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축구에 미친 한국커플 VS 남편이 축구에 미친 일본커플

  • 입력 2002년 5월 30일 15시 14분


축구를 남편만큼이나 좋아하는 조가희씨와 축구 문외한인 김승준씨 부부. 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대사로 착각될 정도로 축구를 좋아하는 일본인 혼다 도모쿠니(本田知邦)와 남편 때문에 나들이 코스로 축구장에 갈 수밖에 없는 아내 박귀옥씨가 24일 서울 광화문 일민미술관 카페에서 만났다. 축구에 얽힌 이들 부부의 살아가는 얘기를 살짝 엿봤다.

축구를 남편만큼이나 사랑하는 조가희씨(왼쪽에서 두 번째)와 축구광인 일본어 강사 혼다씨(왼쪽에서 세 번째)가 축구 이야기로 열을 올리는 동안 조씨의 남편인 김승준씨(맨 왼쪽)와 혼다씨의 부인인 박귀옥씨가 재미있다는 듯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전영한기자

● 아내는 축구광

김승준〓연애할 때는 이 정도인지 몰랐어요. 여자들은 축구를 별로 안 좋아한다는데…. 제 아내는 텔레비전의 축구경기는 재방송 스케줄까지 죽 꿰고 있어요. 오전 2, 3시까지 축구 재방송을 봐요. 저녁에 축구 중계가 있는 날은 퇴근해 들어오면 밥상만 딱 차려주고는 곧바로 TV 앞으로 직행해 버리죠.

조가희〓피아노연주를 전공했지만 어릴 때부터 공으로 하는 운동은 다 좋아했어요. 그 중에서도 축구가 제일이죠. 실은 친정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운동을 참 즐기시거든요.

박귀옥〓제 친구들을 봐도 여자들은 축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데…. ‘선수 중에 안정환은 참 멋있다’는 정도죠.

김〓21일 한국과 잉글랜드 평가전이 열리던 날은 ‘아내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날은 4일 연속 야근한 뒤 닷새 만에 일찍 들어갔던 날인데다가 미국에서 온 친구와 저녁식사 약속을 했거든요. 식사를 하는데 자리에서 휴대전화로 몰래 친정집에 전화를 하는 거예요. “엄마 몇 대 몇이야”라고 묻더군요. 거기까지는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차안에서 휴대전화로 잉글랜드 축구경기만 얘기하는 거예요. 거기부터 약간씩 안 좋아졌는데 집에 들어서는 순간 재방송을 본다고 바로 TV를 켜더군요. 어이가 없어 그냥 “봐” 그러고는 자버렸죠. 닷새 만에 남편 얼굴 제대로 보는데 축구가 남편보다 더 좋나요?

혼다〓그 정도 갖고 뭘 그래요. 그날 난 한국과 잉글랜드 평가전 3번 봤어요. 채널 돌려가면서 재방송 봤는데….

조〓그렇죠? 축구는 어떨 때는 떨려서 못 볼 정도예요. 빅 이벤트의 경우 결과가 나온 다음에 재방송을 보는 경우도 있죠.

혼다〓생방송을 보다 보면 어떻게 될 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그 마음 이해합니다. 안정환 선수가 토킥으로 스코틀랜드전에서 네 번째 골 넣었을 때 전 그냥 그 자리에서 굳어졌잖아요. (김승준씨는 혼다씨의 이 얘기에 자지러질 듯이 크게 웃었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혼다씨는 상관없다는 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소름이 쫘악 돋는 것 있죠. 그 골은 지금 생각해도 ‘예술 그 자체’예요. 축구를 좋아하면 잠이 없어져요. 오전 3시까지 보고 6시에 일어나죠.

●축구를 싫어하는 남편

조〓남편과 비교하면 전 당연히 축구광일 수밖에 없어요. 축구랑 드라마가 같은 시간대에 방송되면 남편은 죽어라 드라마나 사극을 보겠다고 우겨요. 특히 사극의 경우는 제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어요. 결국 사극의 경우는 남편에게 양보하고 축구경기는 재방송을 봐요. 남편은 축구에 전혀 관심이 없거든요.

혼다〓사실은 관심이 있을 거예요. 무관심이 곧 관심이라고 생각해요.

김〓그건 아닌 것 같아요. 운동을 별로 안 좋아하기 때문에 축구에 흥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사실 축구 열기에 대해 화나는 점이 있어요. 무엇보다도 사람을 맹목적으로 만드는 것 같아요. 축구를 보면서 오로지 한국이 16강에 들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잖아요. 한일 월드컵은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인 이질감이나 역사적인 문제를 잘 극복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런 노력은 없고 오로지 16강뿐이에요. 상품 하나를 만들어도 다른 부가가치가 많은데 최근 월드컵이나 축구 열기를 보다 보면 그런 게 전혀 없어요.

조〓그래도 제 남편은 심해요. 축구선수 중에 얼마 전까지 아는 사람이 홍명보밖에 없었어요. 믿어지나요?

김〓사실 월드컵 분위기에 축구를 모르면 ‘왕따’를 당할 것 같아서 요 며칠 축구선수 이름을 외우고 있는데 아직 4명밖에 못 외웠어요. 제가 하는 일은 이벤트기획이라서 혼자 시간이 나면 조용히 보내고 싶은 반면 아내는 피아니스트라서 축구장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혼다〓한국 남자로서 축구를 안 좋아한다니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어릴 때부터 족구 같은 것을 하면서 축구는 자연스레 좋아하게 되는데…. 족구는 안 하나요?

조〓제 남편은 족구도 안 해요. 직장에서 축구대회를 하는데 남편이 뛰질 않으니까 잘 가지 않죠. 축구대회 때 뭐 하느냐고 물어보면 주전자 들고 심부름 다닌대요. 축구장에 가보고 싶은데 아직 한번도 못 갔어요. 축구 때문에 가볍게 신경전도 벌여요. 전 축구경기를 좀 진득하게 보고 싶은데 시청할 때마다 남편이 리모컨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바꾸는 거예요. 가만 좀 놔두라고 하지만 말을 안 들어요.

김〓축구를 보면 전혀 눈에 안 들어오니까 그냥 리모컨을 갖고 노는 거죠. 축구 시즌이 되면 온통 축구 얘기뿐이에요. 안정환 선수가 ‘아줌마 파마’한 모습이 신문에 나오면 안 선수가 언제 파마를 했고 왜 했는지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아는 거예요.

박〓안정환 선수는 축구를 싫어하는 아줌마들도 좋아하죠. 그런데 저의 남편만큼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축구는 나의 삶

혼다〓새벽에 집에서 혼자 축구공을 갖고 놀죠. 그날 중계한 축구 경기 장면을 떠올리며 소파를 축구 골대로 생각하고 혼자서 멋진 장면을 재연하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고 축구는 공만 있으면 할 수 있잖아요. 휴일이면 일곱 살짜리 아들 친구들을 불러서 내가 주장 맡고 축구경기를 하죠. 20년만 젊었어도 축구선수가 됐을 거예요. 이천수 선수 같은…. (혼다씨는 월드컵조직위 배지와 한일 월드컵 로고가 새겨진 시계, 축구공 무늬의 넥타이를 하고 이날 방담장소에 나타났다. 손에는 그가 일본어 강사를 하면서 직접 펴낸 ‘일본어를 알면 축구가 두 배로 재미있다’는 책까지 들었다.)

박〓결혼 전에는 축구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결혼 후 남편을 따라 다니면서 축구에 관심을 갖게 됐죠. 프로축구 경기장에는 그냥 ‘나들이다’고 생각하고 따라다녔고요. 처음에는 드라마를 보고 싶은데 축구 본다고 신경전도 벌였어요. 하지만 워낙 축구를 좋아하는 것을 아니까 내가 양보하고 드라마는 재방송을 봐요.

혼다〓일본어 수업을 시작할 때도 항상 축구 얘기로 시작을 하죠. 사실 비밀인데 중요한 경기가 있으면 수업을 딴 선생님에게 맡기고 가기도 해요.

박〓남편이 일본인이고 제가 한국인이라 한일전 때 서로 응원하면서 안 싸우느냐고 우스개로 물어들 보는데 싸울 일이 없어요. 신기하게도 남편이 한국을 응원하더군요.(이날 사진촬영을 위해 한일 축구선수 유니폼을 입어야 했는데 혼다씨는 한사코 한국 선수복을 입겠다고 조를 정도였다.)

혼다〓모르겠어요. 한국 선수단에 정이 가네요. 사실 한국에서 일본을 응원했다가는 봉변당하기 십상이라서 그런지도 몰라요. 하지만 일본이 이겼다고 하면 화장실에 가서 문 걸어 잠그고 혼자 웃고 속으로 만세 부르고 그래요. 아무래도 조국은 속일 수 없나봐요.

김〓이번에 아내를 데리고 30일 상암동 월드컵 공원에서 열리는 월드컵 전야제에 같이 가기로 했어요. 아내가 12월에 유학 가는데 그 전에 소원 좀 들어주려고요.

혼다〓어! 우리도 가는데. 제 일본어 강의를 들은 제자 중에 정몽준 한국월드컵조직위 공동위원장의 보좌관이 있어서 입장권을 얻었어요. 잘 됐네요. 거기서 우리 한번 만나죠. 김승준씨도 이 기회에 축구에 한번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김승준씨가 좋아하는 사극 드라마에는 각본이 있지만 축구는 각본이 없는 드라마입니다.

조〓하하.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저도 혼다씨 넥타이처럼 축구공 그려진 스카프 하나 사야겠어요.

김〓(기자를 간절히 바라보며) 저, 부탁이 하나 있는데 이 기사 그대로 나가면 회사에서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것 같아요. 축구 싫어한다는 얘기를 제발 강조해서 쓰지 말아주세요. 한국 사회에서 남자가 그러면 매장당하잖아요.

▼방담 참석자

김승준 : 34세. 삼성에버랜드 이벤트팀 대리. 뉴질랜드 오클랜드대학원에서 예술경영학으로 경영학석사(MBA)를 받고 에버랜드의 각종 이벤트를 기획 중. 축구문외한.

조가희 : 28세. 피아니스트. 김승준씨와 2000년 결혼. 1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뮤직컨서버토리 석사과정에 입학하기 위해 출국하기 전, 남편 김씨와 축구장에 한번 가보는 것이 소망이다. 축구광.

혼다 도모쿠니 : 40세. 한국에서 10년째 일본어 강사로 활동 중. 배화여대 일어통역과 겸임교수이며 교육방송(EBS)의 일본어강좌 강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축구는 나의 꿈’이라고 말하는 축구광.

박귀옥 : 39세. 혼다씨와 1991년 결혼, 슬하에 1남 1녀. 결혼 전에는 축구에 관심 전무. 그러나 남편의 어깨 너머로 배운 축구 상식이 이제는 프로축구 경기일정을 머릿속에 꿰고 있을 정도로 발전했다.

박현진기자 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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