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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1월 23일 18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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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에서의 계량분석은 통념을 반박하는 신선한 결론을 도출하지 않는 한 주목을 끌기 어렵다. 계량분석의 결과가 정치현상에 대한 상식적인 이해를 뒤집는 결과를 내는 경우도 거의 없다. 따라서 선거와 여론조사결과를 주요 데이터로 하는 정치통계학이 학문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참신한 문제의식과 적절한 대안이 가미돼야 한다.
그런데 “일본의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도발적인 선언으로 시작해서 민주주의 기본원리인 선거공약의 이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를 일본민주주의의 제도적 결함에서 찾고 있는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비싸고 복잡한 지적 기계적 프로세스에 들인 노력이 충분한 성과를 거둔 가치 있는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어느 국가가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선거과정과 정치제도의 몇 가지 변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념적 문화적 문제다. 또한 민주주의의 철학적 사상적인 화려한 색채를 수량으로 표현할 수도 없고, 상호작용의 빈도로 의식의 농도를 대치할 수도 없다. 그러나 저자는 일본민주주의의 기능부전(不全)을 타개할 대안까지 제시함으로써 단조로운 수의 마술에만 머물지 않고 있다.
저자는 마치 검사결과의 수치를 가지고 환자를 치료하는 양의(洋醫)처럼 선거공약의 이행부진을 척도로 전후 일본정치를 분석하고, 1993년의 정치적 지각변동에도 불구하고 ‘55년 체제’가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정치가나 유권자가 아니라 일본의 민주주의제도 그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이런 진단결과를 바탕으로 치료, 즉 제도개선을 위한 처방(수상 국민추천제나 주민투표의 도입 등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현대의 간접민주주의, 일본의 의원내각제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한 저자의 제도적 절차적 대안은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및 그 개선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귀기울여야 할 부분이다.
“늑대밖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잘 기능하는 제도를 고안해 낸다면 양이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더욱 잘 기능할 것”이라는 저자의 낙관주의에는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모두가 늑대인 세계에서도 잘 작동되는 제도를 고안, 제언하는 것이 정치학의 역할”이라는 소명의식과 “계량분석은 결말이 나지 않는 토론에서 강하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판단근거”라는 프로페셔널리즘에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려운 수리모델이나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는 지루한 내레이터가 될 수도 있는 이 책이 일본정치연구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또 다른 강점 가운데 하나는 일본정치연구사의 정리 소개에 있다. 그런데 참고문헌목록에 연구사 소개를 뒷받침하는 일본서 목록이 빠짐으로써 저자의 지적 노력은 물론 “선행연구가 소개되어 연구자들에게 자세한 지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역자들의 보람과 자부심이 훼손되고 있다는 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원제 ‘現代日本の政治過程’.
이 웅 현(고려대 연구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