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옛 애인의 결혼식]「사귀다 헤어지면 원수」는 옛말

  • 입력 1998년 2월 1일 20시 12분


"하긴 ‘케세라세라’ 신날 순 없죠. 그래도 마음을 비우니까 축하하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정말 친구처럼, 희한하게.” 94년 4월의 이모씨(당시 28세·주부). 동갑내기 이모씨(모은행 대리)의 결혼식장에서 축가를 불렀다. 남자 이씨는 여자 이씨의 다름아닌 첫사랑. 대학1학년 때 S통기타서클에서 만나 4년간 열애, 파경 그리고 3년만이다. “‘평생 의지하며 살 만한 사람은 아니다’는 확신이 서 헤어졌죠. 동성동본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친구’로선 놓치고 싶지 않더군요. 재력있고 믿을 만하고 말이에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남편에게도 소개했어요. 흔쾌한 반응이었고요. 하지만 내가 그 사람을 만나는 건 남편의 ‘양해사항’이 아니에요. 당연한 권리입니다.” 수십년전. 시인 소월은 진달래 꽃잎을 한잎 한잎 살점처럼 떨궈내며 ‘애이불비(哀而不悲·속으론 슬프지만 겉으로 나타내지 않음)’를 아로새겼지만…. 어느덧 세상은 변해 ‘불애불비’의 시대? 연세대 유석춘교수(사회학). “예전 같으면 마음 아파 눈물만 흘리고 평생 가슴 속 이성(異性)으로 남겼겠죠. 세상은 바뀌었습니다. 워낙 많은 모임과 인간관계가 존재하고 여성의 사회참여도 늘었고요. ‘과거 때문에 누구와 마주치면 껄끄러워 동창회에 안나간다’는 사고는 구식입니다. ‘연애감정’을 접고 ‘인간관계’로 만남을 이어가는 서양적 사고를 갖게 된 거죠.” 다음은 신모씨(30·중소기업 대리)의 경우. “처음엔 어색하더라고요, 결혼식장이. 저 여잔 분명 ‘내것’이었는데. ‘그래 잘 사나 보자’ 울화통도 나고….” 2년2개월간 한모씨(28·여·당시 회사원)와 연애. 그러나 학벌을 문제삼는 여자 부모의 반대로 이별. 4개월만인 지난해 11월 한씨의 결혼식을 봤다. 한씨가 보낸 청첩장을 호주머니에 넣고.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 “형님, 아무리 형님 것(?)이지만 신부와 마지막으로 춤 한번 춰도 되죠?” 신랑신부의 친구를 위한 그날 밤 피로연에서 신씨는 한씨의 부군이 갓된 김모씨(32·공무원)에게 이렇게 물었다. 신랑의 대답은 ‘정말 라스트 블루스라면 허가’. “여자와 남자는 사귀다 잘못되면 왜 ‘철천지 원수’가 돼야 하죠? 애써 만나놓고. ‘내 품’ 떠나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 형님(신랑)과도 좋은 형님―아우로 지낼 겁니다.” 정신과 전문의 김정일박사. “요즘 젊은 부부들은 스스럼없이 서로에게 이성친구 얘기를 합니다. 부모로부터 ‘희생’보다는 ‘개인의 행복’이중요하다고교육받은 세대죠. 앞으로 부부가 서로의 인간관계나 만족을 존중하지 않으면 가정이란 울타리가 송두리째 위협받는 시대가 올지도 모릅니다.” 이번엔 김모씨(30·고시준비생). 지난 1년간 최모씨(29·여·회사원)와 교제했다. 그러나 김씨가 반년 전부터 최씨의 자취방 룸메이트인 황모씨(28·여·학원생)를 ‘너무 여자답다’는 이유로 더 좋아하게 되자 “복잡한 건 질색이에요. 그래서 그녀(최씨)에게 나와 끝낼건지, 아니면 내가 그녀(황씨)와 사귀더라도 셋이서 친구로 지낼건지 결정하라고 했죠. 자책감 같은 건 없다고 말했어요, 두 사람한테.” ‘What a wonderful world!’(살맛나) “두달 뒤 우리 결혼식에서 그녀(최씨)는 신부 부케를 받기로 했어요. 애인, 그 ‘속박’에서만 벗어나면 좋은 ‘친구감’이 얼마나 많은데. 울고 짜는 건 어른의 모습이 아니죠. 암, 아니에요.” 〈이승재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