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현장칼럼]‘위기관리 컨설팅’

  • 입력 2002년 12월 12일 16시 08분


한국법과학연구소 직원들 /신석교기자
한국법과학연구소 직원들 /신석교기자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출신 연구원들이 작년 8월 설립한 한국법과학연구소는 국내 최초의 민간 과학감정 전문업체다. 최근 ‘개구리소년’ 부모들이 소년들의 사인 규명을 의뢰해 관심을 모았다. 이곳에는 요즘 개인이나 가족, 회사에 닥칠지 모르는 각종 위기를 미리 감지하고 방지하는 ‘위기관리 컨설팅’ 의뢰가 늘고 있다. 인기가수 겸 탤런트 J씨도 9월 △협박 △악성루머 △사이버테러 △스토킹에 대비하는 위기관리 컨설팅 계약을 했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사연으로 이 컨설팅의 문을 두드릴까. 컨설팅 의뢰의 밑바닥에는 어떤 ‘독(毒)’보다 무서운 ‘의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 오너십 위기관리

지난해 12월 수도권 한 은행 지점에서 업무 마감 후 뒷문으로 몰래 들어와 카운터에 놓인 잔금을 갖고 달아나는 남자의 모습(노란선)이 흐릿하게 담긴 폐쇄회로TV화면을 한국법과학연구소로 보내왔다. 영상감정을 통해 책상 등 각종 사무집기의 실제 길이를 측정(빨간선)한 후 이를 영상 속 남자와 비교, 남자의 실제 키(175㎝)를 측정해 용의자를 압축했다./사진제공 한국법과학연구소

종업원 100여명 규모의 한 유통업체는 인사관리에 위험요소가 없는지 물어왔다. 오너가 조직 내부를 제대로 장악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달라는 것. 오너의 지시를 통해 사원 전원을 대상으로 무기명 서면 설문조사가 실시됐다. 부장 승진 대상자 이름을 나열하고 △직원통솔 능력 △업무처리 능력 △회사관 △가정생활 △도박 여부 △개인 채무관계 △승진 적절성 여부(그 이유) △참여하는 공식·비공식 모임의 성격 및 모임 멤버 등을 조사했다. 회사 최초로 상향평가를 실시한다는 명분 아래 이뤄진 조사를 통해 회사의 중추인 과장 직급자들의 능력과 성향이 파악됐다. 다음은 관리과 ○○○과장에 대한 설문결과 중 일부.

①부서직원들과의 관계〓원만하지 않음 ②직원통솔 능력〓자기 주장을 확실하게 못 내세운다. 소극적이며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 ③회사관〓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 회사에 관심 없음. 가정 우선. 때론 회사에 비판적이고 배타적 ④건강상태〓피곤해 하며 병원에 자주 다님 ⑤도박이나 내기〓포커에 빠졌다는 소문 들림 ⑥개인 채무〓독촉전화가 옴. 최근 통화 장면을 한 번 목격하였으나 해결한 듯함 ⑦승진이 적절한지〓조직생활력과 애사심 부족으로 부적절 ⑧참여 모임〓사내 낚시동호회 회원이나 이 동호회는 사실 ○○고교 선후배 집단으로 조직에 비판적.

단편적으로 나타난 조사 결과를 모으고 연결해 퍼즐이 완성됐다. 사내에 △특정 지역 출신 모임 △특정 대학 및 고교 동문 모임 △총각사원들의 성생활 관련 계모임 등 3개의 이너서클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 하나는 회사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의 모임. 최근 모임에서 “주도권을 쥐려면 ○○○부장과 ○○○과장의 지시와 협조요청은 빨리 처리해 주고 ○○○과장의 업무협조는 딜레이(지연)시키자”고 암약(暗約)한 것으로 조사됐다. ‘불만세력’은 핵심 5명을 포함해 20명 규모로 밝혀졌다. 최근 있었던 인사에서 오너는 무능하거나 애사심이 부족한 것으로 지목된 과장 중 일부를 승진시키지 않았다. ‘불만세력’이 동일 부서 부-과장으로 ‘라인’을 형성하고 있는 경우 한 사람을 타 부서로 전출시키고 그 자리에 오너 자신의 수족(手足)을 앉혔다. 총무과 총각 직원 2명이 한 처녀 직원을 놓고 서로 다투다가 업무 처리가 늦어지는 사실이 부수적으로 확인돼 총각 직원 1명을 타 부서로 보냈다.

● 유괴 위기관리

서울의 한 중소기업 사장은 얼굴이 남달리 서구적이고 예뻐서 주목을 받는 초등학교 3학년 딸 B양(9)이 걱정스러워 유괴 및 성추행 방지 컨설팅을 의뢰했다. 일단 B양과 가깝게 지내는 학교와 학원 친구 10명이 관찰대상이 됐다. 탐문으로 B양 친구들의 가족 구성과 부모 직종 등을 알아 두었다.

B양의 일상도 1주일간 추적 관찰했다. ‘집→(자가용)→학교→(도보)→피아노학원→(도보)→속셈학원→(자가용)→집’으로 나타난 B양의 행로에서 △피아노학원에서 속셈학원으로 걸어갈 때 분식점에서 떡볶이를 사 먹는 점 △학원에서 학생 개별면담을 위해 수업 후 남겨놓는 경우가 있다는 점 등 2가지가 잠재적 위기상황으로 지목됐다. 부모에게는 다음 5가지 위기관리 방안이 제안되었다.

①휴대전화를 사 주어 딸이 방과 후 학원으로 이동할 때 집에 전화하는 습관을 갖도록 한다 ②해당 분식점 떡볶이를 집에 사다놓고 “학원에 가는 도중 가게에 들르지 말고 학원 수업이 끝나고 집에 와 군것질하라”고 설득한다 ③학원 공부를 마치고 나왔는데 낯선 사람이 “김 기사가 오늘 아파서 대신 데리러 왔다”고 할 경우 절대로 차에 타지 말라고 교육한다. 운전기사가 바뀌면 반드시 휴대전화로 알려줄 것이므로 기타 상황은 모두 거짓임을 알려준다 ④학원 강사가 “수업 끝나고 남으라”고 하면 어떤 이유로 얼마간 학원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를 물은 후 전화로 부모에게 알리도록 지도한다 ⑤학원 끝나고 친구들이 영화 보러 가자고 할 경우 반드시 집 승용차를 타고 가 관람한 뒤 같은 차를 타고 귀가하도록 한다(친구 자신도 모르는 사이 범인에게 이용당할 수 있으므로).

● 횡령 위기관리

서울 인근 플라스틱 제조업체 오너 C씨(51)는 ‘자금의 흐름’을 점검해 달라고 3월 의뢰했다. 장부상으로는 문제가 없으나 왠지 거래량에 비해 입금액이 모자라는 느낌이라는 것. 연구소는 C씨의 동의를 얻어 20대 후반 남자 조사원 D씨를 관리부 신입사원으로 위장 취업시켰다. D씨는 △수염이 덥수룩할 때까지 잘 다듬지 않는 등 다소 지저분하며 △과묵하고 △먼저 아는 척하지 않고 누군가 자세히 설명해 준 뒤에야 “아아”하고 뒷머리를 긁적이며 △몸이 뚱뚱하고 게을러 보이는 인상 때문에 선택됐다. D씨는 돈을 헤프게 써서 돈이 달리는 척했다. D씨가 팀장과 의도적으로 친하게 지내기 시작한 지 2개월만에 팀장은 “장부를 이렇게 처리하면 교통비 정도는 ‘먹을’ 수 있다. 월급도 쥐꼬리 같은데 이 정도는 용인되는 것 아니냐”며 ‘포섭’을 시작했다. ‘대어’를 낚을 때까지 더 기다렸다. 3개월이 지날 무렵 D씨는 ‘떼먹은’ 돈을 모아 둔 타인명의 계좌를 발견했다. 관리부 직원 6명은 공모하여 들어오는 물건의 수량 중 일부를 장부에서 누락하는 방법으로 수개월간 5억원 가량을 착복한 것으로 드러났다. 오너 C씨는 “조용히 해결하겠다”면서 관리부 팀장을 해고하고 나머지 5명은 전원 생산직으로 전보 발령했다.

한 마케팅 업체에서는 작년 12월 경리 여직원만 만질 수 있는 회사 현금카드가 누군가에 의해 도용돼 1주일간 400만원이 인출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업체는 현금카드 지문조사를 의뢰했다. 감식된 지문은 회사가 ‘의심스럽다’며 제시한 직원 5명의 주민등록증 중 1개에 나타난 지문과 일치했다.

횡령 등 범법행위가 의심되어도 경찰에 신고하는 경우는 드물다. 기업들이 △기업 이미지 훼손 △경찰 조사 과정에서 의외의 사실이 추가로 드러날 가능성 △경찰 요구자료(장부 등)를 빠짐없이 제출해야 하는 불편 등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보안 위기관리

내부 정보유출을 막기 위한 컨설팅의 경우 다음 9가지는 기업이 지켜야 할 기본사항에 속한다. ①데스크톱 컴퓨터 및 노트북 컴퓨터의 모든 디스켓·디스크 드라이버를 없앤다 ②서버 하나에 회사 내 모든 데스크톱 컴퓨터를 연결, 서버 내 데이터를 끌어와 사용한 후 다시 서버에 저장하게 한다. 하드 드라이브에 데이터가 있으면 무조건 문책한다 ③직원들에게 고유 아이디 번호를 주고 그것으로만 인트라넷에 접속하게 한다 ④외부 손님은 정해진 접견장소에서 만난다. 자기 책상에서 맞는 일이 없도록 한다(단추 카메라로 모니터나 책상 위의 서류를 찍어갈 수 있다) ⑤카메라 내장 휴대전화를 금지한다 ⑦금속탐지기를 출입구에 두어 소형 노트북이나 녹음기 등의 유입 및 반출을 점검한다 ⑧휴대전화는 출근시 사내 교환전화로 착신번호를 바꾼 뒤 전화 걸어온 사람의 번호와 신원을 교환이 확인한 후 연결해 준다 ⑨서류 파쇄기 사용을 의무화하며, 쓰레기 처리 용역업체의 작업과정을 불시 점검한다(경쟁업체에서 서류 쓰레기를 빼내가기도 한다).

한국법과학연구소 소장 신윤열 박사(분석화학 전공)는 “내부 정보유출자를 ‘색출’하는 작업은 다음 3가지 사실을 실마리로 풀어 나간다”고 했다. 첫째, 중요한 일을 하지 않는 자는 유출할 정보도 없다. 둘째, 정보는 반드시 모이는 곳에서 흘러나온다. 셋째, 섹스 아니면 돈이 원인이다.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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