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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 전 프로야구 두산 감독이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의 임시 코치직을 맡는다.요미우리 구단은 29일부터 다음 달 13일까지 열리는 팀 가을 캠프에 이 전 감독을 초빙힌다고 22일 발표했다. 2004년 일본 무대에 진출한 이 전 감독은 2006년부터 5년간 요미우리에서 활약했다. 요미우리 이적 첫 해인 2006년에는 4번 타자를 맡아 타율 0.323, 41홈런, 108타점으로 맹활약했다. 이후 요미우리와 4년 30억엔(약 282억 원)짜리 대형 계약을 한 그는 2011년 오릭스를 거쳐 2012년 KBO리그로 복귀했다. 이 전 감독은 한국에서 467홈런, 일본에서 159홈런 등 모두 626개의 홈런을 터뜨렸다. 이번 요미우리행에는 요미우리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아베 신노스케 감독과의 친분이 크게 작용했다. 이 전 감독은 요미우리 역대 70대 4번 타자, 아베 감독은 역대 72대 4번 타자다. 일본 언론들은 요미우리가 이 전 감독을 통해 타선 강화를 노리고 있다고 전했다. 이 전 감독은 2023년부터 두산의 지휘봉을 잡았으나 감독 3년 차인 올해 6월 성적 부진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했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한국 양궁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못 따면 ‘죄인’이 되는 유일한 종목이다. 30년 넘게 세계 최강의 자리를 지키는 덕분에 한국 양궁은 자의든 타의든 금메달이 당연시된다. 무리한 기대 속에서도 양국 양궁은 매 대회 최고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 양궁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사상 첫 전 종목(금메달 4개)을 석권했다. 혼성전이 포함돼 금메달 5개가 된 지난해 파리 올림픽에서 다시 한 번 5개 전 종목을 휩쓸었다. 하지만 금메달이 아니면 실패를 의미하는 한국 양궁을 이끄는 지도자들의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한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남자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오선택 현 프랑스 대표팀 감독(64)이 대표적이다. 당시 임동현, 김법민, 오진혁으로 구성된 남자 대표팀은 역대 최강 전력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만약 한국이 한 개의 메달을 딴다면 남자 대표팀이 될 거라고들 했다. 예선에서도 세계신기록을 3개나 따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남자 단체전에서 미국에 일격을 당하며 동메달에 ‘그쳤다.’ 일주일 후 열리는 남자 개인전까지 오 감독은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오 감독은 “대표팀을 지도하면서 당뇨와 고혈압, 고지혈증이 모두 찾아왔다. 탈모도 생겨 머리를 박박 밀고 모자를 쓴 채 대회를 치렀다”고 했다. 그를 구했던 건 남자 대표팀의 맏형 오진혁이었다. 이전 대회까지 유독 개인전 금메달이 없던 한국 양궁은 오진혁의 사상 첫 개인전 금메달로 체면치레를 했다. 오 감독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을 때가 아닐까 싶다. 대회 후 인터뷰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고 했다. 이에 비해 여자 대표팀 코치로 함께했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은 천국이었다. 김수녕, 윤미진, 김남순으로 이뤄진 여자 대표팀은 거칠 게 없었다. 당연한 듯 여자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뿐 아니라 개인전에서는 세 명의 선수가 금, 은, 동메달을 모두 차지하며 나란히 시상대 위에 섰다. 김수녕이 금, 윤미진이 은, 김남순이 동메달이었고, 4위는 북한의 최옥실이었다. 소속팀 LH 양궁단에서 정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2019년 그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도전을 했다. 2020 도쿄올림픽 총감독직에 지원해 합격한 것이다. 그는 “얼마나 힘들고 부담이 될 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여자팀, 남자팀 지도자로 올림픽 금메달을 이뤘으니 총감독에 마지막 양궁 인생을 걸어보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소망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물거품이 됐다. 전세계를 덮친 코로나19 유행 속에 2020년 도쿄올림픽이 1년 미뤄진 것이다. 여느 종목이라면 대표 선수와 대표팀 코칭스태프를 모두 유임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공정과 원칙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대한양궁협회는 지도자와 선수를 모두 새로 뽑기로 했다. 그렇게 그의 양궁 지도자 인생도 끝나는 것 같았다. 의외의 기회는 프랑스에서 찾아왔다. 2024년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프랑스가 좋은 성적을 내줄 경험 많은 지도자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오 감독은 정년 후에도 자신의 지도력을 펼칠 무대가 필요했다. 양측의 입장이 맞아떨어지면서 오 감독은 2022년 초 프랑스로 향했다.프랑스 양궁은 작년 파리 올림픽에서 두 가지 역사적인 기록을 남겼다. 남자 대표팀은 단체전 은메달을 따며 사상 처음 올림픽 시상대에 올랐고, 리자 바르블랭은 여자 선수 최초로 개인전 메달(동메달)을 수확했다. 한국 양궁이 전 종목(금메달 5개)을 석권한 가운데 프랑스는 종합순위 2위에 오르며 개최국의 체면을 지켰다.오 감독은 근력이 모자란 남자 선수들의 활을 한국 여자 선수들이 쓰는 활로 바꿨다. 바람 방향에 따라 조준을 달리하는 오조준도 가르쳤다. 동시에 한국 양궁의 DNA를 불어넣었다. 오 감독은 올림픽을 앞두고 퐁텐블로에서 양궁장이 설치된 파리 앵발리드까지 74km 거리의 행군을 기획했다. 오전 7시에 출발해 꼬박 24시간이 걸리는 강행군이었다. 오 감독은 “뚜렷한 목표의식을 갖기 위해선 기억에 남는 훈련이 필요하다. 선수들이 앵발리드로 골인하면서 개선하는 느낌을 주도록 했다”고 했다.한국에서 온 양궁 마스터 ‘미스터 오’는 파리 올림픽 후 르 몽드 등 유력지의 스포츠면 기사를 여러 차례 장식했다. 집 인근 레스토랑에 가면 알아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좋아진 건 일과 삶의 균형이다. 여유 넘치는 프랑스 사람들과 함께하며 할 땐 하고, 쉴 때는 확실히 쉬는 삶을 산다. 흔히 말하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완벽한 인생이다. 좋은 날씨 속에 야채, 단백질 위주의 건강한 식단을 하면서 몸도 완전히 달라졌다. 한국에서 먹던 성인병 약은 프랑스에서는 모두 끊었다.근력 운동과 유산소 운동도 꾸준히 한다. 밴드 스트레칭으로 유연성을 유지하고, 가벼운 무게의 기구를 사용해 근력을 키운다. 주말에는 집 인근 골프장에서 카트를 끌고 18홀을 돈다. 오 감독은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때만 해도 18홀을 돈 뒤 너무 피곤해서 쓰러졌다. 지금은 가끔 36홀도 소화할 만큼 몸이 좋아졌다”며 웃었다. 프랑스에서 생활 체육에 가까운 승마도 가끔 한다.한국에서 성공적인 지도자 인생을 보낸 그가 프랑스에서도 많은 사람이 부러워할 만한 제2의 인생을 사는 건 양궁에 관한 열정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양궁을 시작한 그는 10점 과녁에 화살이 꽂힐 때의 쾌감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미친 듯이 운동을 했다. 일반 학생들이 등교하기 전인 오전 6시에 먼저 나가 운동을 시작했고, 밤이 깜깜해져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고교 때 전국대회 우승도 여러 번 했지만 선수로서의 한계도 일찍 깨달았다. 올림픽에 나갈 선수가 될 수 없으니 대학생 때 일찌감치 지도자로 변신했다. 처음엔 중고교 팀을 맡다가 1993년부터 한국토지공사(현 LH) 감독이 됐다. 그의 밑에서 성장한 대표적인 선수는 2016년 리우 올림픽 2관왕 ‘짱콩’ 장혜진이다. 실력에 비해 멘털이 약했던 장혜진은 번번이 대표 선발전 마지막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이를 이겨내는 방법은 관중들이 많은 국제대회에 많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오 감독은 “국가대표야 알아서 국제대회 경험을 쌓을 수 있지만 장혜진 같은 선수는 그렇지 못했다. 개인 적금을 깨서 국제대회에 내보낸 적도 있다. 어느 순간 장혜진이가 알을 깨고 세계적인 선수가 됐다”고 했다. 한국에 있었더라면 벌써 은퇴했을 나이. 하지만 프랑스에서 오 감독은 여전히 현역이다. 최근에는 프랑스양궁협회와 2028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까지 재계약을 했다. 오 감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양궁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라며 “유럽 양궁이 좀 더 성장해야 세계 양궁이 더 재미있어진다. 당장은 프랑스 대표팀에 집중하고자 한다. 장기적으로는 유럽 곳곳에 양궁 캠프를 세울 꿈을 꾸고 있다”고 말했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베테랑 양궁 지도자 오선택 감독(64)은 2021년 LH양궁단에서 정년을 맞은 후 일생의 선택을 했다. 2022년 프랑스 대표팀 감독직을 맡은 것이다. 2024년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프랑스는 좋은 성적을 내줄 지도자를 원했다. 오 감독은 정년 후에도 자신의 지도력을 펼칠 무대가 필요했다. 양측의 입장이 맞아떨어지면서 오 감독은 2022년 초 프랑스로 향했다. 프랑스 양궁은 작년 파리 올림픽에서 두 가지 역사적인 기록을 남겼다. 남자 대표팀은 단체전 은메달을 따며 사상 처음 올림픽 시상대에 올랐고, 리자 바르블랭은 여자 선수 최초로 개인전 메달(동메달)을 수확했다. 한국 양궁이 전 종목(금메달 5개)을 석권한 가운데 프랑스는 종합순위 2위에 오르며 개최국의 체면을 지켰다. 오 감독은 근력이 모자란 남자 선수들의 활을 한국 여자 선수들이 쓰는 활로 바꿨다. 바람 방향에 따라 조준을 달리하는 오조준도 가르쳤다. 동시에 한국 양궁의 DNA를 불어넣었다. 오 감독은 올림픽을 앞두고 퐁텐블로에서 양궁장이 설치된 파리 앵발리드까지 74km 거리의 행군을 기획했다. 오전 7시에 출발해 꼬박 24시간이 걸리는 강행군이었다. 오 감독은 “뚜렷한 목표의식을 갖기 위해선 기억에 남는 훈련이 필요하다. 선수들이 앵발리드로 골인하면서 개선하는 느낌을 주도록 했다”고 했다. 오 감독은 한국에서부터 검증된 지도자였다. 소속팀에서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이은경(53), 2016년 리우 올림픽 2관왕에 오른 장혜진(38) 등을 키웠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땐 여자 대표팀 코치로 한국 선수단의 개인전 1∼3위를 이끌었고, 2012년 런던 대회에선 남자 대표팀 감독으로 사상 첫 남자 선수 개인전 금메달(오진혁)에 기여했다. 역설적이게도 세계 최강 한국 양궁을 지키면서 그는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2012년 런던 올림픽 즈음에는 당뇨와 고혈압, 고지혈증에 시달렸다. 대회 기간 중에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제2의 지도자 인생을 사는 프랑스에서는 다르다. 여유 넘치는 프랑스 사람들과 함께하며 할 땐 하고, 쉴 때는 확실히 쉬는 삶을 산다. 흔히 말하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완벽한 인생이다. 좋은 날씨 속에 야채, 단백질 위주의 건강한 식단을 하면서 몸도 완전히 달라졌다. 한국에서 먹던 약은 프랑스에서는 모두 끊었다. 근력 운동과 유산소 운동도 꾸준히 한다. 밴드 스트레칭으로 유연성을 유지하고, 가벼운 무게의 기구를 사용해 근력을 키운다. 주말에는 집 인근 골프장에서 카트를 끌고 18홀을 돈다. 오 감독은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때만 해도 18홀을 돈 뒤 쓰러졌다. 지금은 가끔 36홀도 소화할 만큼 몸이 좋아졌다”며 웃었다. 프랑스에서 생활 체육에 가까운 승마도 가끔 한다. 오 감독은 최근 프랑스양궁협회와 2028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까지 재계약을 했다. 오 감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양궁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라며 “유럽 양궁이 좀 더 성장해야 세계 양궁이 더 재미있어진다. 당장은 프랑스 대표팀에 집중하고자 한다. 장기적으로는 유럽 곳곳에 양궁 캠프를 세울 꿈을 꾸고 있다”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프로야구엔 ‘악바리’나 ‘독종’이란 별명을 가진 선수들이 종종 나온다. 그중 원조 악바리를 꼽으라고 하면 누구나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한국프로야구 제1호 몸에 맞는 공의 주인공인 김인식 연천 미라클 감독(72)이다. ‘국민 감독’으로 불리는 김인식 전 한국 야구 대표팀 감독(78)과는 동명이인이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작은 체구로 ‘베트콩’으로도 김인식은 승부욕이 남다른 선수였다. 키가 168cm 밖에 되지 않았던 그는 홈런 타자가 아니었다. 대신 공을 몸에 맞고서라도 출루하고자 하는 ‘악’과 ‘깡’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나야 뭐 치사하게 ‘데드볼’이나 맞고 출루하려고 했던 선수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상대 배터리의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는 날아오는 공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항상 타석에 바짝 붙어섰다. 조금이라도 공이 몸쪽으로 들어올라치면 팔이나 몸을 내밀어 일부러 맞았다. 일단 출루한 뒤에는 빠른 발을 앞세워 수비진을 흔들었다. 1루 나간 뒤 2루를 향해 뛸 듯 말 듯 하는 모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그는 18차례의 사구(死球)를 기록했다. 이듬해인 1983년에는 13번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했다. 그리고 1984년 어느 날 한국 야구사에 지금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 하나 나온다. 바로 3연타석 몸에 맞는 공이다. 주연은 김인식, 조연은 재일교포 투수 고 장명부(삼미)였다. 제구력이 좋았던 장명부는 잠실 경기에서 두 번 연속 김인식을 맞혔다. 그리고 다음 인천 경기 첫 타석부터 다시 몸에 맞는 공을 던졌다. 김인식도 참지 않았다. 씩씩거리며 마운드를 향해 달려갔다. 여느 때 같으면 벤치클리어링이 벌어질 만도 했지만 양 팀 벤치의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김인식은 장명부의 허리띠를 잡고 당겼다. 하지만 덩치가 산만 했던 장명부는 꿈쩍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김인식이 1루로 돌아갔을 때 장명부는 김인식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윙크를 했다. “일부러 빈볼을 던졌다”는 표현이었다. 김 감독은 “홈런도 못 치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겠나. 팀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루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아무 공에나 맞으면 안 된다. 빠른 공을 피하고 이왕이면 변화구에 맞고 나가려 했다”며 웃었다. MBC 청룡에 입단하기 전 그는 실업야구 롯데제과에 몸담았다. 당시 일본에서 수비코치가 왔는데 그는 하루에 펑고를 500개씩 받았다. 김인식은 “도이 상으로 기억한다. 도이 코치로부터 수비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은 후부터 힘과 기술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거칠었던 플레이가 부드러워지면서 1976년에 국가대표로도 뽑혔다. 그리고 그해 콜롬비아 세계선수권대회에 나갈 수 있었다”고 했다.악착같은 노력도 한몫했다. 평소 그는 발과 하체 힘을 키우기 위해 운동화 대신 군화를 신고 다녔다. 그 모습을 본 일본인 코치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독종”이라고 평했다. 프로 입단 후에도 그는 최선을 다했다. 몸을 아끼지 않는 허슬플레이를 펼치면서도 원년 개막전을 시작으로 6년간 606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웠다. 이후 최태원 등에 의해 이 기록은 깨졌지만 프로야구의 원조 철인(鐵人)을 논할 때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 이유다. 고비도 적지 않았다. 내야수였던 그는 해태와의 경기 도중 김성한이 친 땅볼을 잡다가 오른쪽 엄지손가락이 완전히 꺾인 적이 있다. 그는 그 경기를 마지막까지 소화한 뒤 병원으로 갔다. 김인식은 “어떤 날은 피가 흐르는데도 경기를 계속한 적도 있다. 1루로 송구할 때 피가 1루까지 날아가곤 했다”고 회상했다. 무슨 일에든 최선을 다하는 자세와 야구에 대한 열정은 지도자가 된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1988년 선수 은퇴 후 그는 LG 2군 코치와 감독, 1군 수석코치 등을 두루 거쳤다. 2006년 LG 2군 감독을 끝으로 프로를 떠난 뒤에는 2007년부터 2013년까지는 충훈고 감독을 맡았다. 당시 신생팀이던 충훈고는 재정적으로 풍족하지 못했다. 선수단 버스를 운전할 기사 월급을 주는 게 여의치 않자 그는 1종 대형면허를 취득한 후 직접 선수단 버스를 몰았다. 그가 지도자로서 제2의 인생을 바치고 있는 곳은 2015년 창단한 독립구단 연천 미라클이다. 독립구단은 프로 지명을 받지 못했거나, 마지막으로 프로 도전을 목표로 하는 선수들이 모이는 곳이다. 11년째 지휘봉을 잡고 있는 그는 여전히 선수들과 함께 호흡한다. 경기 때는 더그아웃에 앉아 있지 않고 헬멧을 쓰고 3루 주루코치로 나간다. 김인식은 “야구를 하다가 아픔을 겪은 선수들에게는 재기할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팀을 맡았는데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한때 열악하기 그리 없던 독립리그지만 지금은 KBO리그로부터 점점 관심을 받고 있다. 팀 이름 미라클(기적)처럼 독립리그를 거쳐 프로야구에 진출하는 선수들이 한두 명씩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연천에서 함께 땀을 흘렸던 손호영(롯데), 황영묵(한화), 박영빈(NC) 등은 어엿한 주전 선수로 1군 무대를 소화했다. 올해 롯데의 새 별로 떠오른 박찬형도 연천 미라클에서 2년간 함께 했다. 김인식 감독은 “손호영처럼 독립리그를 통해 뒤늦게 꽃을 피우는 선수들이 나오면서 이제는 프로 10개 구단 스카우트들이 종종 선수들을 보러 온다”라며 “프로의 관심 속에 선수들도 꿈과 희망을 갖고 더 열심히 하고 있다. 우리 독립리그가 프로야구의 3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19년 발병한 위암도 야구로 극복했다. 암세포를 조기 발견해 수술을 받은 후 다시 야구장에서 젊은 선수들과 땀을 흘렸다.그는 요즘도 오전 5시 반이면 일어나 타격 연습이 필요한 선수들과 함께 운동장으로 향한다. 70살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배팅볼도 250~300개씩 던져 준다. 수시로 펑고도 친다. 김인식은 “젊은 선수들과 함께 호흡하는 게 나한테도 큰 도움이 된다. 3루 주루코치로 나가고, 배팅볼도 던지면 선수들이 더 집중한다“고 말했다. 연천 미라클의 연고지인 경기 연천군은 크게 유명할 게 없는 지자체였다. 하지만 연천 미라클의 선전 속에 야구 도시로서의 명성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 연천군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연천 미라클은 2025 독립야구단 경기도리그에서 우승하며 4년 연속 챔피언에 올랐다. 김 감독은 “연천군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이 자리까지 올라오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하는 만큼 모든 분들이 정말 열심히 도와주신다”라며 “야구를 시작한 날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았다. 지금까지 그라운드에 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다. 몸이 버티는 데까지 후배들과 야구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악바리’란 불린 사나이가 있었다. 프로야구 제1호 몸에 맞는 공의 주인공 김인식 독립리그 연천 미라클 감독(72)이다. ‘국민 감독’으로 불리는 김인식 전 한국 야구 대표팀 감독(78)과 동명이인이다. 원년 MBC 청룡 유니폼을 입었던 김 감독은 ‘악’과 ‘깡’으로 작은 체구를 이겨냈다. 신장 168cm의 작은 키에 힘도 그리 세지 않았지만 상대 배터리는 그를 무척 까다로워했다. 우선 그는 몸에 맞는 공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날아오는 공에 일부러 몸을 갖다 댄 후 출루하기도 했다. 일단 누상에 나갔다 하면 빠른 발로 수비진을 휘저었다. 그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기록은 3연속 타석 몸에 맞는 공이다. 평소 그를 눈엣가시처럼 보던 재일교포 투수 고 장명부(삼미)가 1984년에 세 번 연속 그를 맞혔다. 세 번째 공을 맞은 후 김 감독은 분을 참지 못하고 마운드로 달려갔다. 하지만 거구이던 장명부는 가만히 내려다볼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씩씩거리며 1루로 돌아간 김 감독에게 장명부는 찡긋 윙크를 했다. ‘빈볼이었다’는 표현이었다. 김 감독은 “홈런도 못 치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겠나. 팀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루하자는 생각이었다”며 “그렇다고 아무 공에나 맞은 건 아니다. 이왕이면 변화구에 맞고 나가려 했다”며 웃었다. 몸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그는 원년 개막전부터 606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웠다. 내야수였던 김 감독은 “어느 경기에서인가 김성한(해태)이 친 땅볼에 엄지손가락이 꺾인 적이 있다. 그래도 끝까지 경기를 뛰었다”며 “피가 흐르는데도 그냥 뛰었다. 1루로 공을 던질 때 피가 1루까지 날아갔다”고 했다. 무슨 일에든 최선을 다하는 자세와 야구에 대한 열정은 지도자가 된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2006년 LG 2군 감독을 끝으로 프로를 떠난 김 감독은 2007년부터 2013년까지는 충훈고 감독을 맡았다. 당시 신생팀으로 재정적으로 열악했던 팀 사정상 그는 대형 면허를 취득해 손수 선수단 버스를 몰았다. 2015년부터는 독립구단 연천을 이끌고 있다. 독립구단은 프로 지명을 받지 못했거나, 마지막으로 프로 도전을 목표로 하는 선수들이 모이는 곳이다. 11년째 지휘봉을 잡고 있는 그는 여전히 선수들과 함께 호흡한다. 경기 때는 더그아웃에 앉는 대신 헬멧을 쓰고 3루 주루코치로 나간다. 오전 5시 반이면 일어나 타격 연습이 필요한 선수들에게 배팅볼도 300개씩 던져 준다. 수시로 펑고도 친다. 2019년 발병한 위암도 야구로 극복했다. 암세포를 조기 발견해 수술을 받은 후 다시 야구장에서 젊은 선수들과 땀을 흘렸다. 연천은 팀 이름 미라클처럼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의 밑에서 마지막 도전을 한 황영묵(한화), 손호영(롯데), 박영빈(NC) 등이 KBO리그에 진출해 당당히 1군 무대에서 뛰고 있다. 박찬형(롯데)도 연천을 거쳤다. 연천군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연천 미라클은 올 시즌에도 2025 독립야구단 경기도리그에서 우승하며 4년 연속 챔피언에 올랐다. 김 감독은 “야구를 시작한 날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았다. 지금까지 그라운드에 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감사한 일”이라며 “몸이 버티는 데까지 후배들과 야구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고독한 황태자’로 불렸던 윤학길 전 롯데 2군 감독(64)은 딸에게 운동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다인 통산 100경기 완투 기록을 갖고 있는 윤 감독은 운동이 얼마나 힘들고 고독한 길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태자의 DNA를 받고 태어난 딸 윤지수(32)는 어릴 때부터 에너지가 넘쳤다. 축구를 하겠다고 했다가, 태권도 선수가 되겠다고 했다. 윤 감독은 “딸을 예쁘게 키우고 싶었다. 지수는 어릴 때부터 공부도 꽤 잘했다. 그런데 결국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더라”고 했다. 윤지수가 다녔던 부산 양운중에는 남자 펜싱부가 있었다. 원래 여자 펜싱부도 있다가 윤지수가 입학했을 당시에는 남자부만 운영하고 있었다. 그의 운동신경을 알아본 박현석 선생님이 그에게 펜싱을 권했다. “너만 하겠다고 한다면 여자 펜싱부를 재창단해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처음 칼을 잡은 윤지수는 부내 유일한 여자 선수였다. 당연히 남자 선수들과 연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펜싱 스타일이 남자와 비슷해진 이유다. 윤지수는 “남자 선수들과 같이 체력 훈련을 했다. 체육관이 6층에 있었는데 남자 선수들과 함께 매일 뛰어올랐다”고 했다.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그와 연습 경기를 하다가 진 뒤 우는 남자 선수들도 생겼다. 윤 감독은 “잘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열심히는 하더라”고 했다. 아버지 윤 감독은 딸이 운동하는 데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응원만 했다. 다른 부모들처럼 경기가 열린 펜싱 경기장을 찾은 적도 한 번 없다. 하지만 윤지수는 선수 생활 내내 ‘윤학길의 딸’로 통했다. 그만큼 아버지의 그림자는 크고 깊었다.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가 땀 흘리고 노력해 시상대 제일 높은 곳에 섰을 때도 사람들은 “윤학길 선수가 어떤 조언을 해줬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아빠의 존재가 그에겐 큰 동기부여가 됐다. 윤지수는 “어릴 적 종종 아빠를 따라 야구장을 갔다. 아빠는 항상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있었다. 아빠처럼 나도 큰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고 했다.어릴 때부터 유망주 소리를 들었던 윤지수였지만 세계적인 선수가 되는 과정이 호락호락 하지 만은 않았다. 세상은 넓었고 강자들은 많았다. 부산디자인고 3학년 때 처음 국가대표가 돼 태릉선수촌에 들어 갔지만 선배들의 기량은 그보다는 한참 위였다. 윤지수는 “나는 안되는 선수라고 생각했다. 당시 사촌 언니한테 전화해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봐달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며 웃었다. 모든 아마추어 선수들의 꿈인 올림픽도 번번이 그를 외면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땐 여자 사브르 개인전 금메달을 딴 김지연의 파트너 선수에 머물렀다. 런던 땅은 밟지도 못한 채 국내에서만 훈련했다. 처음 올림픽 출전이었던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때는 후보 선수로 엔트리에 들어 개인전에 출전하지 못했다. 단체전에선 5위를 했다. 2021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는 무릎 수술을 받아 출전을 못 할 뻔했다. 자신감도 바닥까지 떨어졌다. 죽도록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을 것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나선 도쿄 올림픽에서 그는 김지연, 최수연, 서지연과 함께 여자 사브르 단체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탈리아와의 동메달 결정전 한때 10점 차로 뒤졌지만 이를 45-42로 뒤집었다. 윤지수는 6바우트에서 11점을 추가하며 역전의 발판을 놨다. 그는 “내 생에 가장 기억이 남는 게 도쿄 올림픽 동메달이다. 꿈에 그리던 첫 올림픽 메달이었다”고 했다. 아버진 윤 감독은 딸의 경기를 TV로 보지 않았다. 아니, 볼 수가 없었다. 그는 혼자 산에 올라 등산을 하면서 마음으로 딸을 응원하고 있었다. 마침내 동메달을 확정한 윤지수의 연락이 왔을 때 그의 반응은 참으로 경상도 남자다웠다. “메달 땄다고 까불지 말고 몸가짐 잘하라”는 것이었다. 귀국 후 윤지수가 아빠의 목에 올림픽 동메달을 걸어줬을 때도 윤 감독은 “축하한다”는 말 대신 “잘나갈수록 겸손해라”고 말했다. 윤지수는 “정말 아빠다운 축하 말이었다. 나도 사람인지라 처음엔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맞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윤학길-윤지수 부녀는 ‘올림픽 가족’이기도 하다. 1984년 상무 소속이던 윤 감독도 그해 열린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에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했다. 다만 당시 야구 종목은 올림픽 정식 종목이 아닌 시범 종목이었다. 윤 감독은 “경기장이 LA 다저스의 홈구장인 다저스타디움이었다. 그곳에서 한국 팀의 첫 승을 내가 거뒀다. 아마 박찬호보다 훨씬 빨리 승리를 거둔 한국 선수일 것”이라며 “그런데 아픈 기억도 있다. 3, 4위 결정전에서 내가 홈런을 맞는 바람에 우리 팀이 졌다. 다저스타디움 첫 피홈런 기록도 내가 갖고 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윤지수는 맏언니로 출전한 지난해 파리 올림픽에서는 후배들과 함께 여자 사브르 단체전 은메달을 수확했다. 올림픽 은 1개, 동메달 1개를 갖고 있는 윤지수가 올림픽에 관한 한은 아버지를 뛰어넘은 셈이다. 부녀는 특징도 다르다. 윤 감독은 투수 시절 리그를 대표하는 선발 투수였다. 12시즌 동안 거의 대부분 선발 투수로만 뛰며 117승을 거뒀다. 그중 완투가 100회, 완봉승이 무려 20회였다.반면 딸 윤지수는 단체전에서 후반을 지키는 ‘마무리’ 역할에 더 강했다. 개인전보다는 단체전때 훨씬 성적이 좋았다. 윤지수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단체전을 할 때면 지고 있어도지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라며 “파리 올림픽 때 맏언니로서의 무게를 이기고 값진 은메달을 땄다. 서울시청 입단 후 파리 올림픽까지 이끌어주신 조종형 협회 부회장님께 감사드린다”고 했다. 올해 1월 한국 여자 펜싱 사브르의 간판으로 활약하던 윤지수가 정들었던 칼을 내려놨다. 더 뛸 수도 있지만 미련 없이 새로운 길을 걷기로 했다. 전북 익산체육관에서 열린 은퇴식 때 윤 감독은 꽃다발을 들고 딸을 찾았다. 윤지수는 “아빠는 한 번도 직접 경기장을 찾은 적이 없었다. 항상 멀리서 응원하던 아빠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펜싱장에 오셨다. 부녀간의 의리를 지켜주셨다”며 웃었다.그가 ‘의리’라는 표현을 쓴 건 1997년 8월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윤 감독의 은퇴식 때 네 살이던 그가 꽃다발을 들고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얀색 치마를 입은 그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아빠에게 꽃다발을 건넸다.부녀는 은퇴 후 살아가는 모습도 닮았다. 2019년 한화 코치를 마지막으로 현장을 떠난 윤 감독은 한국야구위원회(KBO) 재능기부위원으로 야구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틈날 때마다 유망주들을 성심성의껏 지도한다. 윤지수는 올해 1월 위례신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딴 펜싱클럽을 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는 선수 때 알지 못했던 행복을 느끼고 있다. 윤지수는 “아이들이 웃으면서 펜싱을 하는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 없다. 아이들의 눈을 보면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라고 말했다. 윤지수는 “돈을 많이 벌기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펜싱의 재미와 매력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나도 아빠처럼 받은 만큼 돌려주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1997년 8월 부산 사직구장에서는 ‘고독한 황태자’ 윤학길 전 롯데 2군 감독(64)의 은퇴식이 열렸다. 1986년 롯데에 입단한 윤 감독은 1997년 은퇴할 때까지 롯데에서만 뛴 레전드 투수다. 그가 기록한 통산 100경기 완투는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당시 네 살이던 딸 윤지수(32)도 그 자리에 있었다. 하얀색 치마를 입은 그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아빠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올해 1월. 여자 펜싱 사브르의 간판으로 활약하던 윤지수가 칼을 내려놨다. 전북 익산체육관에서 열린 은퇴식 때 윤 감독이 꽃다발을 들고 딸을 찾았다. 윤지수는 “아빠는 한 번도 직접 경기장을 찾은 적이 없었다. 항상 멀리서 응원하던 아빠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펜싱장에 오셨다. 부녀간의 의리를 지켜주셨다”며 웃었다. 선수 생활 내내 윤지수는 ‘윤학길의 딸’로 통했다. 그만큼 아버지의 그림자는 크고 깊었다. 마냥 좋지만은 않았지만 아빠의 존재가 큰 동기부여가 된 것도 사실이다. 윤지수는 “어릴 적 종종 아빠를 따라 야구장을 갔는데 아빠는 항상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있었다. 아빠처럼 나도 큰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유망주 소리를 들었지만 목표로 했던 올림픽 메달은 번번이 그를 외면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땐 파트너 선수에 머물렀고,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선 단체전 5위를 했다. 2021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는 무릎 수술을 받아 출전을 못 할 뻔했다. 우여곡절 끝에 나선 도쿄 올림픽에서 그는 김지연, 최수연, 서지연과 함께 여자 사브르 단체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탈리아와의 동메달 결정전 한때 10점 차로 뒤졌지만 이를 45-42로 뒤집었다. 윤지수는 6바우트에서 11점을 추가하며 역전의 발판을 놨다. 윤지수는 맏언니로 출전한 지난해 파리 올림픽에서는 후배들과 함께 여자 사브르 단체전 은메달을 수확했다. 윤 감독은 투수 시절 리그를 대표하는 선발 투수였다. 반면 딸 윤지수는 단체전에서 후반을 지키는 ‘마무리’ 역할에 더 강했다. 파리 올림픽 이후엔 윤 감독을 ‘윤지수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아졌다. 윤 감독과 윤지수는 전형적인 ‘경상도 부녀’다. 많은 대화는 없지만 마음으로 서로를 챙긴다. 윤지수가 올림픽 메달을 아빠의 목에 걸어줬을 때도 윤 감독은 “축하한다”는 말 대신 “잘나갈수록 겸손해라”라고 말했다. 윤지수는 “아빠다운 축하말이었다. 섭섭할 수도 있지만 맞는 말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올림픽을 끝으로 미련 없이 은퇴를 택한 윤지수는 올해 1월 위례신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딴 펜싱클럽을 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는 선수 때 알지 못했던 행복을 느끼고 있다. 윤지수는 “아이들이 웃으면서 펜싱을 하는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 없다. 아이들의 눈을 보면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라고 말했다. 현장을 떠난 윤 감독은 요즘도 KBO 재능기부위원 자격으로 틈날 때마다 유망주들을 가르친다. 윤지수도 아버지의 길을 따르려 한다. 그는 “돈을 많이 벌기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펜싱의 재미와 매력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나도 아빠처럼 받은 만큼 돌려주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누구나 성공할 수 있고, 누구나 실패할 수 있다. 하지만 실패했다고 멈춰있으면 안 된다. 멈춰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뭔가 해보려고 하는 사람은 하늘이 돕는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다시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이런 교수님 같은 말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이태현 용인대 무도스포츠학과 교수(49)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하고 상식적인 말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태현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이태현은 천당과 지옥, 천국과 밑바닥을 모두 경험한 몇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모래판의 황태자’라는 별명으로 군림했던 이태현이지만 지금 이 자리까지 오기까지는 그는 산전수전을 다 겪어야 했다. 이태현은 일명 ‘이만기 키즈’다. 이만기가 화려한 기술을 앞세워 모래판을 휩쓰는 걸 보면서 씨름을 시작했다. 이태현 뿐 아니라 신봉민, 김경수, 김영현, 황규연 등 걸출한 장사들이 한국 민속씨름의 마지막 전성기를 함께 했다. 그중에서도 이태현은 단연 특별한 선수였다. 의성고 3학년이던 1993년 때 7관왕을 달성하며 ‘모래판의 지존’으로 불렸다. 민속씨름에 데뷔한 1994년에도 선전을 거듭하더니 그해 9월 곧바로 천하장사에도 등극했다. 하지만 꿈에 그리던 천하장사가 영광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5판 3선승제로 치러진 백승일과의 결승전이 팬들의 기대와는 동떨어진 내용을 보였기 때문이다. 서로를 너무 잘 알던 두 선수는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했다. 무승부에 무승부가 이어졌다. 무려 12판까지 승부를 가리지 못하자 주최 측은 체중이 더 적게 나가는 선수가 이기는 걸로 규칙을 정했다. 승리는 체중이 적게 나간 이태현에게 돌아갔다. 이 때문에 한동안 그의 이름 앞에는 ‘저울장사’란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이태현은 “처음 천하장사가 됐을 때 마치 구름 위를 걷은 기분이었다. 경기를 마치고 휴게소에 갔는데 팬들이 박수를 치면서 환호해 줄 때 ‘이게 바로 천하장사구나’라고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하루 자고 일어나자 상황이 바뀐 걸 알았다. 그는 “다음 날 거의 모든 신문이 ‘저울장사’라는 표현을 썼더라. 환영받지 못하는 천하장사라는 걸 깨닫고 다음부터는 정말 공격적인 씨름을 하려고 애썼다. 실제로 이듬해 경기부터는 이기던 지던 공격적으로 임했다”라고 말했다. 타고난 힘에 기술까지 겸비하고 있던 이태현은 승승장구했다. 2006년 처음 은퇴할 때까지 그는 천하장사 3차례와 백두장사 18번을 차지했다. 모래판을 떠나면서 그는 인생 일대의 도전에 나섰다. 종합격투기인 일본 프라이드 진출을 선언한 것이다. 한국에서 씨름은 점점 인기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씨름협회는 내부 알력으로 시끄러웠다.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일본 종합격투기계는 이미 이전부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그는 일본에서 초청을 받았다.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고 있는 이승엽의 경기도 볼 겸 구경이라도 해보라는 것이었다. 이태현은 “경기장에 들어섰을 때는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0만 관중의 환호가 내 도전 의식을 자극했다. 이렇게 큰 무대에 한 번 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그의 나이는 벌써 30대 초반이었다. 나름 팀을 꾸려 열과 성을 다해 훈련을 했다. 그는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이런 정성이었으면 천하장사 다섯 번은 더 했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수십 년 씨름에 익숙해진 몸이 종합격투기형 몸으로 단시간에 바뀔 리 없었다. 머리로는 알아도 몸이 따라가질 않았다. 그해 9월 히카르도 모리아스와의 데뷔전에서 그는 1라운드 8분 8초만에 TKO로 패했다. 훤칠하게 잘 생겼던 그의 얼굴은 피와 멍으로 가득 찼다. 몸보다 더 아픈 건 마음이었다. 당시 그는 무지막지한 악플에 시달렸다. 절치부심한 그는 당대 최고의 종합격투기 선수였던 표도르가 운영하던 러시아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또 다른 지옥을 경험했다. 천하장사건 뭐건 그곳에선 모든 게 실전이었다. 코뼈가 내려앉고, 눈가가 찢어졌다. 이태현은 “한 손에는 가족사진, 또 한 손에는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들고 6개월을 버텼다. 죽고 싶은 마음을 아이들 사진을 보면서 다잡았다”고 말했다. 훈련의 성과는 놀라웠다. 비밀리에 한국 챔피언과 스파링을 했는데 주먹이 날아오는 게 다 보였다. 일본 도장에 가서 스파링을 했는데 두 명을 꼬꾸라뜨렸다. 그리고 복귀전으로 치른 야마모토 요시히사오의 경기에서 1라운드 TKO승을 거뒀다. 그의 앞에는 거칠 게 없어 보였다. 몸도 좋았고, 자신감도 넘쳤다. 하지만 자만심이 화를 불렀다. 다름 상대를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였던 알리스타 오브레임(네덜란드)으로 고른 것이다. 이태현은 “이왕 할 거면 제대로 된 선수랑 붙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1라운드 36초 만에 처참하게 무너졌다. 니킥을 맞고 기절한 것이다. 이태현은 “씨름으로 쌓아 올렸던 부와 명예가 바닥까지 추락했다. 사람들이 무서워 3개월 동안 아예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라고 했다.수렁에 빠진 그를 다시 꺼내 준 것은 씨름이었다. 친구들은 그를 데리고 오토바이 여행을 다녔다. 헬멧을 쓰고 있으면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초등학교 은사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가 다시 모래판으로 돌아오라는 제의를 받았다. 아내 이윤정 씨도 “오빠가 가장 잘하고, 즐거웠던 것을 하라”며 힘을 보탰다. 이태현은 “복귀를 결심했을 때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내가 모래판에 올라오자 그런 분들도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셨다”라며 “돌아온 씨름판에서는 모든 분들이 내게 좋은 말씀을 해주셨다. 나를 다시 일으켜준 씨름을 위해 남은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복귀 첫해 그는 정상에 오르진 못했다. 10월 백두장사와 12월 천하장사에서 각각 준우승을 했다. 우승을 하지 못하고 2등을 해도 팬들을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한창때 140kg를 넘겼던 몸무게는 종합격투기를 하면서 120kg까지 빠져 있었다. 아내는 요리 학원을 다니면서 맛있는 걸 해 먹였다. 다시 몸무게가 140kg대로 올라온 그는 제 기량을 찾았다. 이듬해인 2010년 그는 1월 설날장사에 등극했고, 이후 백두장사에서 두 번 더 우승했다. 그는 천하장사 3회, 백두장사 20회, 통산 497승이라는 빛나는 기록을 뒤로 하고 2011년 3월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은퇴 후 그는 결심대로 씨름을 위한 인생을 살고 있다. 2011년 용인대 교수로 임용돼 지금까지 교수로 일하고 있다. 용인대 씨름부를 이끌면서 대한체육회 이사와 대한씨름협회 이사직도 맡고 있다. 문화재청 산하 인류문형문화유산씨름진흥원 이사장직도 수행하고 있다. 그의 모든 활동은 오직 씨름을 향해 있다. 처음 씨름을 시작할 때부터 부모님은 그에게 공부를 함께 시켰다. 경북 의성으로 씨름 유학을 간 그는 주말에 집에 오면 과외수업을 받았다. 용인대에 입학해서는 친구들이 “자더라도 강의실에서 자라”며 그를 수업에 데리고 들어갔다. 그렇게 책을 가까이한 덕분에 바쁜 와중에도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이태현은 “씨름을 국내외 여러 곳에 많이 알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재작년에 미군들을 상대로 씨름을 가르쳤고, 몽골에도 씨름을 전파했다. 최근에는 태권도의 품새라 할 수 있는 씨름의 겨룸새를 개발하고 있다”라며 “전 세계적으로 씨름과 유사한 종목들이 많다. 씨름을 아시안게임을 넘어 세계선수권대회 종목으로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하루가 어떻게 가는 줄 모르고 바쁘게 살고 있는 그에겐 버킷리스트가 하나 있다. 실의에 빠져 집에만 머물던 그를 다시 세상 밖으로 꺼내진 바이크를 타고 유럽을 누벼보는 것이다. 이태현은 “바이크를 타면 앞만 봐야 한다. 잡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조용한 산길,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며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어 너무 좋았다”라며 “언젠가 조금 한가해지는 시간이 온다면 혼자서, 또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와 함께 한달 간 바이크 여행을 해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모래판의 황태자’ 이태현(49)은 민속씨름 데뷔 첫해이던 1994년 천하장사에 올랐다. 영광스러운 꽃가마였지만 비난도 적지 않았다. 백승일과 치른 결승전(5판 3승제)은 지루한 무승부 끝에 12판이 지나서야 끝났다. 승리는 체중이 더 적게 나간 이태현에게 돌아갔다. 그에겐 한동안 ‘저울 장사’란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하지만 인생 최대의 시련은 전성기를 지낸 뒤 도전한 종합격투기에서 찾아왔다. 씨름 인기 하락과 내부 알력 등으로 시끄러웠던 2006년 이태현은 전격적으로 일본 프라이드에 진출했다. 천하장사 3회, 백두장사 20회, 통산 497승에 빛나는 그였지만 제대로 된 준비 없이 도전한 종합격투기가 순조로울 리 없었다. 2006년 첫 경기에서 브라질 선수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TKO패를 당했다. 러시아 표도르 훈련장에서 6개월간의 맹훈련 후 가진 첫 경기에서 일본 선수를 상대로 첫 승을 거뒀지만 2008년 알리스타이르 오버레임(네덜란드)에게 1라운드 36초 만에 처참히 무너졌다. 이태현은 “씨름으로 쌓아 올렸던 부와 명예가 바닥까지 추락했다. 3개월 동안 아예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라고 했다. 그를 수렁에서 꺼내준 건 아내 이윤정 씨와 친구들이었다. 친구들은 그를 데리고 오토바이 여행을 다녔다. 헬멧을 쓰고 있으면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초등학교 은사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가 다시 모래판으로 돌아오라는 제의를 받았다. 아내 이 씨도 “오빠가 가장 잘하고, 즐거웠던 것을 하라”며 힘을 보탰다. 한창 때 140kg을 넘겼던 몸무게는 종합격투기를 하면서 120kg까지 빠져 있었다. 아내는 요리 학원에 다니면서 맛있는 걸 해 먹였다. 다시 몸무게가 140kg대로 올라온 그는 승승장구하며 두 차례 더 백두장사를 차지했다. 이태현은 “종합격투기를 하면서 지독한 악성 댓글에 시달렸다. 그런데 돌아온 씨름판에서는 팬들이 격려를 해 주시더라. 나를 다시 일으켜준 씨름을 위해 남은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2011년 은퇴한 그는 그해 용인대 교수로 임용돼 지금까지 무도스포츠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용인대 씨름부를 이끌면서 대한체육회 이사와 대한씨름협회 이사직도 맡고 있다. 인류무형문화유산씨름진흥원 이사장직도 수행하고 있다. 그의 모든 활동은 오직 씨름을 향해 있다. 처음 씨름을 시작할 때부터 부모님은 그에게 공부를 함께 시켰다. 경북 의성으로 씨름 유학을 간 그는 주말에 집에 오면 과외 수업을 받았다. 용인대에 입학해서는 친구들이 “자더라도 강의실에서 자라”며 그를 수업에 데리고 들어갔다. 그렇게 책을 가까이한 덕분에 바쁜 와중에도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이태현은 “씨름을 국내외 여러 곳에 많이 알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재작년에 미군들을 상대로 씨름을 가르쳤고, 몽골에도 씨름을 전파했다. 최근에는 태권도의 품새라 할 수 있는 씨름의 ‘겨룸새’를 개발하고 있다”라며 “전 세계적으로 씨름과 유사한 종목들이 많다. 씨름을 아시안게임을 넘어 세계선수권대회 종목으로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대한프로레슬링연맹(WWA)은 30일 오후 3시 경기 부천체육관에서 고 이왕표 7주기 추모대회 ‘WWA THE WRESTLERS: 1 (더 레슬러즈: 1)’을 개최한다. 메인 이벤트는 WWA 월드 헤비급 챔피언 홍상진과 그와 23년 지기인 후배 김민호의 대결이다. 두 사람은 고 이왕표의 제자들이다. 이외에도 극동헤비급챔피언 조경호가 일본 유학 시절 동기이자 라이벌인 WWE 크루저웨이트 클래식 출신인 제이슨 리를 상대로 방어전을 치른다. 레전드 격투가 한태윤, 최두억과 WWA에서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피지컬 몬스터 하카(대만), 마이클 수(홍콩)의 태그팀 매치를 벌인다. 이를 포함해 다양한 스토리를 가진 6 시합이 열린다. 시합 당일 현장에는 이번 대회 메인스폰서인 성훈종합건설(주) 권태훈 대표를 비롯하여 고 이왕표와 ‘바늘과 실’ 같은 존재였던 프로레슬러 노지심, 홍보대사 개그맨 박준형, 배우 문주원, 금광산, 개그맨 김시덕 등이 참석한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스키 타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았던 소녀가 있었다. 틈만 나면 스키를 타던 그는 어느 날 올록볼록한 언덕을 타는 스키를 알게 됐다. 당시로선 생소했던 모굴스키였다. 국내에 정식 코스도 제대로 없을 때였지만 경사면 스키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모굴스키는 눈이 쌓인 언덕을 내려오면서 회전기술, 공중연기, 속도를 겨루는 프리스타일 스키 종목이다. 그가 중학교 2학년 때 국내에서 모굴스키 대회가 열렸다. 당시 그는 정식 선수는 아니었지만 전(前) 주자로 먼저 코스를 탔다. 일본 주니어 대표팀을 이끌고 방한했던 일본 감독이 그 모습을 지켜본 뒤 “같이 일본으로 가서 훈련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렇게 그는 ‘정식’ 모굴스키 선수가 됐다. 일본에서 제대로 훈련받은 그는 고1 때 한국 모굴스키 국가대표가 됐다. 하지만 생애 처음 태극마크를 단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중간고사를 보러 가기 위해 하루 훈련에서 제외해 줄 것을 대표팀에 요청하자 코칭스태프는 국가대표 포기 각서를 쓰라고 했다. 그는 과감히 태극마크를 포기하고 시험을 보러 갔다. 모굴스키를 선택한 것도, 시험을 보기 위해 국가대표를 포기한 것도 남달랐던 그는 전 한국 여자 모굴스키 국가대표 서정화(35)다. 그때부터 10여 년이 지난 현재 그는 법무법인 YK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을 졸업한 뒤 지난해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강원 춘천에서 만난 서정화는 “어린 마음에 ‘국가대표가 안 되면 체육 선생님을 하면 되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당시에도 꿈은 올림픽에 나가 메달을 따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모님도, 나도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면서도 충분히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년 뒤 그는 다시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해 태극마크를 달았다. 이번엔 대표팀에서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는 걸 허락해줬다. 고교 졸업 후 대학은 운동과 학업을 같이 하는 게 당연한 미국으로 갔다. 서던캘리포니아대에 입학한 그는 동아시아 국제 관계를 전공하면서 스키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그는 두 차례 겨울올림픽에 출전했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선 21위를 했고, 2014년 소치 대회 땐 부상 여파로 24위를 했다. 서정화는 “미국에서는 운동 선수를 대하는 문화가 한국과는 천양지차였다. 올림픽에 출전한다고 얘기하면 ‘너는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운동도 잘하는구나. 인생을 열정적으로 살고 있구나’라며 인정해주는 문화가 있었다”고 말했다. 말처럼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스키 종목 특성상 주요 국제대회는 유럽 등에서 많이 열렸고, 올림픽 등을 앞두고는 훈련도 유럽에서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정화는 “전지훈련을 가거나 대회를 갈 때에는 에세이 등을 과제로 대신 제출해야 했다. 계절학기도 들어야 했다”면서 “하지만 한편으로는 운동에만 매몰되지 않아 좋았다. 사람은 누구나 온-오프(on-off)가 있어야 하는데 내 경우엔 ‘온’이 운동이었다면 공부가 ‘오프’ 역할을 했다”고 했다. 그래도 일반 학생들보다 졸업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09년 입학한 그는 2015년에 졸업장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한국에서 열린 2018 평창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여자 모굴 사상 처음으로 결선 진출의 쾌거를 이뤄냈다. 평창올림픽 최종 성적은 14위였다. 그는 공중에서 두 바퀴를 돌아 720도 회전을 하는 ‘콕 7(CORK 7)’ 등 남자 선수들이 주로 했던 도전적인 기술들을 많이 선보였다. 여기서 의문 하나. 딱딱한 얼음 같은 슬로프에 잘못 착지하면 큰 부상을 입을 수 있지 않을까. 평소 모굴스키 선수들은 어떻게 훈련을 하는 걸까. 서정화는 “처음에는 공중 동작을 지상에서 익힌다. 트램폴린 등을 이용해 체조처럼 동작을 한다”라며 “이게 익숙해지면 ‘워터 점프’라고 해서 물에 착지하는 동작을 익힌다. 물에 착지하는 것까지 몸에 완전히 익히면 눈으로 이동한다”라고 설명했다. 그가 선수로 뛸 당시 국내에는 ‘워터 점프’ 시설이 없었다. 이 시설을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해외에 전지훈련을 가야 했다. 최근 국내에도 강원 춘천 남산면에 ‘발리376’이라는 워터 점프장이 생겼다. 서정화와 함께 모굴스키 선수생활을 했던 남동생 서명준이 운영하는 곳이다. 서정화는 “동생이 최근 은퇴하면서 이 시설을 짓고 운영하게 됐다. 스키 선수들만 상대해서는 수익이 나지 않아 오전엔 선수들이 사용하고, 오후엔 일반인에게도 개방한다”고 했다. 평창 올림픽을 전후해 그는 ‘제2의 인생’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다행히 학창 시절 내내 공부와의 끈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변호사 시험에도 도전할 수 있었다. 운동과 학업의 병행에 대한 그의 생각은 확고했다. 그는 “현재 우리나라 어린 선수들의 운동 시간이 너무 길다. 다른 나라 선수들은 두세 시간 하는데 우리는 7, 8시간을 한다”라며 “긴 운동 시간에는 부상 위험도 따른다. 그런 부분을 고려하면 우리 선수들도 훈련을 집중적으로 하면 공부할 시간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운동선수들의 인생에도 운동 이외의 삶이 있어야 한다. 공부를 잘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꾸준히 학교를 다니고, 일상적인 학교생활을 해나가는 것만으로도 향후 인생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경우엔 어릴 때부터 고민했던 스포츠 인권과 관련된 문제가 로스쿨을 선택한 계기가 됐다. 서정화 변호사는 “변호사로 일한 지 1년 밖에 되지 않아서 현재 일하고 있는 로펌에서 민사와 형사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건을 접하며 배우고 있다”며 “앞으로 어떤 분야를 전문으로 하든 스포츠 인권과 관련된 문제는 꾸준히 관심을 갖고 지켜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변호사 업무와 별개로 그는 현재 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 선수위원을 맡으며 시민단체인 스포츠인권연구소에서 활동하고 있다. 서정화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협회나 지도자와의 갈등이 있을 때 선수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라며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스포츠 인권 침해의 원인이나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라고 말했다. 변호사로 일하면서 그는 운동을 시작한 후 거의 떨어져 지냈던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선수 생활을 할 때보다는 훨씬 시간과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운동도 꾸준히 한다. 일주일에 두세 번 피트니스센터에 가서 러닝과 근육 운동을 한다. 최근에는 클라이밍에도 재미를 붙였다. 서정화는 “스키 선수 생활을 할 때는 하체를 많이 썼다. 그래서 당시 ‘크로스 트레이닝’을 위해 비시즌에는 상체 위주의 클라이밍을 했었다”라며 “당시엔 운동을 위해서였다면 지금은 재미로 한다. 어려운 문제를 푸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있다”고 말했다.하지만 여전히 그에게 마음의 고향은 스키 슬로프다. 은퇴 후에도 가끔 스키장에서 눈 위를 달렸던 그는 지난해부터 전국체전 시범종목으로 채택된 모굴 종목에 출전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소속으로 출전한 작년과 올해 모두 그는 일반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서정화는 “대회 때가 아니면 완벽한 모굴스키 코스를 타 보기가 어렵지 않나. 오랜만에 대회 코스 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라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LA 다저스의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이(31)가 ‘투수들의 무덤’ 쿠어스 필드에서 투수 복귀 후 최악의 투구를 했다. 오타니는 21일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의 쿠어스 필드에서 열린 2025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콜로라도와의 방문 경기에 1번 타자 겸 선발투수로 출전해 4이닝 동안 9피안타 무사사구 3탈삼진 5실점을 기록했다. 팀이 3-8로 패하면서 오타니는 올 시즌 10번째 등판만에 첫 패(무승)까지 떠안았다. 평균자책점은 3.47에서 4.61로 올라갔다. 오타니가 한 경기에서 9개 이상의 안타를 허용한 건 LA 에인절스 시절이던 2021년 9월 11일 휴스턴전(3과 3분의1이닝 9피안타 6실점) 이후 약 3년 11개월 만이다. 1회를 삼자 범퇴로 막은 오타니는 0-0이던 2회말 안타 3개와 희생타 1개를 허용하며 2실점 했다. 3회엔 다시 삼자 범퇴를 기록했으나 4회에 집중타를 얻어맞았다. 조던 벡을 시작으로 워밍 베르나벨, 미키 모니아크, 브렌턴 도일, 올랜도 아르시아 등 다섯 타자에게 연속 안타를 허용하며 3점을 내줬다.특히 아르시아의 타구는 오타니의 오른쪽 바깥쪽 허벅지를 직접 때렸고, 오타니는 한참 동안 그라운드 위에서 통증을 호소했다. 오타니는 잠시 휴식 후 이닝을 마무리했지만 0-5로 뒤진 5회말 수비에서 교체됐다. 타자 오타니는 이날 2타수 1안타 1볼넷을 기록한 뒤 8회초 공격 때 앨릭스 콜과 교체됐다.오타니는 경기 후 “올 시즌 초 (타석에 들어섰다가) 투수의 공에 맞았던 부분에 똑같이 타구를 맞았다. 하지만 향후 정상 출전에 지장이 없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타니는 하루 휴식 후 23일 시작되는 샌디에이고와의 경기부터 정상 출전할 예정이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국가대표냐, 중간고사냐. 전 한국 여자 모굴스키 국가대표 서정화(35)는 고교 1학년 때 인생의 기로에 섰다. 생애 처음 태극마크를 단 기쁨도 잠시. 중간고사를 보러 가기 위해 하루 훈련에서 제외해줄 것을 요청하자 대표팀은 국가대표 포기 각서를 쓰라고 했다. 그는 과감히 태극마크를 포기하고 시험을 보러 갔다. 10여 년이 지난 현재 그는 법무법인 YK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을 졸업한 뒤 지난해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서정화는 “어린 마음에 ‘국가대표가 안 되면 체육 선생님을 하면 되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당시에도 꿈은 올림픽에 나가 메달을 따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모님도, 나도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년 뒤 그는 다시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해 태극마크를 달았다. 이번엔 다행히 대표팀에서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는 걸 허락해줬다. 고교 졸업 후 대학은 운동과 학업을 같이 하는 게 당연한 미국으로 갔다. 서던캘리포니아대에서 동아시아 국제 관계를 전공한 그는 “대회에 나갈 때는 에세이 등을 과제로 대신 제출해야 했다”면서 “하지만 한편으로는 운동에만 매몰되지 않아 좋았다. 사람은 누구나 온-오프(on-off)가 있어야 하는데 내 경우엔 ‘온’이 운동이었다면 ‘오프’는 공부였다”고 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그는 두 차례 겨울올림픽에 출전했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선 21위를 했고, 2014년 소치 대회 땐 부상을 당한 여파로 24위를 했다. 그리고 그는 한국에서 열린 2018 평창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여자 모굴 사상 처음으로 결선 진출을 이뤄낸 뒤 14위로 대회를 마쳤다. 공중에서 두 바퀴를 돌아 720도 회전을 하는 ‘콕 7(CORK 7)’이 그의 주 기술이었다. 공부와의 끈을 놓지 않았기에 그는 은퇴 후 변호사가 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고민했던 스포츠 인권과 관련된 문제가 로스쿨을 선택한 계기가 됐다. 서정화 변호사는 “현재 일하고 있는 로펌에서 민사와 형사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건을 접하며 배우고 있다”며 “앞으로 어떤 분야를 전문으로 하든 스포츠 인권과 관련된 문제는 꾸준히 관심을 갖고 지켜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변호사 업무와 별개로 그는 현재 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 선수위원을 맡으며 시민단체인 스포츠인권연구소에서 활동하고 있다. 변호사로 일하면서 그는 운동을 시작한 후 거의 떨어져 지냈던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선수 생활을 할 때보다는 훨씬 시간과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운동도 꾸준히 한다. 일주일에 두세 번 피트니스센터에 가서 러닝과 근육 운동을 한다. 최근에는 동료 변호사와 함께 클라이밍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 마음의 고향은 스키 슬로프다. 은퇴 후에도 가끔 스키장에서 눈 위를 달렸던 그는 지난해부터 전국체전 시범종목으로 채택된 모굴 종목에 출전하고 있다. 결과는 작년과 올해 모두 일반부 금메달이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연세대 ‘독수리 5형제’가 한국 농구계를 지배하던 시절이 있었다. 최희암 감독이 이끌던 연세대는 1990년대 쟁쟁한 실업 선배들을 모두 제치고 전국 최강으로 군림했다. 서장훈, 문경은, 이상민, 김훈, 우지원 등 훈훈한 외모에 빼어난 실력을 갖춘 이들은 농구대잔치를 제패하며 당대 최고의 스포츠 스타 대접을 받았다. 조상현 LG 세이커스 감독(49)은 연세대 전성시대를 맛본 마지막 세대 중 한 명이다. 대전고를 졸업하고 1995년 쌍둥이 동생 조동현과 함께 연세대에 입단한 그는 신입생 시절부터 주전 슈터 자리를 꿰찼고, 1996~1997 농구대잔치에서 2년 선배 서장훈 등과 함께 연세대를 정상으로 이끌었다. 조 감독은 “당시 연세대는 말 그대로 스타 군단이었다. 하지만 나는 쟁쟁한 형들에 비하면 스타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연대 전성기의 끝물에 형들의 조금 덕을 좀 봤던 것 뿐”이라며 웃었다. 연세대 주포였던 조 감독도 스타인 건 분명하지만 그의 말처럼 서장훈, 문경은, 이상민 등 기라성같은 선배들의 그늘에 살짝 가려져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지도자가 돼서는 쟁쟁한 선배들도 해내지 못한 큰일을 해냈다. 5월 끝난 2024∼2025시즌 한국프로농구(KBL) 챔피언결정전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끈 것이다. 1997년 창단한 LG 농구단이 28년 만에 거둔 첫 우승이었다. 이 우승으로 조 감독은 프로에서 선수와 코치, 감독으로 모두 챔프전 우승을 이뤄낸 세 번째 농구인이 됐다. 그는 1999∼2000시즌엔 SK 선수로, 2015∼2016시즌엔 오리온 코치로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췄다. 그에 앞서 ‘선수, 코치, 감독 우승’을 모두 경험한 사람은 김승기 전 소노 감독(53)과 전희철 SK 감독(52) 등 두 명밖에 없다. 첫 우승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런데 아무리 그런 점을 감안해도 그는 이례적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 경기 후 코트 위에서 굵은 눈물을 쏟아냈고, 이후 라커룸에서 들어가서도 선수들과 함께 울었다. 혼자 감독실에 들어와서도 남은 눈물을 흘렸다. 대체 무엇이 그를 그렇게 울게 했을까. 조 감독의 지난 시즌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았다. 앞서 지난 2년 연속 4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고도 챔프전에 오르지 못했던 LG는 지난 시즌을 앞두고 8명의 선수를 물갈이하는 대대적인 체질 개선에 돌입했다. 하지만 시즌 시즌과 함께 구상이 어그러졌다. 기대했던 주전 선수들의 부상과 부진 속에 팀이 8연패의 늪에 빠진 것이다. 조 감독은 “비시즌 때 내 결정이 잘못된 게 아닐까 스스로 의심이 들었다”라며 “하지만 연패를 당하는 와중에도 경기 운영 자체가 나쁘지는 않다고 느꼈다. 외국인 선수와 타마요 등이 살아나면 얼마든지 반등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했다. LG는 거짓말처럼 반등했다. 외국인 선수들이 돌아왔고 양준석, 유기상 등 젊은 피들이 기대 이상으로 분전하면서 정규리그를 2위로 마쳤다. 동생 조동현 감독이 지휘하던 현대모비스와의 4강 플레이오프도 3전 전승으로 돌파했다. 하지만 그토록 기다리던 챔프전 무대를 밟았지만 더 큰 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SK와 치른 7전 4승제의 챔프전에서 처음 3경기를 이겼지만 이후 내리 3경기를 내주며 사상 첫 리버스 스윕의 위기에 빠진 것. 분위기가 완전히 넘어가며 대기록의 희생양이 되는 흐름이었다. 하지만 LG는 운명의 7차전에서 결국 승리하며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었다. 조 감독은 “7차전을 하루 앞두고 간단히 훈련을 했는데 선수들 표정이 너무 밝았다. 긴장하고 고민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라며 “우리 젊은 선수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회복력이 빠르더라. 우리 팀의 미래는 이 선수들에게 달려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현재 분위기를 잘 유지해간다면 LG는 언제든 우승을 노려볼 수 있는 강팀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승은 하늘이 점지한다’는 말이 있다. 우승을 위해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딱딱 맞아떨어져 줘야 한다. 조 감독은 “개인적으로 인복이 많은 것 같다. 농구를 시작한 후부터 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지난 시즌 우승의 경우엔 선수들 및 코칭스태프, 그리고 응원해주신 팬들께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조 감독은 특히 현재 예능인으로 팔방미인처럼 활동하고 있는 서장훈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는 “선수 때도, 코치를 할 때도 (서)장훈이 형이 격려를 많이 해 주셨다. ‘운동은 즐기는 게 아니라’는 가치관도 비슷하다”라며 “올해 플레이오프 때도 만나서, 또 전화로 여러 좋은 말씀과 조언을 해 주셨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한 명일 텐데 세심하게 신경 써 주는 게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연세대 시절 그의 스승이던 최희암 고려용접봉 부회장도 시즌 내내 그에게 틈날 때마다 조언을 건넸다. 그가 또 누구보다 감사하게 생각하는 존재는 애완견 ‘조던(3)’이다. 조 감독 가족은 3년 전 코카 스패니얼 종 유기견의 새끼를 분양받았다. 미국프로농구(NBA)에서 ‘농구 황제’로 군림했던 마이클 조던의 이름을 땄다.연고지인 경남 창원에 주로 머무는 조 감독은 서울 집에 올라올 때만 조던을 만난다. 조 감독은 “마치 아들 같다. (조)던이와 함께 있는 시간만큼은 스트레스 제로다. 이긴 날이건 진 날이건 언제든 반겨준다. 삶의 원동력같은 존재다”라고 했다. 긴 시즌을 끝낸 후 조 감독은 조던과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경기 파주나 양주 등 강아지 운동장이 있는 곳에 조던을 데리고 가 함께 놀았다. 강아지 출입이 가능한 펜션으로 여행도 다녀왔다. 뜨거운 날씨를 피해 저녁에는 서울 남산으로, 월드컵 공원으로 산책도 다녔다. 조 감독은 “조던이 우리 집에 온 후 내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예전 비시즌에는 술 약속, 저녁 약속을 많이 잡았다. 하지만 요즘은 조던과 함께 하기 위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며 웃었다. 그는 “유기견이라서 그런지 사람을 무서워하고 다른 강아지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편”이라며 “그래서 더욱 함께 함께 있어 주려고 한다”라고 했다.조 감독의 또 다른 스트레스 해소법은 운동이다. 은퇴 후에도 몸 관리를 게을리하지 않는 조 감독은 시즌 때는 오전 6시 전에 일어나 두 시간가량 운동을 한 후 체육관으로 출근한다. 자전거 등 유산소 운동 1시간, 근력 운동을 1시간 한다. 조 감독은 “하루 24시간 중 두 시간은 내 몸에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몸에 좋지도 않은 술은 몇 시간이고 앉아서 마시지 않나. 운동할 시간이 없다는 말은 핑계인 것 같다”고 했다. 선수 시절부터 ‘바른 생활’ 사나이였던 그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지도자로서도 성공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짧은 휴식기가 끝나고 LG는 21일부터 다시 팀 훈련을 시작했다. 조 감독은 “코트에 있는 게 가장 즐겁지만 감독이란 자리 또한 영원할 수 없다. 하지만 팀을 맡고 있는 한은 착실히 잘 준비해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며 “어디에 있건 농구 발전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먼 미래에는 유소년들을 지도하는 꿈을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스트레스는 프로스포츠 감독의 숙명이다. 경기에서 지는 날은 당연히 스트레스가 크다. 이긴 날도 강도만 덜할 뿐 스트레스가 작지 않다. 지난 시즌 조상현 프로농구 LG 감독(49)도 예외가 아니었다. 의욕적으로 2024∼2025시즌을 시작했지만 팀은 시즌 초반 8연패의 늪에 빠졌다. 양준석, 유기상 등 젊은 피의 분전으로 반전에 성공해 챔피언결정전 무대를 밟았지만 더 큰 스트레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SK와 치른 7전 4승제의 챔프전에서 처음 3경기를 이겼지만 이후 내리 3경기를 내주며 사상 첫 리버스 스윕의 위기에 빠졌다. 결과는 해피엔딩이었다. LG는 최종 7차전에서 승리하며 1997년 창단 후 28년 만에 첫 우승을 거뒀다. 조 감독은 경기 후 코트 위에서 굵은 눈물을 쏟아냈다. 이후 라커룸에 들어가서도 울었고, 혼자 남은 감독실에서도 울었다. 기쁨의 눈물인 동시에 그간의 마음고생을 씻어내는 눈물이었다. 스트레스로 가득한 승부의 세계에서 조 감독이 키우는 반려견 ‘조던(3)’은 큰 위안이 됐다. 조던은 코커스패니얼종 유기견의 새끼 중 한 마리였다. 미국프로농구(NBA)에서 ‘농구 황제’로 군림했던 마이클 조던의 이름을 땄다. 연고지인 경남 창원에 주로 머무는 조 감독은 서울 집에 올라올 때만 조던을 만난다. 조 감독은 “마치 아들 같다. (조)던이와 함께 있는 시간만큼은 스트레스 제로다. 이긴 날이건 진 날이건 언제든 반겨준다. 삶의 원동력 같은 존재다”라고 했다. 긴 시즌을 끝낸 후 조 감독은 조던과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경기 파주나 양주 등 강아지 운동장이 있는 곳에 조던을 데리고 가 함께 놀았다. 강아지 출입이 가능한 펜션으로 여행도 다녀왔다. 뜨거운 날씨를 피해 저녁에는 서울 남산으로, 월드컵공원으로 산책도 다녔다. 조 감독은 “조던이 우리 집에 온 후 내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예전 비시즌에는 술 약속, 저녁 약속을 많이 잡았다. 하지만 요즘은 조던과 함께하기 위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며 웃었다. 그는 “유기견이라서 그런지 사람을 무서워하고 다른 강아지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편”이라며 “그래서 더욱 함께 있어 주려고 한다”고 했다. 조 감독의 또 다른 스트레스 해소법은 운동이다. 은퇴 후에도 몸 관리를 게을리하지 않는 조 감독은 시즌 때는 오전 6시 전에 일어나 두 시간가량 운동을 한 후 체육관으로 출근한다. 자전거 등 유산소 운동 1시간, 근력 운동을 1시간 한다. 조 감독은 “하루 24시간 중 두 시간은 내 몸에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몸에 좋지도 않은 술은 몇 시간이고 앉아서 마시지 않나. 운동할 시간이 없다는 말은 핑계인 것 같다”고 했다. 선수 시절부터 ‘바른 생활’ 사나이였던 그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지도자로서도 성공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그는 선수, 코치, 지도자로 모두 챔프전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세 번째 인물이다. 조 감독은 “코트에 있는 게 가장 즐겁지만 감독이란 자리 또한 영원할 수 없다”며 “어디에 있건 농구 발전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먼 미래에는 유소년들을 지도하는 꿈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한국 경마 역대 최다인 1539승, 대상 경주(일반 경주보다 높은 수준의 경주) 71승, 순위 상금 906억 원.한국 경마계의 ‘살아있는 전설’ 김영관 조교사(65)가 21년간 거둔 성적이다. 김 조교사의 또 다른 별명은 ‘현대판 백락(伯樂)’이다. 춘추전국시대 때 천리마를 한눈에 알아본 백락처럼 수많은 명마를 찾아내 최고의 말로 키워내서다. 김 조교사는 후배들이 감히 깰 엄두도 내지 못하는 각종 기록을 세운 뒤 6월 말로 은퇴했다. 2004년 조교사로 입문해 21년간의 ‘즐거운 여정’을 마친 김 조교사를 17일 경남 김해 렛츠런파크 부산·경남에서 만났다.―21년간의 조교사 생활을 화려하게 마무리했다. 원래부터 이렇게 잘할 것이라 생각했나.“원래 기수로 시작했다. 그런데 몇 해 하다가 체중 조절도 힘들고 해서 잠시 사업 쪽으로 빠졌다. 하지만 결국 말을 잊지 못해 다시 마필관리사로 경마계로 돌아왔다. 이후 조교사가 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필기시험에 합격하면 실무에서 떨어지고, 실무를 통과하면 면접에서 낙방했다. 조교사가 되는 데 무려 15년이 걸렸다. 2004년 렛츠런파크 부산·경남이 새로 문을 열면서 막차로 조교사에 입문할 수 있었다.”경마에서 조교사는 마주(馬主)와 위탁관리 계약을 맺고 경주마의 훈련과 관리, 출전 경주 설계와 전략까지 총괄하는 자리다. 프로야구나 프로축구의 감독과 같은 역할을 한다. 전국의 목장을 돌아다니며 성장 가능성이 높은 경주마를 발굴하는 스카우트도 겸한다.―최고의 조교사라고 평가받는 요즘을 감안하면 시작은 미약한 편이었다.“조교사가 됐을 때 나이가 40대 중반이었다. 당시 목표는 최고가 되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었다. 무한경쟁 체제였기에 자칫 성적을 내지 못하면 도태될 처지였다. 제발 대상 경주에서 단 한 번이라도 우승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은 경기 안양에 있는데 혼자 김해로 내려와 마방(馬房)에서 말들과 함께 먹고 자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 당시 마방의 흙먼지와 풀 먼지를 너무 많이 들이마셔 지금도 폐가 좋지 않다.”경마 기수-관리사-조교사 50년지난달 은퇴 ‘즐거운여정’ 마쳐마방에서 먹고 자며 명마 길러내대상경주 71승, 순위상금 906억원관리와 관심이 ‘천리마’ 만들어내향후 인생도 경마에 도움 됐으면―살아남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많이 했다던데….“다른 사람들이 기본적인 건초를 먹일 때 나는 미국, 호주 등을 돌며 최고의 사료를 수입해서 먹였다. 지구력 증강제, 성격 완화제, 인대 강화제 등이 모두 포함된 사료였다. 우리 마방만의 편자도 개발했다. 하지만 말이라는 게 잘 먹이고 잘 훈련시킨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최고의 말이 되려면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한다.”―예를 들자면 어떤 것인가.“마방에서 먹고 자면서 말들을 유심히 관찰할 수 있었다. 겨울철이 되니 잘 먹은 말이 에너지를 달리는 데 쓰지 않고 털을 기르는 데 쓰더라. 추우니까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이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말들에게 따뜻한 옷을 입혔다. 여름철에는 모기, 파리 때문에 잠을 못 잤다. 나도 같이 모기에게 물리면서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얇은 옷을 만들었다. 어린 말들은 3세 정도부터 힘이 차면서 명마가 된다. 그런데 워낙 혈기가 왕성하다 보니 마방을 들이받거나 하는 등의 사고가 많이 난다. 말이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조교사로서의 첫 우승을 ‘루나’라는 말로 이뤄냈다.“루나가 있었기에 오늘의 나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루나는 선천적 장애가 있는 말이었다. 오른쪽 뒷다리를 질질 끌고 다녔다. 우리 마방 식구들이 뒷다리에 붕대를 감아 훈련을 시켰다. 소화 능력도 좋지 않아 숙성된 건초를 골라 먹여야 했다. 다른 사람 눈에는 일명 ‘똥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마방 식구들은 루나를 애지중지 아꼈다. 심장이 컸고,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 루나가 개장 경기에서 1등을 했고, 2005년 11월 내게 대상 경주 첫 우승을 안겨줬다. 젊은 시절 보잘것없던 내 모습이 투영돼 루나에게 더 애정을 쏟았던 것 같다.”장애마로 태어난 루나는 마주들에게 외면당해 겨우 960만 원에 주인을 찾았다. 하지만 김 조교사의 헌신적인 보살핌과 체계적인 훈련 속에 13승을 달성하며 몸값의 74배를 벌었다. 2011년 개봉한 영화 ‘챔프’는 루나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제작됐다.―루나의 성공 이후 미스터파크, 파워블레이드, 트리플나인, 즐거운여정 등 명마들을 줄줄이 키워냈다.‘미스터파크’는 한국 경주마 최다 연승인 17연승 기록을 갖고 있다. ‘미스터파크’ 역시 초기에는 마주들에게 외면받던 말이었으나 김 조교사의 관리 속에 전설적인 명마로 재탄생했다. ‘파워블레이드’는 한국 최초의 통합 삼관마다. 최고 권위의 대통령배 4연패에 성공한 ‘트리플나인’은 한국 말로는 최초로 두바이 월드컵 결승전 무대를 밟았다. ‘즐거운여정’은 지난해 동아일보배 대상 경주를 비롯해 통산 9개의 대상 경주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하지 않나. 우승도 해본 말이 한다. 또 우승마를 키워 본 사람이 우승마를 또 배출한다. 좋은 성적이 나니까 마주분들이 더 좋은 말에 투자해서 맡겨 주시곤 했다. 2010년대 후반에 ‘뉴레전드’란 말이 있었다. 경매 입찰 때 마주분께 ‘이 말은 회장님을 위한 말입니다. 앞으로 대통령배에서 우승할 말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당시 역대 최고가인 2억9660만 원에 낙찰받았다. 뉴레전드는 2019년 대통령배에서 우승했다.”―말 관상가로 유명한데 좋은 말을 감별하는 특별한 비결이 있나.“조교사가 된 후 주로 김해에 머물렀고, 집은 안양에 있는데 사실 동네 지리를 잘 모른다. 하지만 제주도는 골목골목을 머릿속에 외우고 있다. 20년간 2주에 한 번씩 말을 보러 제주 곳곳을 다녔기 때문이다. 제주에서는 해마다 1000~1200마리의 말들이 태어난다. 제주에 갈 때마다 주요 목장을 돌며 새끼 때부터 유심히 관찰하고 기록했다. 말들이 2개월, 3개월, 6개월, 1년 동안 어떻게 커 가는지 지켜보는 것이다. 혈통도 물론 중요하다. 좋은 말에서 좋은 새끼가 태어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사람도 형제마다 능력이 별개이듯 말들도 마찬가지다. 명마의 새끼들을 어릴 때부터 꾸준히 관찰하다 보면 가능성이 큰 말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백락처럼 한눈에 척 보면 천리마를 알아보는 능력은 아니라는 건가.“몇 해 전부터 사람들이 나를 백락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백락이 누군지도 잘 몰랐다. 처음 조교사가 되었을 때 생존 자체를 걱정하던 내가 최다승 조교사가 된 건 꾸준함과 관리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사실 말을 보는 요령은 책에도 자세히 나와 있다. 그런데 정말 주의 깊게 관심을 갖고 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건 천지 차이다. 정말 열심히 보다 보면 남들 눈에 안 보이는 게 보인다. 흔히 명마라고 평가받는 말들도 내 눈에는 발걸음이 둔탁하고 무거워 보일 때가 있었다.”―말을 볼 때 어떤 부분을 유심히 보나.“혼자만의 착각일 수 있겠지만 말을 뚫어져라 보고 있으면 말의 내부가 보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말의 심장이 뛰는 게 눈에 보이는 것이다. 루나가 그랬다. 루나를 보고 있으면 거대한 심장이 용솟음치듯이 펌프질하는 게 느껴졌다. 1970년대에 한 해에만 25전 전승 기록을 세운 ‘에이원’이라는 명마가 있었다. 에이원은 심장이 큰 걸로 유명했는데 루나의 심장도 그렇게 크게 보였다. 말의 성격도 중요하다. 경주를 앞두고 긴장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대범하게 무리의 우위에 서는 말도 있다. 그런 모든 부분을 종합해서 말을 고른다.”―남다른 승부욕을 갖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20년 가까이 다승왕을 했고, 거의 매년 50승 이상씩을 거뒀다. 하지만 2등이나 3등을 한 날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왜 졌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복기했다. 경주 하이라이트를 돌려 보고, 말이 경주에 나가기 전에 했던 모든 동작과 식사 메뉴, 루틴들을 새로 점검했다. 그렇게 절실하게 노력해서 다음 경기에 임했다. 한 번은 매번 1등을 하던 말이 갑자기 부진에 빠진 적이 있었다. 검은 눈동자를 유심히 보니 끈적한 눈물이 흐르고 있더라. 계속된 레이스에 피로하다는 의미였다. 며칠을 쉬게 하면서 잘 먹였더니 다시 눈동자가 말똥말똥해졌다.1000m 경주 때 말이 몇 발자국을 뛰는 줄 아나? 아직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을 못 봤다. 150발자국을 뛴다. 1800m 장거리 때는 270발자국 전후다. 말이 그 발자국 수를 최고의 컨디션으로 뛰도록 하는 게 내가 해온 일이다.”―향후엔 어떤 인생을 계획하고 있나.“기수로 시작해 마필관리사, 조교사에 이르기까지 50년을 말과 함께 살았다. 처음 조교사가 됐을 때 ‘루나’를 만났고, 은퇴를 앞둔 몇 년간은 ‘즐거운여정’과 함께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던 조교사이던 내가 21년간의 즐거운 여정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나를 믿어 주신 마주분들, 훈련시킨 말을 타 준 기수분들, 옆에서 함께해 준 마방 식구들이 있었다. 일단은 치열한 승부의 세계에서 잠시 벗어나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생각이다. 그래도 말과 함께해 온 인생처럼 앞으로도 말과 같이 호흡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싶다. 어떤 일이든 조금이나마 한국 경마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김영관 조교사(65)△전남 무안 출생△2004년 3월 조교사 데뷔△통산 전적 7054전 1539승(1위)△대상 경주 우승 71회△최우수 조교사 13회△2022년 영예조교사 선정△대표 말: 루나, 미스터파크, 파워블레이드, 트리플나인, 즐거운여정 등김해=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조호성 서울시청 사이클팀 감독(51)은 한국 자전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조호성은 올림픽 메달에 가장 근접했던 ‘사이클 황제’였다. 한국 선수 중 올림픽 시상대에 선 선수가 한 명도 나오지 않은 가운데 그는 한국 올림픽 역대 최고 성적인 4위를 기록했다. 다만 아쉬운 4위였다. 조호성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포인트레이스(250m 트랙을 160바퀴를 돌고, 10km마다 순위를 매겨 총점으로 승자를 가리는 경주)에서 158바퀴를 돌 때까지 3위였다. 두 바퀴만 더 순위를 유지했으면 메달을 딸 수 있었으나 두 바퀴를 남기고 1점 차로 역전당했다. 조호성은 “올림픽에 오기 3주 전에 이탈리아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경쟁자들을 모두 제치고 월등하게 1등을 했다. 마음은 이미 포디움 위에 있었다”라며 “너무 설레어서 경기 전날 잠을 못 잤다. 돌이켜보면 자만심이 화를 부른 게 아닐까 싶다”라고 말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매디슨에서 금메달을 딴 뒤 그는 경륜으로 전향했다. 아마추어 시절 중장거리 선수였던 그는 단거리를 달리는 경륜에서도 곧바로 ‘경륜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를 오랫동안 지도한 정태윤 전 대표팀 감독의 말에 따르면 “조호성은 특별하다 못해 특이한 선수”였다. 사이클과 경륜은 쓰는 근육이 다르다. 단시간에 폭발적인 힘을 내야하는 경륜 선수로서 급선무는 몸을 키우는 것이었다. 66kg이었던 몸무게를 86kg으로 만들기 위해 그는 죽을 힘을 다했다. 조호성은 “체중을 불리는 게 가장 힘들었다. 경륜 입문 후 매일 밤 고열량의 스테이크를 먹고 보충제를 먹었다. 그래도 살이 쉽게 찌지 않았다”마려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새벽엔 알람을 맞춰 놓고 일어났다. 그렇게 6개월을 지내고서야 서서히 체중이 늘었다. 그때부터 경기력이 좋아지면서 자신감도 생겼다”라고 했다. 경륜 선수 생활은 화려했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년 연속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했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는 4년 연속 상금왕에도 올랐다. 당시 최다이던 47연승 기록도 세웠다. 약 4년 6개월 동안의 경륜 선수 생활 동안 그는 겉에서 보기엔 한 마리 우아한 백조 같았다. 하지만 내면적으로 그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돈이 걸린 경륜이라는 종목 특성상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었다. 조호성은 “성적도 좋았고, 돈도 많이 벌었지만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다. 일요일 마지막 경주 같은 때에는 30억 원이 넘은 돈이 걸리기도 했다”며 “그런데 베팅액의 대부분이 내게 걸려 있었다. 무조건 1등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타는 게 쉽지 않았다”라고 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원형탈모가 왔다. 한두 군데가 아니라 7, 8 군데 머리가 빠졌다. 그는 “베팅에 실패한 분이 집으로 찾아오는 날도 있었다. ‘세상이 이런 욕이 다 있구나’ 싶을 정도로 다양하고 많은 욕을 먹기도 했다”라며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다시 아마추어로 돌아간 뒤 원형탈모도 씻을 듯이 나았다”고 했다. 그가 다시 아마추어로 돌아온 가장 큰 이유는 못다 이룬 올림픽 메달의 꿈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느덧 그도 30대 중반을 향해 가고 있었다. 조호성은 “나이는 30대 중반이었지만 20대와 같은 열정이 있었다. 만약 국내 팀에서 자리가 없다면 해외로 나가서 도전할 생각이었다”라고 했다. 다행히 서울시청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거리를 달리기 위해선 다시 살을 빼야 했다. 눈물겨운 살 빼기가 시작됐다. 식단조절과 유산소, 필라테스를 병행하며 몇 개월 만에 약 20kg를 감량했다. 하지만 20대 초반 몸무게이던 65kg까지는 3kg이 모자랐다. 그는 “아마추어로 돌아온 후 최소한의 열량으로 버티며 살을 뺐다. 칼로리를 가능한 한 적게 섭취하면서 운동량은 최대한 많이 가져갔다. 살 빼기도 쉽지 않지만 찌우는 것에 비하면 훨씬 할 만했다”라며 웃었다. 그는 사이클의 본고장인 프랑스에 가서 1년간 개인 훈련을 하면서 점점 기량을 회복했다. 그가 결정적으로 재기에 성공한 대회는 2009년 사상 처음으로 서울 도심에서 열린 2009 투르 드 서울 국제사이클대회였다. 서울 광화문광장을 출발해 다시 광화문 동아일보사로 골인하는 100.5km 레이스에서 조호성은 2시간17분5초로 2위 디르크 뮐러(36·독일)를 2초 차로 따돌리고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비바람이 부는 악천후 속에서 조호성은 결승선 1km 남겨두고 막판 스퍼트를 해 짜릿한 역전 우승을 일궈냈다. 조호성은 “아마추어로 복귀한 뒤 가진 첫 국제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다시 자신감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대회가 있었기에 향후 5년간 더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끝내 올림픽 메달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후배들과 함께 팀 추월 금메달을 합작했지만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메달과는 더욱 멀어졌다. 그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쳤다. 조호성은 “열정은 여전했지만 세월의 무게를 거스를 순 없었다. 여전히 하루에 300km를 타는 건 괜찮았다. 하지만 20대 때는 하루 자고 일어나면 회복이 됐지만 40세가 되니 더이상 되지 않더라”라고 말했다. 은퇴 후 지도자로 변신한 그는 현재 서울시청 감독을 맡고 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과 2021년 도쿄 올림픽 때는 지도자로 올림픽 무대를 밟았다. 올해부터는 대한사이클연맹 전무로 선임돼 행정가의 일도 겸하고 있다. 요즘도 그의 머리 속은 자전거 생각 뿐이다. 언젠가는 올림픽 시상대 위에 선 한국 선수를 배출하는 게 목표이자 꿈이다. 조호성은 “한강 자전거 도로 등을 보면 사이클을 즐기는 인구가 정말 많다. 하지만 자전거 인기에 비해 올림픽 메달이 없다는 게 아쉽다. 올림픽 메달이 없다 보니 그때마다 1점 차로 메달을 놓친 내 이름이 소환된다. 언젠가 좋은 후배가 나와 나를 그 굴레에서 꺼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도자 겸 행정가로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는 현역 때 못지않은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선수들에게 배 나온 지도자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다. 봄에서 가을까지는 러닝이나 자전거를 탄다. 주말에는 8시간 안팎의 등산을 간다. 그는 “걷거나 뛸 때 생각이 많이 정리된다. 행정가 일을 맡은 요즘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더 운동을 하려 한다”고 했다. 한국 최고의 사이클 선수로 활동하면서 그는 많은 나라를 다녔다. 훈련과 대회 참가를 위해 가 본 나라만 50여 개국이나 된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나라는 세계 최고의 도로 사이클 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를 개최하는 프랑스다. 그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오랫동안 프랑스에 머물려 훈련을 했고, 다시 아마추어에 복귀한 2000년대 말에도 프랑스에서 1년 동안 훈련을 했다. 조호성은 “사이클의 천국인 프랑스에서는 곳곳에서 하루에 50개의 레이스가 열린다. 대회 수준이나 상금에 따라 내가 원하는 대회를 나가면 된다”고 했다. 향후 그의 꿈은 그가 다녔던 나라들 중 정말 좋았던 10여 개 나라에서 ‘한 달 살기’를 해보는 것이다. 조호성은 “선수나 지도자를 할 때는 호텔과 경기장 주변만 다녔다. 선수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 여유있게 살아보는 게 버킷리스트”라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세계 최고 권위의 도로 사이클 대회 ‘투르 드 프랑스’가 5일(현지 시간) 개막했다. 올해로 112회째를 맞은 투르 드 프랑스에 출전한 한국 선수는 아직 없다. 가장 근접했던 사람을 꼽으라면 ‘사이클 황제’ 조호성 서울시청 감독(51)을 들 수 있다. 올림픽도 마찬가지다. 한국 사이클 선수 가운데 올림픽 시상대 위에 선 사람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역대 최고 성적은 조호성이 2000년 시드니 올림픽 포인트레이스에서 기록한 4위다. 포인트레이스는 250m 트랙을 160바퀴 돌며, 10km마다 순위를 매겨 총점으로 승자를 가리는 경주다. 158바퀴를 돌 때까지 3위였던 그는 두 바퀴를 남기고 1점 차로 역전당해 올림픽 메달을 놓쳤다. 메달은 못 땄지만 그를 지도한 정태윤 감독의 말에 따르면 조호성은 “특별하다 못해 특이한 선수”였다. 그는 이후 단거리를 달리는 경륜으로 전향해 곧바로 ‘경륜 황제’가 됐다. 상금왕을 4차례 차지했고, 그랑프리 우승도 3번이나 했다. 당시 최다이던 47연승 기록도 세웠다. 육상으로 치면 마라톤 선수가 100m로 전향해 최고가 된 것에 견줄 수 있다. 조호성은 “체중을 불리는 게 정말 힘들었다. 큰 근육을 키우기 위해 매일 밤 고열량의 스테이크를 먹었다. 새벽엔 알람을 맞춰 놓고 일어나 단백질을 보충했다”고 했다.‘경륜 황제’의 삶은 화려했다. 달릴 때마다 우승했고, 우승할 때마다 큰 상금을 벌었다. 하지만 정신은 점점 피폐해졌다. 조호성은 “돈이 걸려 있다 보니 스트레스가 심했다. 베팅에 실패한 분이 집으로 찾아오는 날도 있었다. ‘세상이 이런 욕이 다 있구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욕을 먹었다”고 했다. 2009년 그는 스스로 황제 자리에서 내려와 아마추어 사이클로 돌아왔다. 못다 이룬 올림픽 메달의 꿈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살을 빼야 했다. 식단 조절과 유산소, 필라테스를 병행하며 몇 개월 만에 약 20kg을 감량했다. 조호성은 “칼로리를 최소한 섭취하고 많은 훈련량을 가져갔다. 살 빼기도 쉽지 않지만 찌우는 것에 비하면 훨씬 할 만했다”며 웃었다. 2012 런던 올림픽과 2014 인천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친 그는 현재 서울시청 감독을 맡고 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과 2021년 도쿄 올림픽 때는 지도자로 올림픽 무대를 밟았다. 올해부터는 대한사이클연맹 전무로 선임돼 행정가의 일도 겸하고 있다. 바쁜 와중에도 운동은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선수들에게 배 나온 지도자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다. 봄에서 가을까지는 러닝을 하거나 자전거를 탄다. 주말에는 8시간 안팎의 등산을 간다. 그는 “걷거나 뛸 때 생각이 많이 정리된다. 행정가 일을 맡은 요즘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더 운동을 하려 한다”고 했다. 자나 깨나 그의 머릿속은 자전거 생각뿐이다. 언젠가는 올림픽 시상대 위에 선 한국 선수를 배출하는 게 목표이자 꿈이다. 조호성은 “한국은 자전거가 인기 있는 나라다. 하지만 올림픽 메달이 없다 보니 그때마다 1점 차로 메달을 놓친 내 이름이 소환되곤 한다. 좋은 후배가 나와 나를 그 굴레에서 꺼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스마일 퀸’ 김하늘(37)은 현역 시절 ‘삼촌 팬’들을 몰고 다닌 인기 골퍼였다. 별명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는 필드 안팎에서 항상 환한 미소를 짓고 다녔다. 김하늘은 “어릴 때부터 ‘한국의 로리 케인이 돼라’는 말을 아빠한테 듣고 자랐다. 케인은 성적과 관계없이 항상 웃으며 주변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하던 선수였다”라며 “골프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봐야 달라지는 것도 없더라”라며 웃었다.주니어 시절부터 그는 성적이 좋든, 그렇지 않든 많이 웃고 다녔다. 대회를 망친 날도 웃으면서 그린을 벗어났다. 그 모습을 보고 다른 학부모 중 한 명이 “하늘이는 오늘 잘 쳤나 보다”라고 말을 건넸다. 그는 “아뇨, 저 오늘 오버파 쳤어요”라고 쿨~하게 답했다. 김하늘은 “어릴 때부터 밝은 성격이었다. 좋지 않은 상황일수록 내가 웃으면 상대방은 더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며 “사실 그때는 자신감이 넘치던 시절이기도 했다. 중요한 퍼트를 못 넣어도, 한 대회를 망쳐도 다음 홀이나 다음번 대회에서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밝은 성격과 뛰어난 실력 덕분에 그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서 단숨에 톱스타가 됐다. 2011년 KLPGA투어 대상을 수상했고, 2011년과 2012년에는 2년 연속 상금왕도 차지했다. KLPGA투어에서 통산 8승을 거둔 뒤 2015년에는 일본 무대에 진출해 성공시대를 이어갔다. 2016년 메이저대회 리코컵에서 우승했고, 2017년 또 다른 메이저대회 살롱파스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2017년에만 3승을 거두는 등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투어에서 통산 6승을 올렸다. 2021년을 끝으로 은퇴한 김하늘은 요즘도 ‘스마일’ 가득한 인생을 살고 있다. 김하늘은 “틈틈이 일하면서 하고 싶었던 취미활동을 한다. 시간을 여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김하늘은 유튜버로 활동하며 각종 골프 행사나 강연 등을 다닌다. 가끔씩 방송에도 출연하고, 기업 초청 이벤트에 참가해 주말 골퍼들을 대상으로 일일 레슨을 하기도 한다. 강연이나 행사 때마다 그는 ‘멘털’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는다. 숨 막히는 우승 경쟁의 순간을 어떻게 이겨냈느냐 하는 것이다. 김하늘은 “따라가고 있는 상황에서는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언젠가 한 번은 기회가 온다는 마음으로 서두르지 않고 플레이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또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는 ‘내가 지금 도망가는 게 아니라 추격하고 있다’고 마음먹는다. 지켜야 하는 사람이 오히려 불안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결정적인 순간 1m 퍼팅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나 힘든 상황이다. 골프에서 1m 안팎의 짧은 퍼트를 놓쳐 경기를 놓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며 “내 경우에는 속으로 ‘이 퍼팅은 이미 내가 수천, 수만 번 성공했던 퍼팅이다’라는 말을 되뇌며 자신 있게 친다”고 했다. 김하늘이 은퇴한 지 4년이 지났지만 미소처럼 변하지 않은 게 있다. 선수 시절 못지않게 건강하고 탄탄한 몸이다. 김하늘의 일상은 운동으로 가득 차 있다. 직장인에 빗대 표현하면 주5일 운동하고, 주말 이틀을 쉰다. 김하늘은 “선수 생활을 할 때보다 요즘 운동을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선수 때는 운동이 싫었는데 요즘은 내가 찾아서 하는 하고 있다”며 웃었다. 선수 시절부터 해오던 필라테스와 퍼스널 트레이닝(PT)은 지금도 꾸준히 한다. 최근에는 척추 건강 및 코어 강화에 도움이 되는 자이로토닉(Gyrotonic)을 시작했다. 김하늘은 “PT는 통해서 큰 근육을 키운다면 필라테스는 속 근육과 신체 밸런스를 잡는 데 도움이 된다. 두 가지를 병행하면서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큰 부상이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하늘은 여기서 머물지 않고 최근에 자이로토닉을 추가했다. 그는 “자이로토닉은 기구를 이용해 척추 쪽 근육을 하나하나 세웠다가 눕히는 운동이다. 평소 잘 쓰지 않는 근육을 새롭게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그렇지만 뭐니 뭐니해도 요즘 그가 가장 빠져 있는 건 바로 러닝이다. 김하늘은 “원래 달리기를 싫어했다. 그런데 지난해 우연히 한 마라톤 대회에 나가게 됐다. 같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과 함께 달리면서 러닝의 재미에 눈을 뜨게 됐다”고 말했다. ‘러닝 마니아’가 된 그는 일주일에 3, 4회는 뜀박질을 한다. 월요일에는 러닝 크루와 함께 달리고, 함께 선수 생활을 했던 윤채영 등과도 달린다. 한 번 뛰면 10~15km 가량을 뛴다. 김하늘은 “원래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편이었다. 그런데 러닝을 시작한 뒤엔 오후 10시에 자서 오전 6시에 일어나는 사람이 됐다. 활력이 넘치고 건강해지는 걸 몸으로 느낀다”고 했다. 그는 “아침 일찍 뛰면서 보는 강물, 밝게 내리쬐는 햇살 등이 너무 좋다. 뛰는 시간만큼은 오로지 나일 수 있다는 게 달리기의 매력”이라고 했다. 윤채영, 이보미 등과 청계산이나 인왕산 등 서울 인근 산에도 오른다. 그는 “매일 뛰다가 지루해질 때쯤 등산을 해보니 색다른 세상이 펼쳐지더라”고 했다. 김하늘은 “은퇴 후 1년간 근육이 많이 빠졌다. 스스로 ‘일반인 다 됐네’라고 자조하곤 했다”며 “그런데 다시 꾸준히 운동하면서 지금은 현역 시절과 몸무게와 근육량이 똑같아졌다”며 웃었다.본업이었던 골프는 한 달에 한두 번 친다. 스코어에 크게 개의치 않는 ‘명랑 골프’다. 김하늘은 “골프 연습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라운드에서 4언더파를 쳤다”고 했다. “그 실력이면 다시 현역으로 복귀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잘 쳐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고 치니 공이 더 잘 맞는다. ‘제발 살아만 있어라’라는 기분으로 친다”며 웃었다. 선수 시절 그는 웃는 낯과는 달리 필드 위에선 ‘완벽주의자’에 가까웠다. 공이 제대로 뻗어 나가도 자신이 원했던 스위트 스폿에 맞지 않으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김하늘은 “프로 선수들도 한 라운드에서 14번 드라이버를 잡으면 마음에 드는 샷이 4, 5개 밖에 나오지 않는다. 지금은 잘 쳐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내려놓으니 골프가 더 재미 있어졌다”며 “현역 때는 페어웨이에 공을 집어넣어야 한다는 생각에 몸통 회전도 마음껏 하지 못했다. 요즘은 마음껏 허리를 돌리니까 스윙이 더 좋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아픔이나 구김살이 없을 것 같지만 김하늘도 선수 생활 말엽에는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2017년 일본에서 3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했지만 2018년 거짓말처럼 샷이 무너졌다. 김하늘은 “전혀 나답지 않게 불안장애가 왔다. 디펜딩 챔피언으로 출전하는 시합을 앞두고는 소화도 안 되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며 “2021년 은퇴할 때까지 힘들게 골프를 쳤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코로나19 유행하던 시기라 많은 대회가 열리지 않았다. 은퇴를 하고 났더니 그런 증상이 씻은 듯 사라졌다”고 했다. 그런 과정을 겪은 그이기에 여유가 넘치는 요즘이 더욱 즐겁고 행복하다. 김하늘은 “최선을 다했고, 후회 없는 선수 시절을 보냈다. 국내외에서 14번이나 우승한 것도 내겐 과분하다. 지금 치는 편한 골프처럼 앞으로의 인생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스마일 퀸’이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 김하늘(37)은 웃음이 많은 골프 선수였다. 잘할 때는 물론이고 잘 못 쳤을 때도 미소를 지었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서 8승, 일본여자골프(JLPGA)투어에서 6승을 거둔 뛰어난 실력에 밝고 유쾌한 성격을 갖춘 그는 많은 갤러리들을 몰고 다녔다. 김하늘은 “어릴 때부터 ‘한국의 로리 케인이 돼라’는 말을 아빠한테 듣고 자랐다. 케인은 성적과 관계없이 항상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하던 골퍼였다”며 “골프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봐야 달라지는 것도 없다. 내가 웃어서 상대방은 더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며 웃었다. 2021년을 끝으로 은퇴한 김하늘은 요즘도 ‘스마일’ 가득한 인생을 살고 있다. 김하늘은 “틈틈이 일하면서 하고 싶었던 취미 활동을 한다. 시간을 여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라고 말했다. 김하늘은 유튜버로 활동하며 각종 골프 행사나 강연 등을 다닌다. 방송에 얼굴을 비치기도 한다. 미소와 함께 달라지지 않은 게 또 하나 있다. 여전히 건강한 몸이다. 그의 일상은 운동으로 가득 차 있다. 김하늘은 “선수 생활을 할 때보다 지금 운동을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선수 때는 운동이 싫었는데 요즘은 내가 찾아서 하는 편”이라고 했다. 예전부터 해오던 필라테스와 퍼스널트레이닝(PT)은 지금도 꾸준히 한다. 최근에는 척추 건강 및 코어 강화에 도움이 되는 자이로토닉(Gyrotonic)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가 가장 빠져 있는 건 바로 러닝이다. 김하늘은 “원래 달리기를 싫어했다. 그런데 지난해 우연히 한 마라톤 대회에 나가서 같이 달리면서 러닝 재미에 푹 빠지게 됐다”며 “원래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편이었는데 러닝을 시작한 뒤엔 오후 10시에 자서 오전 6시에 일어나는 사람이 됐다. 활력이 넘치고 건강해지는 걸 몸으로 느낀다”고 했다. 주 3, 4회는 러닝을 한다는 그는 러닝 크루 활동과 별개로 함께 선수 생활을 했던 윤채영과 한강을 뛰곤 한다. 김하늘은 “아침 일찍 뛰면서 보는 강물, 밝게 내리쬐는 햇살 등이 너무 좋다. 뛰는 시간만큼은 오로지 나일 수 있다는 게 달리기의 매력”이라고 했다. 윤채영, 이보미 등과 종종 서울 인근 산에도 오른다는 그는 “은퇴 후 1년간 근육이 많이 빠졌다. 스스로 ‘일반인 다 됐네’라고 자조하곤 했다”며 “그런데 다시 꾸준히 운동하면서 지금은 현역 시절과 몸무게와 근육량이 똑같아졌다”며 웃었다. 본업이었던 골프는 한 달에 한두 번 친다. 스코어에 크게 개의치 않는 ‘명랑 골프’다. 김하늘은 “골프 연습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라운드에서 4언더파를 쳤다”고 했다. “그 실력이면 다시 현역으로 복귀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잘 쳐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고 치니 공이 더 잘 맞는다. ‘제발 살아만 있어라’라는 기분으로 친다. 주말 골퍼분들께도 추천하고 싶은 마음가짐”이라고 했다. 향후 계획에 대해 그는 “최선을 다했고, 후회 없는 선수 시절을 보냈다. 국내외에서 14번이나 우승한 것도 내겐 과분하다. 지금 치는 편한 골프처럼 앞으로의 인생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