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황호택]병역의혹 ´진실게임´

  • 입력 2002년 8월 12일 18시 06분


5년 전 이맘때 정치권은 DJ 비자금 수사 여부를 둘러싸고 일촉즉발의 분위기에서 대치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비자금 수사를 하게 되면 DJ 구속이 불가피했다. 그렇게 되면 호남과 서울에서 폭동이 일어나 대통령 선거를 치르지 못하고 대통령 없는 나라가 될 판이었다’고 술회했다. 김 전 대통령은 보도진의 눈에 띄지 않는 일요일 아침 김태정 검찰총장을 불러 대선 이후로 수사를 유보하라고 지시했고 김 총장은 고검장 회의를 소집해 의견을 수렴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선거철만 되면 고소고발▼

전후사정을 알 수 없었던 한 고검장은 칭병하고 병원에 입원해 회의에 참석하지 않을 생각을 했을 정도로 고민이 컸다고 나중에 털어놓았다. 조선시대에 조정으로 오다가 말이 다리 아래로 떨어져 어전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 바람에 사약을 면했던 한 중신의 고사를 떠올렸다고 한다.

모 고검장은 작심한 듯 수사 착수 지지발언을 했다. “검찰은 소방수와 같다. 불이야 하고 소리를 치는데 왜 소방수가 불을 끄려고 하지 않느냐. 고소고발이 들어오면 수사를 해야 한다. 김대중 후보의 지지도가 높다고 해서 검찰이 강한 자에게 붙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신한국당이 DJ 비자금을 고발할 당시 여론조사 지지도는 김대중 이인제 이회창씨 순으로 이회창씨의 지지율이 추락하고 있었지만 DJ가 야당 후보였으니 어느 쪽을 강자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시점이었다. 또 불을 지른 쪽과 불이야 하고 소리를 지른 쪽이 같은 사건이었다.

김현철씨 수사로 ‘국민검사’ 칭호를 얻은 심재륜 고검장은 중도적 입장을 취했다. “당연히 수사를 해야 한다. 그러나 김현철씨 수사 경험에 비추어 방대한 계좌추적에만 2개월이 걸려 대선 이전에 수사를 끝내기 어렵다. 정치권에 이용돼 대선에 영향을 주는 쇼가 되고 만다”고 말했다.

대통령과 검찰총장의 합작품인 수사유보에 대해서는 어느 쪽을 지지했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심재륜 고검장은 김태정 검찰에서 면직을 당해 김 전 총장에 대해 감정이 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선 이후로 비자금 수사를 유보한 결정은 지금 시점에서 판단해도 잘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김대업씨와 한나라당의 맞고소로 불붙은 이회창 대통령후보 장남의 병역비리 의혹을 둘러싸고 정치권의 공방이 뜨겁다. 민주당은 검찰 수사를 계기로 이 후보 흠집내기에 열을 올리고 한나라당은 방어에 사력을 다하는 양상이다.

이번 사건은 김대업씨와 한나라당이 사실과 다른 주장으로 명예를 훼손했다고 맞고소하면서 비롯됐고 병역비리 혐의 자체는 처벌 시효가 지났다. 과연 녹음 테이프와 관련자들의 진술을 통해 김대업씨의 주장이 입증될지가 수사의 관건이다. 양쪽의 공방만 요란하고 증거 부족으로 진실이 가려지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어떤 결론이 내려지더라도 어느 한쪽 또는 양쪽 모두가 승복하지 않는 사태가 발생해 검찰에 상처만 남길 공산이 크다.

병역비리 의혹과 DJ 비자금 수사는 여러 모로 비슷한 성격을 지녔지만 당사자들의 태도는 판이하다. 비자금 사건에서 DJ와 국민회의는 수사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데 비해 신한국당과 이회창 후보는 당장 수사에 착수하라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검찰을 압박했다.그러나 병역비리 의혹은 민주당과 한나라당 모두 수사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한나라당도 수사를 신속하게 마무리지어 결백을 입증해달라는 판이라 97년처럼 수사를 유보하기도 어렵게 됐다.

병역비리 의혹 사건의 수사라인에 선 검사들은 차기 정권의 향배에 따라 신상에 미칠 파장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경우의 수가 다양한 게임에서 이기는 패를 집을 확률은 반반이다. 수사가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공정하고 투명하게 수사를 하는 도리밖에 없다. 엄정한 수사만이 어떠한 경우의 수에서도 검찰이 이기는 선택이다.

▼수사 투명하고 공정하게▼

신한국당이 DJ 비자금 사건을 고발했던 날짜는 대선을 불과 두달 남겨놓은 97년 10월 16일이었다. 병역비리 의혹 사건이 마무리되더라도 10월경 대선 출마 후보군이 확정되면 앞서나가는 대선후보를 겨냥한 고소고발 사건이 또 터져 나올 가능성이 없지 않다. 긴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대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선 후보 관련 고소고발 사건은 대선 이후로 유보하는 것을 검토해볼 만하다.

정치권은 툭하면 ‘정치검찰’이라고 욕하면서 선거철만 돌아오면 검찰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고 든다. 대통령 선거철만 되면 터져 나오는 정치권의 고소고발에 검찰이 끌려 다니는 것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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