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정의 첫발은 서로 인정하는 것"

  • 입력 2002년 11월 21일 17시 35분


악셀 호네트 교수(왼쪽)/전성우 교수
악셀 호네트 교수(왼쪽)/전성우 교수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이론으로 널리 알려진 ‘비판이론’이 동아시아 민주주의에서 가지는 의미를 탐색하기 위한 국제학술대회가 16∼19일 일본 교토의 독일문화원에서 개최됐다. ‘비판이론의 시각에서 본 동아시아 민주주의의 잠재적 가능성’을 주제로 열린 이 학술대회에는 한국 독일 일본 중국 호주 등 각국 학자 30여명이 모였고, 특히 이 중에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제3세대를 대표하는 악셀 호네트 교수(프랑크푸르트대·철학)가 참가했다. 호네트 교수와 한국측 학자로 참가한 전성우 교수(한양대·사회학)의 대담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견제 역할을 해 온 비판이론의 전망, 서구의 공동체주의와 개인주의 논쟁이 동아시아에 갖는 의미 등을 짚었다.》

▽전성우 교수〓지난 30년간 독일의 비판이론과 프랑스의 탈구조주의는 서유럽을 대표하는 두 개의 사상적 흐름을 이뤄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두 이론의 차이를 부각시키고, 각각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사상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비판이론의 시각에서 탈구조주의를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악셀 호네트 교수〓최근 다소 시들해지긴 했지만 탈구조주의는 여전히 중요하고 생산적인 이론입니다. 저는 탈구조주의를 반계몽주의로 보는 위르겐 하버마스 교수의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특히 권력과 신체의 관계에 대한 미셸 푸코의 연구는 계몽적인 의미에서도 정말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비판이론과 탈구조주의는 대립적인 게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사상입니다. 탈구조주의가 합리성의 의미에 관한 비판이론의 발상을 배워야 한다면, 비판이론은 권력 담론 신체 사이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탈구조주의의 통찰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비판이론 대 탈구조주의, 현대 대 탈현대라는 구분은 잘못된 이분법입니다.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modernity)’가 갖고 있는 ‘혁신’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한 나머지 사상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습니다.

▽전〓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비판이론의 제 1세대, 위르겐 하버마스는 제 2세대, 그리고 호네트 교수는 제 3세대를 대표하는 학자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제3세대의 시각에서 앞선 세대가 제시한 비판이론의 공과를 평가해 주시겠습니까?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이론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제 1, 2세대의 어떤 점을 취하고 어떤 점을 극복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호네트〓과찬입니다. 현재의 사상은 미래의 관점에서 평가될 수 있기 때문에 지금 저를 제3세대의 대표학자로 보는 것은 다소 부담스럽군요. 하버마스 교수만 보더라도 1980년대에 들어와서야 제2세대를 대표하게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비판이론의 핵심은 사회비판이고, 사회적 병리(病理) 현상을 진단하는 것입니다. 설령 일부 좌파 진영이 이에 대해 형이상학적이라고 비판한다 하더라도 비판이론의 사회학적 상상력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오늘날 사회적 병리 현상과 불평등은 ‘합리성’이 왜곡된 결과로 풀이됩니다. 따라서 합리적 이성을 통한 해방의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앞선 세대의 연구들은 새롭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즉, 제 1세대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사고방식으로 인해 기술적 과학적 이성이 비판적 회의적 이성을 압도하게 되면서 사회적 병리가 생겨난 것으로 파악했고, 하버마스는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합리성’의 중요성을 제시함으로써 제 1세대의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하지만 하버마스의 사상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그 ‘합리성’이 언어에 내재한 것인지 아니면 상호작용의 조건에 내재한 것인지가 불분명합니다. 의사소통의 왜곡이 중요한가 아니면 사회적 갈등관계가 중요한가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며 앞으로 새롭게 탐구돼야 할 과제입니다.

▽전〓호네트 교수의 저서인 ‘인정(認定)투쟁’은 우리말로 번역됐고, 한국 철학자들과 사회학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오늘날 인정투쟁이 왜 중요한지 간략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호네트〓‘인정투쟁’은 도덕적 통합과 사회 갈등을 새롭게 해석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인정이란 타인에게 자신을 의미 있는 존재로 승인받는 것을 뜻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다름 아닌 ‘인정투쟁’이지요.

인정투쟁 이론을 통해 제가 전달하려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인간이 상호의존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회의 통합은 자신이 타인에게 중요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되는 과정을 통해 성취돼 왔습니다. 둘째는 사회 갈등의 원인은 이해관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 박탈, 굴욕, 무시의 감정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감정들을 제도화하는 메커니즘에 대해 도덕적으로 민감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회의 갈등은 인정투쟁으로 해석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인정투쟁의 특징에 주목할 때 개인의 자유에서 의사소통의 의미를 고려하는 새로운 사회정의 개념이 가능하게 됩니다. 즉, 정의의 출발점은 상호인정을 통해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드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전〓교수님은 지난 20여년 동안 정치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에 관한 책을 편집한 적이 있으신데, 지금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에 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호네트〓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은 서구적 개인주의의 지평 안에서 전개된 내부 논쟁입니다. 양 진영은 모두 개인의 자유와 자아 실현에 필요한 사회적 조건에 대해 탐색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주의라고 해서 개인주의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는 조건으로 공동체적 윤리를 부각시키는 것이지요.

▽전〓서구 사회이론은 기본적으로 개인주의 내지 자유주의의 전통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통에서 나온 이론들이 유교적 공동체주의의 영향이 여전히 강한 동아시아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다고 보십니까?

▽호네트〓그 점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 공동체주의를 주목할 만합니다. 공동체주의는 비록 자유주의에 기반하고 있지만 동아시아 사회에 적지 않은 의미를 던져줍니다. 즉, 공동체주의는 과거의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게 아니라 개혁적이고 탈전통적 맥락에서 개인과 사회를 새롭게 재규정하려는 것이고, 개인의 자율성과 사회의 공공성을 매개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의 실현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런 발상은 유교적 전통이 두드러진 동아시아 사회에서도 의미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동아시아에서도 탈전통적 맥락에서 유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성찰이 요구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유교에 내재한 평등주의적 의사소통적 성격은 새롭게 조명되고 재확립돼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전〓오늘날 ‘국가의 실패’와 ‘시장의 실패’에 대한 대안으로 ‘시민사회’가 거론되고 있는데 그 가능성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시민운동은 분화와 복합성으로 특징지어지는 현대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호네트〓오늘날 시민사회 개념은 다양합니다. 시민사회란 NGO의 활동이나 인권운동의 확장을 뜻하는 것으로 민주적 공론장을 활성화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하지만 저는 시민사회를 독자적 영역으로만 이해하는 데는 반대합니다. 시민사회가 복지국가의 역할을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이전시키려는 영역이라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민사회가 제공하는 서비스는 평등주의적 기준에 의해 배분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한다면 결과적으로 사회적 복지권은 약화되고 불평등은 증대할 것입니다.

시민사회를 둘러싼 논의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시민사회 모델이 중산층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로부터 영향을 받은 이 흐름은 시민사회에에 대한 개인의 참여만을 중시할 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경제적 기반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시민사회론은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도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정리〓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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