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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8년 12월 17일 19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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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번 더 전화벨이 울렸다. 조국이 받았다. 매번 같은 말이었다. 글세, 지금 저를 잡아넣으면 돈이 나옵니까. 이번 브라질 건이 억짜리예요. 계약만 되면 그것부터 해결한다니까요, 하는 식이었다.
“대체 너희 사장은 뭐하느라고 빚이 그렇게 많냐?”
“엮는 게 능력 아니냐. 아마존 간다고 사업을 몇 개 엮어 갔는지 나도 몰라. 거기 알로에 농장 지나가다가 광고 사진 찍어오겠다고 알로에 화장품 회사에서 협찬금 받아갔고 또 ‘잉카 문물전’ 건도 있고…….”
“잉카 문물전?”
“페루 지나가는 길에 박물관 들러서 섭외를 하겠다고 하더라구.”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다 싶으면 사장은 망설임 없이 갈퀴손을 쳐들었다. 한번은 다단계 판매로 말썽을 빚은 적 있는 전자요 회사를 찾아가기도 했다. 회사 이미지를 바꾸는 의미에서 소수민족을 돕는 캠페인을 벌이라며, 자신이 남미에 가서 전자요를 선물받고 기뻐하는 원주민의 모습을 필름에 담아오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쌍마자동차 때와 같은 신화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알래스카에서 냉장고 판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아마존에서 전자요 쓴다는 말은 처음 들어본 그 회사 사장은, 아무리 기자를 들먹여도 사람을 함부로 들여보내지 말라고 비서실에 단단히 일렀다.
“아까는 무슨 인쇄소에서 독촉온 것 같던데?”
“응, 그거? 방송국 간부 구워삶으려고 ‘도서출판 청석골’에서 수필집 하나 내주기로 했거든. 짜식들, 5백 부 찍은 게 몇 푼이나 된다고 전화질이야, 천만 원 넘는 빚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나저나 브라질 가는 데 비행기는 몇 시간이나 타냐?”
“두환이한테 상파울루로 마중나오라고 하면 놀라 자빠질 텐데, 아직 연락 없지?”
조국과 승주는 자연스럽게 브라질 얘기로 돌아갔다.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을수록 나는 한심한 기분에 빠졌다. ‘스튜디오 파인더’부터 ‘평산 인터테인먼트’까지 네 개나 되는 이름을 내걸고 있었지만 이 회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국이 사장과 같은 방식으로 협찬이나 후원을 따내기는 애초에 글러먹은 일이었다. 기획서조차 쓸 줄 모르는 그가 연예인 섭외는 어떻게 하며 여권과 같은 국제적 서류는 또 어떻게 다루겠는가. 게다가 경비도 한푼 없었다.
나는 신나게 떠들어대는 조국과 승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든 일을 부분만 보고 또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놈들은 대체로 행복하다. 그 행복의 이면을 예측할 수 있는 나같은 사람에게만 피곤이 주어질 뿐이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서 생각을 멈췄다. 알게 뭐냐. 끼어들지 않으면 그만이다. 내일은 오랜만에 김부식에게 전화를 한번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잔에 남은 배갈을 삼켰다. 직장을 알아봐야 하겠지만 여기저기 찾아가 기웃거리는 것도 그렇고 집에 앉아 운총의 질긴 눈총을 견디는 것 또한 마땅치 않았다.
<글: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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