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학회' 10일 창립총회 …소장 서양학자들 주축

  • 입력 2000년 3월 7일 20시 06분


복고풍 TV드라마에 소품으로 등장하는 낡은 영화 포스터가 당대 사람의 가치관을 증언하는 사료일 수는 없을까. ‘금서목록’은 또 어떤가. 한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대항 이데올로기가 어느 지점에서 맞부딪쳤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영화와 신문광고, 이념서적과 포르노그라피, 포주와 창녀 등 ‘공식적인 사료’로 인정되지 않는 ‘미세한 것’, 역사서술에 발언권을 갖지 못했던 ‘사회적 약자’들의 일상사를 통해 역사를 재구성하려는 연구모임이 출범한다. 10일 오후5시 서울 종로구 사간동 출판문화회관에서 창립총회를 갖는 ‘문화사학회’. 육영수(중앙대) 임지현(한양대) 조한욱 주명철(한국교원대) 교수등 서양사 전공의 소장 학자들이 창립동인.

문화사학회가 대상으로 삼는 ‘문화’는 문화재 등 기존의 제도적 틀로 규정되는 문화만이 아니다. 임지현 교수는 “삶을 재생산하는 방식에 총체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인류학적 의미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문화사학회가 태동한 것은 1997년. 1980년대를 풍미한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로 역사학계에서도 지배자 중심의 정치사 등을 극복하고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써보자는 인식론적 전환이 있었지만 90년대에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이 강해졌다. 일례로 한국의 근대화도 자본주의라는 거대구조가 어떻게 정착됐는가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이 어떻게 변했는가로 설명해야 그 실체에 근접할 수 있다는 자각이 형성된 것.

서구에서도 68년 프랑스 학생운동을 분수령으로 거대담론에서 미시사(微視史) ,일상생활사로 나아가는 연구가 활발해졌다. 역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산업혁명의 구조가 아니라 “가난한 양말 직공, 시대에 뒤진 베틀노동자를 후대의 거대한 오만(역사이론)에서 구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영국의 E P 톰슨, 프랑스 혁명을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재해석해 ‘포르노그라피의 발명’등을 펴낸 미국의 린 헌트등이 대표적 학자.

문화사학회는 창립의 구체적 산물로 반년간지 ‘역사와 문화’(푸른숲·사진)를 내놓았다. 창간호에는 문화사학회의 방향성을 드러내는 논문 4편이 담긴 특집 ‘역사연구의 새로운 물결, 신문화사’등이 수록됐다. 2호에서는 영화를 통해 역사읽기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보여줄 계획이다.

<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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