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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4월 11일 10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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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대면하면서 원없이 철학적 사색을 하는 것, 그 속에서 행방이 묘연해졌던 자신을 만나는 것. 철학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품어볼만한 꿈이다.
이런 꿈을 넉넉히 실현하며 사는 엄정식 교수(서강대 철학과)가 철학 일기 <당진일기>를 펴냈다(도서출판 하늘재). 아버지의 고향 당진행 버스에 무작정 몸을 싣고 찾아든 곳에 마련한 흙집에서 써내려간 3년 동안의 일기를 엮은 것이다.
'겨울 산촌에서' '한 줄기의 연기처럼' '한 줌의 재가 될 때까지' '내가 나에게' 등 17개의 장엔 '영원의 관점에서' '행복한 사람' '아버지의 지혜' '나는 지금 어디쯤 서 있는가' 같은 부제가 붙어 있다.
표지와 책 곳곳에 산골 마을의 자연을 담은 사진과 그 속에 담겨 있는 저자의 미소가 정겨운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철학함’과 산골의 관계를 고백한다.

"한마디로 나는 나 자신에 관심이 있어서 이곳에 온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려 있으면 곧잘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들 속에 흡수되어 나는 아무데도 없게 되어버린다. 나는 내가 없는 삶을 견디어낼 도리가 없다.그리하여 나는 나 자신의 행방이 묘연해지면 느닷없이 정신을 가다듬고 이곳에 달려오는 것이다. 이곳에 오면 비로소 나는 산골 마을과 아늑한 자연의 품속에 안기는 나 자신을 만난다."
방치돼 있는 배추를 보고 투덜거리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시골 아저씨지만 그는 자연의 섭리에서 얻은 작은 지혜와 좌절도 녹록치 않게 전해준다.
흙먼지와 땀으로 뒤범벅된 몸으로 노동의 황홀감을 맞보는 저자는 마구 뒹구는 낙엽 한 잎의 존재 이유도 철학으로 풀어낼 방도가 없음을 아쉬워한다.
자연과 인간을 엮어낸 그의 철학적 단상은 복잡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이 귀담아들을만하다.
"성숙한 관계는 너무 맹목적이거나 이해 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관계이다. 그것은 조급하지 않고 근시안적이지 않으며 무관심에 가까울 정도로 담담한 관계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을 생활의 도구로 비하하거나 신앙의 대상으로 우상화해서는 안된다. 자연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320쪽, 9500원.
민진기<동아닷컴 기자>jinki200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