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2)

  • 입력 1998년 5월 2일 08시 38분


“뭐 더 물어볼라고 해도 어차피 내가 끝까지 책임도 못질건데… 물어봐선 뭐하나 싶어서. 아니다. 내가 괜히 심란해서… 너한테까지 이런 말 할 건 없는데…. 그런데 왜 그런지, 일이 손에 안 잡히는구나…. 남자 따라갔다고 하지만 걔가 사실 인물이 곱니 몸이 이쁘니? 일만 억척스레 잘하니까 누가 꼬셔서 데려다가 부려먹겠지. 지난 번에 그 목수놈인가 뭐하고 현장에서 일만 해주다가 애만 둘을 더 달고 돈 한푼없이 쫓겨오지 않았겠니. 사람 산다는 게 뭔지. 어릴 때 팔자 사납더니 끝내 좋은 꼴 한번 못보고…. 글쎄 아니다. 넌 신경 쓸 거 없다… 책은 잘 팔리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무는 어머니의 말 속에 맴도는 못다한 말을 나는 알고 있었다.

니가 글을 쓰는데, 그런 심란한 얘기는 뭐할라고 하니… 지 팔자지…. 걔가 어떻게 살든, 남은 아이들이 어떻게 살든 사실 우리하고 이제사 무슨 상관이겠니. 핏줄도 아닌데… 니 일이나 해라, 니 일이나… 뭐, 그런 말이 될 터였다.

내쪽의 심란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어머니는 갈팡질팡 이야기를 마치고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막 끊기려고 했을 때 나는 생각난 말이 있는 듯 짧게 어머니를 불렀다.

하지만 이미 전화는 끊어져 있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덧붙이려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아니 엄마 쉰이 다 된 그 나이에 정말이란 말이에요, 애들 넷을 놔두고, 같은 말이었을까… 아니다. 그건 아니다…. 나는 안다, 봉순이 언니는 그럴 수 있었다. 쉰을 넘어 예순으로 치달리는 나이라도 그럴 수 있으니까 봉순이 언니였다.

처음엔 의붓아버지에게서 도망쳤고, 교회집사네 집에서 도망쳤으며, 세탁소 총각과 눈이 맞아 도망쳤고, 그 다음엔 떠돌이 목수와 그리고 이번엔 개장수….

전화기를 다시 들까말까 망설이다가 이상한 무기력감에 사로잡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를 사로잡았던 무력감이란 것은 예감이었다. 나는 가끔 어떤 알 수 없는 예감 때문에 자주 진저리를 치곤 했다.

몇년이나 소식을 끊고 살던 대학선배가 난데없이 꿈에 보이는 다음 날이면 그 선배가 음독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고, 멀리 미국으로 시집간 친구가 거니는 꿈을 꾼 어름이면 어김없이 그 친구에게 반가운 전화를 받기도 하고 그랬다.

그런데 봉순이 언니 생각을 이 집에 이사오자마자 했던 것이다. 이삿짐을 정리하고 눈을 뜬 아침, 왜 이렇게 이 동네는 조용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자 갑자기 나는 운명론자가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태어날 때부터 우주의 모든 기운이, 별의 위치와 지구의 자전방향과, 화, 수, 목, 금, 토 다섯가지 성분이 태어나는 한 인간의 연약한 살 틈으로 파고들어 그가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절대로 그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언니가 넷이나 되는 아이들을 버리고 도망을 쳤다한들, 아니다, 그도 아니면 설사 도망을 치다가 죽었다한들, 아니 또 그도 아니면 지금 당장 내가 죽었다한들 슬프거나 회한에 젖거나 하는 것들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일까.

우리의 몫은 그저 닥쳐온 운명 앞에서 황망해하면 되는 것일 터인데. 그저 산다는 게 뭔지,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면 될 뿐이었다. 하지만,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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