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주부시인 박라연씨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 입력 1996년 12월 16일 19시 56분


「鄭恩玲기자」 3년만에 세번째 시집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문학과 지성사 간)을 펴낸 박라연씨(45)는 요즘 탈진해 있다. 사력을 다해 풀코스를 완주한 마라토너처럼 온몸의 기(氣)를 시집탈고에 다 쏟아부은 흔적이 완연하다. 『시를 쓰는 게 힘들어서 이제 시는 쓰지 말고 꽃집이나 문방구점을 할까 궁리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만큼 나를 행복하게 하고 또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없어요』 「너에게…」에는 83년 두번째 시집 「생밤 까주는 사람」출간 이후 쓴 시 80여편중 51편을 가려 실었다. 박씨는 90년 만39세의 나이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며 「아줌마시인」 「뒤늦게 꿈을 이룬 신데렐라」로 화제를 모았던 인물. 그러나 뭇 문학지망생들이 선망의 눈초리로 그를 보는 것과는 달리 박씨의 시는 습작시절이나 시집을 세권 펴낸 지금이나 결코 쉽게 쓰여지는 것들이 아니다. 「…아주 오래된 빈집이 있고/날카로운 슬픔의 주인이 있고/희미한 전생의 그림자가 있지만/이 모든 것 제 갈길 가기 시작하면/나는……야 거북이처럼 느리게 골방으로 가서/습작시절의 초롱초롱한 눈망울로/삼라만상 무한천공을 엿보리라/눈이 짓물도록 귀가 멍멍해지도록 머물다가/내 주인이 쓰윽, 목을 베면/한 세상 다시 피어 볼 붉히는 장미/장미 한송이가 되리라」(「가을편지」중) 「가장 눈부실 때에/쓰윽 목이 베이는 장미」같은 시를 얻고 싶다는 열망때문에 매번 혹독한 창작고를 치르지만 박씨는 『나는 아직도 데뷔 전후에 쓴 시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쓸쓸하다』고 자조한다. 「너에게…」에 수록된 시들 속에서는 「눈물」이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 눈물은 결코 비탄이나 절망으로 흐르지 않는다. 차창밖의 비오는 풍경을 보며 노래한 것처럼 박씨는 「우리가 흘린 눈물/우리가 털어낸 고통의 비늘들 발밑으로 가서/어느 순간 거름되어 우리 몸속에 스며들거야」(「어느 비오는 날의 풍경」중)라는 희망으로 주변의 사람과 사물까지 따뜻하게 감싸안는다. 『엿새가 불행해도 하루만 행복하면 살 수 있는 게 인생이라는 믿음이 날이 갈수록 굳건해집니다. 제 시가 다른 사람을 하루라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안식처같은 것이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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