 소송을 제기해야 보상받는 게 일반적인데 집단소송제는 당사자 원칙에 어긋나는 보상제도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옳은 방향이라도 도입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왔다. 한국경제연구원 좌승희 원장은 “남 이사장의 이 설명을 듣는 순간 집단소송제에 대한 이해가 명쾌해졌다”며 이후 집단소송제에 관해 언급해야 하는 자리에서는 늘 이 말을 인용한다고 말했다.

조명현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신념이 있어도 실천을 잘 안 하는 편이지만 그는 어떤 경제학자보다 신념이 확고하면서 이를 현실에 반영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 최근 관심사는 농업문제

인터넷으로 쌀 재고량을 찾는 이유를 묻자 그는 “21세기를 맞은 한국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농업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러 자료를 뒤진 결과 앞으로 50년 동안 세계 쌀 생산은 잘해봤자 두 배로 늘어나지만 인구는 그보다 더 빨리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이때 쌀 헤게모니를 가진 국가와 아닌 국가의 국력 차이는 너무도 크게 날 것이라는 것.

우루과이라운드에 이어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 등을 통해 한국은 쌀을 개방해야할 처지다. 그러나 외국의 값싼 쌀이 수입될 경우 한국은 농업기반이 흔들릴 위기를 맞고 있다.

남 이사장은 “쌀만 갖고는 농업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며 “이제는 쌀 문제를 농촌지역개발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암에 좋은 버섯’처럼 이미 개별 농민 수준에서 농업에 과학이 접목되고 있으니 이제는 국가가 체계적으로 농업을 과학화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 또 농업을 기업화해야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 이사장은 “새 정부는 21세기에 한국이 먹고 살 전략산업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DJ 정부에서 개선하고자 했지만 지지부진하고 만 교육개혁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한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이 다 알아서 하겠지만 나는 나대로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작은 목소리라도 내는 거지요. 그러다 듣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설득하는 거고….”1시간 남짓한 인터뷰 내내 또렷한 주장을 펴는 그에게 건강관리 비법을 물었다.

혈압약을 먹는 것 빼고는 특별히 아픈 데가 없다는 그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맨손체조를 한다고 했다. 단전호흡의 준비운동에서 착안한 그만의 맨손체조는 ‘항문운동 300번, 장운동 300번, 팔다리 6군데의 관절을 각 10번씩 좌우로 돌리기, 일어나서 맨손체조하기’로 이어진다. 하임숙기자 artem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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