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세상을 떠난 朴在森(박재삼)시인은 金素月(김소월)로부터 발원돼 未堂 徐廷柱(미당 서정주)로 승계된 한국 전통 서정시 계보의 빛나는 「노래꾼」이었다. 모더니즘 민중주의 등이 시대유행처럼 번질 때도 박시인은 어떤 계파에도 몸을 두지 않은 채 고향 삼천포바다의 비린냄새가 묻어나는 서정, 비극으로 끝나는 사랑,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등을 노래하며 외길을 걸었다.
박시인의 평생을 압축하는 단어는 「시」와 「가난」이다. 유년시절에는 날품팔이 어부의 아들로서 돈이 없어 중학교진학도 못하는 절대궁핍을 경험했고 시인으로 명성을 얻은 후에는 잠깐동안 잡지 일간신문기자로 재직했던 것을 빼고는 줄곧 시에 매달려왔다. 생계는 일간지에 바둑관전기(필명 樂石子·낙석자)를 집필한 수입으로 꾸렸다.
뱃속부터 체험한 가난과 설움은 그의 작품 속에 「슬픔의 서정」으로 승화됐다. 때로 그의 시들은 『퇴영적인 한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절창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 등에서 드러나듯 「생활과 직결된 눈물을 재료로 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평생을 벗삼아온 술 때문에 30대부터 고혈압 등으로 시달려온 박시인은 최근 2년간 신부전증의 악화로 입퇴원을 거듭했다. 그를 아끼는 문인들과 고향 삼천포 친지, 그리고 거주지인 중랑구민들이 십시일반으로 그의 병원비를 모금했고 팔순의 스승 미당도 『오래오래 건강해 우리 시단의 좋은 본때가 되라』고 격려했지만 끝내 그의 하늘길을 막을 수 없었다.
자신의 생활을 염려하는 문우들에게 언제나 『시 쓰는 것을 빼면 달리 재주가 없는 것을 어쩌랴』며 넉넉한 웃음을 짓던 그를 보내며 문단은 『천상병 이후 마지막 자유인이 갔다』고 안타까워한다.
〈정은령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