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일본 학계에서 제기된 동양학 혹은 오리엔탈리즘은 식민정책학의 음습한 그늘에서 자라났다. 서구의 물리적 압력에 굴복한 치욕감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 일본은 다른 아시아 국가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폭력으로 지배하는 식민정책이 결정됐고 학계는 그 앞잡이로 동원됐다. 서구에서 제기된 오리엔탈리즘의 원형이 「서구 대 비서구」의 도식이었다면 일본은 이를 「일본 대 기타 아시아 국가」란 방식으로 변형했다.
당시 일본 학계의 환경은 제국주의적 맹목에 사로잡힌 상태였다. 일본이란 나라는 인접 아시아 국가와는 너무나 다른, 인종과 언어 문화 모든 면에서 전적으로 다른 세계사의 유일한 나라라는 망상 속에 있었다.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은 그들이 무한폭력을 동반한 가해자로 돌변하는 사상적 싹이 되었다. 서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오리엔탈리즘도 타자(他者)에 대한 우월주의와 함께 대두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흐름은 일본에 동양학 혹은 동양사학이란 이름으로 「일제(日製)오리엔탈리즘」이 등장한 역사적 배경을 보면 쉽게 이해된다.
일본 도쿄 가쿠슈인대에 동양사학과가만들어진것이 1890년.당시학장은 적극적인 대륙침략주의자로 후일 주한공사로 있을 때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꾸몄던 미우라 고로오(三浦梧櫻)였다. 이어서 도쿄제대 법과대학내에 「식민정책학」 강좌가 생긴 것은 대한제국을 삼키기 한 해 전인 1909년. 일본의 식민학은 다른 나라 취급을 받던 홋카이도(北海道)를 「내국(內國) 식민지」로 개척한데 힘을 얻고 이어 러일(露日) 청일(淸日)전쟁으로 식민지를 확장하면서 과학이란 형태로 엮어진 것이다. 일본 도쿄대 사회정보연구소 강상중(姜尙中·47)교수는 저서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이산)에서 이같은 과정을 『식민지 제국(帝國)의 지리적 폭력이 지적 지배와 헤게모니란 필터를 통해 여과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분석한다. 『2차대전후 미국이 일본 대신 「동양의 지역질서」를 유지하게 되었고 일본은 미국의 비호아래 아시아 지역에서 압도적인 경제력을 회복하였다. 이는 형태만 달라진 것일 뿐 아직도 「동양사학」의 올가미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조헌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