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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8년 11월 8일 19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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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은 자신을 가리켜 ‘발로 뛰는 타입’이라고 말하곤 했다. 다른 사람들은 발 아닌 무엇으로 뛰는지 어쨌든 다른 사람보다는 늘 소식이 빨랐다. 얼마 전 그는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다. 체신부 주최로 열리는 외국우표 수집 경연대회 소식이었다. 물론 우리 펜팔부가 가진 우표로는 참가하는 것조차 창피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대대적인 우표 수색작전이 벌어졌다.
승주의 뒷집과 옆집, 아랫집, 그리고 소희네 펜팔부 등의 여학생 팬들이 가장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사르트르의 책을 끼고 다니던 여학생이 특히 많은 우표를 갖고 있었다.
주는 사르트르를 위한 추모곡을 작곡해주기로 약속하고 우표를 몽땅 빌려왔다며 “근데 사르트르가 죽기는 죽었냐?”라고 물어왔다.
우표들은 조국의 이름으로 출품되었다. 조국의 이름으로 한 일이라서 그랬는지 그는 고등부 3등상을 차지했다.
월요일의 애국조회 시간이 돌아왔다. 조국은 단상에 올라가 상장을 받았다. 그는 일부러 교장 선생의 앞에 놓인 마이크에 바짝 다가가더니 시키지도 않은 소감을 큰 소리로 밝혔다. 감사합니다. 이 영광을 펜팔 전시회에 되살려 세계 만방에 조국의 명예를 드높이겠습니다.
그 후 조국은 스스로 교장실에 찾아가 담판을 지었다고 하는데 신빙성이 없다. 외부대회에 나가 상을 받아왔으니 어차피 펜팔부 전시회를 취소시키기는 어렵게 되어 있었다. 최대의 걸림돌인 물리선생도 이번에는 조용했다.
우리가 볼 때 너무나 당연한 ‘악인의 최후’였지만 물리선생은 노총각이었다. 예쁜 현주 누나에게 관심이 많으리라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정학이 풀린 뒤 따르는 의례적인 가정방문 때에 유독 승주의 집에만 담임선생을 동행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승주의 사전공작으로 그 날도 부모님은 안 계시고 현주 누나만 집을 지키고 있었다. 현주 누나가 내온 커피에 설탕을 넣는 물리선생의 손은 마치 영하 28도에 런닝만 입고 바닷가로 나온 사람처럼 심하게 떨렸다. 숟가락은 왼쪽으로 평행이동하는데 설탕은 오른쪽으로 흔들리고, 그 설탕을 잡기 위해 숟가락이 따라가면 설탕이 다시 왼쪽으로 몰려가는 식으로 허공에서 따로 놀았다. 그런데도 고개를 푹 숙이고 한사코 그 일만 꾸역꾸역 되풀이하며 앉아 있다보니 물리선생의 잔받침 위에는 흰 설탕가루가 수북했다.
감정이 그쯤 기울다보면 선생이고 학생이고 생각하는 것은 비슷했다. 생명 다음으로 소중히 여긴다던 체면도 다 소용없었다. 승주를 불러 편지를 전해줄 수 있냐고 묻는 물리선생은 이미 티(T)자라는 불법무기를 소지한 위험인물이 아니었다. 편지가 현주 누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질 거라고 믿다니 어떻게 해서 갑자기 그렇게 되었는지 몰라도 순진하기조차 했다. 그 편지들은 펜팔부의 사물함 안에 차곡차곡 쌓였다. 물론 개봉이 되고 내가 군데군데 빨간펜으로 맞춤법 교정을 본 채로. 조국의 말에 따르면 그 편지들은 전시회 때 가장 좋은 위치를 차지하는 특별우대를 받을 것이라 했다.
<글: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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