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소감]김수림/「광대」로 남고싶다

  • 입력 1998년 1월 13일 20시 04분


나는 백지에 대한 공포가 심한 편이다. 손끝에서 일어나는 문자 행위는 그래서, 늘 머뭇거림이어야 했고 너무 이른 피로감을 견디는 일이어야 했다. 백지는 너무 허허롭다. 단색의 지면이나 모니터를 생각할 때면 백야(白夜)가 계속되는 설원의 풍경이 내 정신을 지배하곤 한다. 그 백야의 설경(雪景)은 가도가도 변함이 없다. 목적지도 없고, 소실점도 없고, 자취도 없다. 고백하건대 나는 단 한번도 글머리에서 결론부의 마침표까지 시원스레 질주해본 경험이 없다. 한 문단에 몇 개씩의 오타가 발견되는 그런 거침없는 글쓰기를 나는 앞으로도 실행해 보지 못할 것이다. 올 가을의 일이었다. 광대로 돌변한 네 명의 요리사가 주방기구로 리듬과 음색을 요리하는 어느 공연장 출구를 나서면서, ‘탱고 리듬으로 자판을 두드리는 문필가’에 대해 열심히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내가 탐내는 문필가의 이미지는 그러므로 설경을 헤치고 가는 영웅적인 구도자가 아니라 차라리 광대에 가까운 것이었다. 백지에 대한 공포 앞에서 광대가 펼치는 유희를, 엉뚱하게도, 나는 희망하고 있다. 이 자리를 빌려 무엇보다 아버지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무관심한 듯하면서도 어깨 너머로 아들의 서투른 작업을 들여다보며 보여주신 신뢰는 얼마나 큰 힘인지 때가 익으면 보여드리고 싶다. 내 게으름을 한번도 탓하지 않고 여름 내내 공부를 이끌어주었던 호덕이 형, 나에게는 형에게 따로 표해야 할 고마움이 있다. 그리고 이상한 동지애로 연결된 연재 누나, 자기일처럼 기뻐해준 고명철 형, 철없이 좋아하는 아우와 후배들, 미흡한 가능성을 사주신 심사위원님들, 또 지난 여름 내내 나에게 열병을 선물했던 사람에게, 그 밖에 호명하지 못했으나 이 볼품없는 문자 행위를 하나의 구애(求愛)로 만들어 주었고 또 그렇게 해 줄 모든 이들에게 감사드린다. <김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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