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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2003년 국내 최초의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로 주목받으며 교향악단 명가로 떠올랐던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상임지휘자 겸 예술감독 임헌정)가 새해 상반기 일정을 잡지 못했다. 3월 15일 이대욱 지휘 ‘불멸의 클래식’ 시리즈 연주회, 4월 12일 불가리아 지휘자 에밀 타바코프 지휘 콘서트 등 4월까지 경기 부천시민회관 대공연장에서 예정된 4개 공연이 일정표에서 사라졌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부천시립예술단 측은 “부천시의회가 2013년도 예산 68억 원 중 6억 원을 삭감해 예정된 공연을 무대에 올릴 수 없다”고 말했다. 솔리스트 협연료, 객원지휘료, 객원연주료를 예산에 배정하지 않아 외부 지휘자, 외부 협연자는 물론이고 편성이 큰 작품에 외부 단원도 데려올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부천필과 시의회의 긴장은 2011년부터 시작됐다. 시의회가 임헌정 예술감독을 행정감사에 불러 “소외계층을 위한 나눔예술 활동이 부족하다”고 잔소리를 하면서부터다. 지난해 11월 행정감사에서는 김관수 의원(민주통합당)이 임 감독에 대해 가족(부인)이 부천필 단원인 점을 들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사직해야 한다”고 문병섭 문화예술과장에게 말하자 임 감독이 자신이 답변하게 해달라며 “상식적으로 일하세요”라고 말해 정회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 사건 한 달여 뒤 확정된 예산에 이 같은 갈등이 반영됐다는 시각이다. 김 의원은 9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예술감독이 객원지휘자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으며 나눔예술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등 객관적 운영이 되지 않고 있다. 예술감독이 직접 지휘하면 객원지휘료 등을 아낄 수 있지 않은가”라며 “추경을 통한 예산 배정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 감독은 “의회의 결정은 비상식적”이라며 악단이 객관적으로 운영되지 않고 있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행정권을 쥔 총감독이 아닌 예술감독을 감사에 불러 행정적 문제를 추궁하는 것부터 맞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부천시립예술단 관계자는 “나눔예술 활동은 정상적으로 이뤄졌고 정기연주회 일정 등과 중복되는 부분만 대상 기관의 양해를 얻어 취소 또는 순연했다”고 말했다. 양측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가장 피해를 보는 이는 예술 혜택의 대상이어야 할 부천시민들과 부천필의 팬들이다. 최소한 연주활동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여건을 조성한 뒤에 인식차를 좁혀야 하지 않을까. 그것만이 2000년대 초 ‘국내 3대 교향악단’ 중 하나로 불렸던 부천필이 명성을 유지하고 부천시의 명성에도 계속 기여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유윤종 선임기자 gustav@donga.com}

유윤종 선임기자가 꾸미는 ‘쫄깃 클래식感’ 칼럼을 매주 연재합니다. 며칠 내 공연장에서 감상하게 될 명곡의 탄생에 얽힌 뒷이야기, 날씨와 계절의 변화에 맞춰 만나보고 싶은 명선율, 국내외 아티스트들이 남긴 흥미로운 일화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할 예정입니다.5, 6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주빈 메타가 지휘하는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콘서트가 열렸습니다. ‘턱시도나 짙은 정장을 입고 오라’는 ‘드레스 코드’ 주문에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습니다. 주최 측의 의도는 연주가 시작되자 알 수 있었습니다. 최근 해외 악단의 내한 연주로는 드물게 우리 ‘애국가’와 이스라엘 국가 ‘하티크바’(히브리어로 희망)를 연주했거든요. 이들이 콘서트를 일종의 엄숙한 ‘의식’으로 간주한다는 점을 드러낸 셈입니다. 더욱 흥미를 자아낸 것은 하티크바의 선율이었습니다. 비장하면서도 다른 나라 국가들과는 사뭇 다른 이 선율을 여러 청중이 낯설게 느꼈습니다. 몇몇 청중은 “가요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예전 ‘바블껌’이라는 듀오가 부른 ‘비야 비야’라는 가요와도 닮았습니다. 사실 이 노래들과 비슷한 선율은 전 세계에 퍼져 있습니다. 17세기 이탈리아 테너 주세페 첸치는 ‘푸지 푸지(도망쳐 도망쳐)’라는 노래를 작곡해 부르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몇 년 사이에 이 노래는 유럽을 평정했고 스코틀랜드에서 우크라이나에 이르는 여러 나라가 이와 비슷한 ‘민요’를 갖게 됐습니다. 동아일보 편집국 뉴스룸은 국장·부장단 회의를 시작할 때마다 동요 ‘반짝 반짝 작은 별’ 선율로 이를 알립니다. 어느 날 무심코 이 선율을 듣다가 ‘어, 이것도 ‘푸지 푸지’와 비슷하네’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혀 근거 없는 생각은 아닌 듯합니다. ‘반짝 반짝 작은 별’을 주제로 한 모차르트의 ‘어머니께 말씀해 드리죠’ 변주곡 여덟 번째 변주는 이 주제를 단조로 옮긴 것입니다. 생각난 김에 CD를 찾아 들어 보았습니다. 기억한 대로 이 변주 역시 이스라엘 국가와 매우 닮아 있었습니다. 한 가지 더 귀띔해 드릴까요. KBS교향악단은 다음 달 22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프라하국립오페라단 음악감독인 레오스 스바로프스키 지휘로 ‘체코 음악의 아버지’ 스메타나의 대표작인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 전 6곡을 연주합니다. 여섯 곡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곡이 두 번째 곡 ‘몰다우 강’이죠. 이 곡에서 강물이 굽이치는 듯한 주선율을 기억하십니까. 이 선율 역시 ‘푸지 푸지’에서 온 것이라는 게 정설입니다.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대표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밈(meme)’이라는 개념을 창안한 바 있습니다. 우월한 유전자(gene)가 많은 자손을 남기듯, 우월한 의미(meaning)의 낱낱의 단위인 ‘밈’은 복제되고 전파되며 오랜 기간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설명입니다. 이를 적용해 본다면 17세기 출현한 ‘푸지 푸지’의 밈은 오늘날까지 복제되고 전파되며 수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덧붙여 제가 생각하기로는, 이 선율은 이후 장조로 모습을 바꾸어 ‘작은 별’ 노래가 되면서 영미권 어린이들이 알파벳을 배울 때마다 익혀야 하는, 한층 더 강력한 밈으로 변신한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했더니 벗 한 분이 ‘소리개가 빙빙 높이 떴구나(Fuchs, du hast die Gans gestohlen)·여우야, 거위를 훔쳤지’라는 독일 민요도 비슷한 선율 아니냐고 하시네요. 앗!※인터넷에서 ‘Fuggi Fuggi’ ‘Israeli national anthem’ ‘Moldau’ ‘Mozart Variations’ 등으로 검색하면 관련된 선율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꼭 기억하세요. 저작권이 확보된 음원으로 감상하시고, 마음에 드는 곡은 꼭 음원이나 음반을 구입하시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어릴 때 병원에 들어가면 처음 만나는 사람은 위인전 속 나이팅게일 같은 흰옷을 입은 ‘간호원 누나’였다. 주사의 공포감에 울면 미소 지으며 사탕을 건네기도 했다. 그 간호원 누나들은 1987년 의료법이 개정되면서 이듬해부터 ‘간호사’로 불리고 있다. ‘간호원’에 비전문적인, 비숙련직의 느낌이 들기 때문에 바꾸었다고 한다.선거 치르며 ‘언어 수위’ 높아져 간호사들의 업무가 전문적이며 고도의 숙련을 요한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의문이 남는다. 교사에 대학교수 등을 합친 개념이 ‘교원’이다. 그런데 ‘원(員)’이 ‘사(師)’보다 낮다면, 교사가 교수를 만났을 때 이들을 ‘교원들’이라고 부를 경우 교수나 교사보다 숙련도가 낮아지는 걸까. 어릴 때 택시를 타면 노란 정복에 흰 장갑을 낀 ‘운전수 아저씨’가 있었다. 지금은 ‘운전기사’가 되었다. 역시 ‘운전수’라는 단어가 비전문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식을 중심으로 ‘셰프’를 대체하고 있는 ‘숙수(熟手)’는 어떻게 되는 걸까. 끓이고 익히는 단순 업무만을 하는 사람인가. 직업명에 놈 자(者) 자가 들어가는 사람으로서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장애인들은 특정의 장애를 제외하면 다른 부분에서 비장애인들보다 우수한 자질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사회가 그들을 보호해야 함은 물론이다. 예전에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언어장애인 등을 부르는 말은 순우리말을 썼다. 이 말들이 비하적 표현이라고 해서 바꾼 것이다. 대부분 그 순우리말 자체에 비하적인 요소는 없는데도 그렇게 순우리말 몇 가지가 일상회화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새로 쓰는 말들을 언중(言衆)이 비하의 뜻을 담아 사용하게 된다면 그 말들은 또 바꾸어야 될 것이다. 이 같은 일들은 점차 약효가 강한 약들을 쓰게 되는 항생제 과잉투약 현상을 연상하게 한다. 쓰던 항생제가 듣지 않게 되면 다른 약으로 대체하고, 결국 최신의 항생제로도 듣지 않는 병원체가 만연하게 된다. 한두 사람이 조심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전국의, 전 세계의 환자들이 고단위 항생제를 아낌없이 투약할수록 항생제 위기는 커진다. 두 건의 큰 선거가 있었던 2012년, 우리 사회의 언어 수위는 유난히 높았다. 한쪽 진영의 공분을 산 언어는 반대쪽으로부터 더 격한 수위의 언어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반대 진영에 ‘구역질’ ‘창녀’ 등의 표현을 퍼부은 윤창중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수석대변인 임명에 대한 야당 측의 실망도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정치권과 이 사회가 뿌린 ‘거친 입’의 맨얼굴을 그에게만 투사하고 홀가분해할 수는 없다. “공산당 같다” “김일성의 아명(兒名)” “×물을 튀기는 잡탕” “기생충” “홍어×” “그×(여성을 뜻하는 비칭)”…. 양측 공식 대변인 라인을 비롯한 정치권 전반에서 선거 기간 안팎에 쏟아진 말들이다. 하물며 보통 사람들의 트위터와 페이스북, 각종 인터넷 게시판은 말할 것도 없다.이젠 거칠었던 표현들 순화시킬 때 이제 선거는 지나갔다. 표현의 강도가 높아진 언어들을 ‘쿨다운(냉각)’할 시간이다. 새로 출범할 정부에 걱정되는 징후가 발견되면 적확하고 투명한 언어로 지적해 주면 된다. 마침 한 해의 마지막 달력도 그 수명을 다하고 있다. 우리 누구나 한 해 동안 주변에, 이웃에, 동료에게 크고 작은 말의 폭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우리 전래 설화를 각색한 웹툰 ‘신과 함께’에는 ‘발설(拔舌)지옥’이 등장한다. 사람은 저승에 가서 입으로 행한 죄로 인해 혀를 뽑히고, 소가 그 혀를 갈아 밭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 설화를 만들어낼 만큼 말의 폭력을 경계했던 조상들의 정신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한 해 동안의 ‘과잉언어’를 새하얗게까지는 아니라도 쓸어내고, 정확하고 합리적인 언어가 더 많은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음을 확신하는 새해가 되기를.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이번 주 음악 애호가들의 최대 화제는 지휘명장 마리스 얀손스가 지휘하는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내한공연이었다. 베토벤의 교향곡 네 곡으로 꾸민 20, 21일 연주는 “밝고 유려하고 따스한, 모든 파트가 생생하게 살아 숨쉰”(음악 칼럼니스트 황장원) 연주였다는 호평을 받았다. 다양한 감상기를 읽으며 베토벤 교향곡들의 남다른 생성사가 떠올랐다.베토벤 ‘합창’서 인류의 하나됨 강조 20일 공연한 교향곡 3번 ‘영웅’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헌정할 목적으로 작곡했다는 일화가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했다는 말을 들은 베토벤은 분노하며 헌정사를 적은 표지를 찢어버렸다는 것이다. 그 설의 진위는 분명치 않지만 베토벤이 청년기에 ‘라인 강 서쪽’ 프랑스에서 불어오던 개혁의 바람에 깊이 공감했다는 데는 대부분의 전기 작가가 동의하고 있다. 21일 연주된 교향곡 7번은 ‘영웅’으로부터 8년 뒤 발표됐다. 이 곡의 초연 기록은 읽는 사람의 눈을 크게 뜨게 만든다. 살리에리, 후멜, 마이어베어, 슈포어, 줄리아니, 드라고네티 등 쟁쟁한 작곡가들이 6명이나 단원으로 연주에 참여했다. 이유가 뭘까. 그것은 이 콘서트가 대(對)프랑스 전쟁 상이용사들의 보훈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오스트리아의 국가적 이벤트였던 데 있다. 반(反)프랑스의 기치를 드높인 이 행사의 주역이 바로 베토벤이었다. 친(親)프랑스적 진보주의에서 애국주의로. 베토벤의 진심은 어느 쪽이었을까. 그 향방은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9번 ‘합창’에서 찾을 수 있다. 베토벤은 끝악장 합창 부분에 사용할 가사로 문호 실러의 ‘환희의 송가’를 선택했다. 송가를 등장시키기 전, 베토벤은 1악장의 혼돈, 2악장의 광란, 3악장의 현실 도피적 악상을 차례로 회상한 뒤 자신이 직접 쓴 가사를 베이스 솔로가 부르도록 한다. “오 벗들이여, 이 소리가 아니오!” 뒤이어 실러의 송가가 흐른다. “환희여, 아름다운 신들의 불꽃이여…. 너의 마법은 관습이 엄하게 갈라놓았던 것을 다시 결합하도다. 너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는 곳에, 모든 인류는 형제가 되도다.” 이 가사에서 보듯 베토벤의 ‘진정한 목소리’는 관습의 장벽을 넘어선 인류의 하나 됨이었던 것이다. ‘오 벗들이여, 이 소리가 아니오’는 ‘데미안’으로 친숙한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의 에세이 제목이기도 하다. 헤세는 제1차 세계대전 중 베토벤을 인용해 이 에세이를 발표했다. 각 나라가 편협한 민족주의에 눈멀어 반목하고 살육하는 현실을 지탄한 글이었다. 이 글 때문에 그는 독일 문단과 사회로부터 배척당하고 스위스로 이주해야만 했다. 사람들이 그 목소리를 다시 상기하게 된 것은 30여 년이 지나 히틀러의 제3제국이 패망한 뒤에 이르러서였다.역사시계 되돌리는 日, 새겨들어야 실러에서 베토벤, 헤세로 이어지는 위대한 정신의 궤적을 되밟으며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자민당 총재가 21일 발표한 총선 공약을 떠올린다. 그는 ‘다케시마(독도의 일본 이름)의 날’을 정부 행사로 승격시키겠다고 했다.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성을 둘러싼 주장에 대해 반론하겠단다. 과거사 반성 등의 교육은 금지한다고 했다. 자위대를 국방군으로 바꾸는 헌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했다. 합창 교향곡 2악장의 소란한 음향이 들리는 듯하다. 한국도 일본도 연말이면 ‘합창 교향곡’ 연주가 성시를 이룬다. 단, 일본에는 한국과 다른 전통이 있다. 지역마다 체육관에서 주민 수천, 수만 명이 악보를 들고 ‘환희의 송가’를 부르는 시민참여형 ‘합창 교향곡’ 연주가 수십 년째 연말마다 인기를 끌어온 것이다. 예술을 사랑하고 베토벤의 위대한 정신을 숭앙하는 일본의 성숙한 시민들에게 아베 총재의 공약을 상기시키며 다음과 같이 호소할 때가 바로 지금인 듯싶다. “오 벗들이여, 이 소리가 아니오!”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고 했던가.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이번 주로 7주 연속 빌보드 핫100 차트 2위에 오른 데 대해 아쉬움의 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그가 말고삐를 처음 잡았을 때 이만한 성과를 기대한 이는 없었다. 7월 이 노래를 처음 선보였고 9월부터 차트 2위에 올랐으니 ‘말 타고 두 달 만에 올림픽 승마 은메달을 확보한’ 격 아닌가.신드롬에 싸이도 유튜브도 놀라 세계 진출을 위한 정교한 전략은? 없었다. 기적은 노래와 뮤직비디오를 ‘땡기게’ 만들어놓은 그의 팀과 유튜브가 합작해 이뤄낸 것이다. ‘강남스타일’은 8일 밤 현재 6억7200만여 건의 조회수로 유튜브 역대 2위에 올라 있다. 연내 1위 등극도 확실시된다. 그러나 유튜브 역시 이에 대해 어떤 ‘의지’도 없었다. 처음 올라온 뮤직비디오를 본 전 세계의 누리꾼이 그 매력을 입으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로, e메일로 전파했고, 파란 눈의 외국인들도 영상을 보면서 웃음을 터뜨리는 ‘리액션 비디오’를 잇달아 올렸고, 이어 자신들이 직접 말춤 추는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다. ‘여섯 단계를 거치면 모든 인류가 친구다’라는 명제처럼 이내 ‘강남스타일’은 세계인이 공유하는 콘텐츠가 되었다. 싸이도 놀랐지만 유튜브도 놀랐고, 서로가 많은 시사점을 얻었을 것이다. 국제음악박람회 ‘뮤콘 서울 2012’ 참석차 1일 서울을 찾은 존 히라이 유튜브 한국·일본 음악부문총괄은 유튜브에서 비롯된 강남스타일 신드롬 비결을 이렇게 설명했다. “유튜브에는 콘텐츠 검증(CID)이라는 절차가 있다. 저작권 소유자에게는 (다른 누리꾼들에게) 무엇을 허용하고 무엇을 금할 것인지 문의한다. 싸이의 경우 오리지널 ‘강남스타일’ 비디오 저작권만 주장하고 누구나 패러디 영상을 올릴 수 있게 허용하면서 그런 영상에 붙는 광고 수익은 자신에게 돌아가도록 했다.” 그의 말대로 ‘강남스타일’의 성공은 CID가 낳은 최대의 성과였다. 유튜브는 최적의 옵션들을 선택지로 제시했고, 싸이는 최고의 답안을 택했다. 유튜브와 한국인의 각별한 인연이 처음은 아니다. 2005년 처음 서비스를 개시한 직후 전 세계가 주목한 최초의 ‘유튜브 스타’ 중 하나가 뉴질랜드에 유학하던 한국인 임정현 씨였다. 그는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 볼 수 있도록 전자기타로 ‘캐논 변주곡’을 연주해 유튜브에 올렸다. 단박에 조회 수가 수천만 건으로 뛰었고 CNN, 뉴욕타임스 등이 그의 이름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어진 유튜브 스타로는 그와 이름도 흡사한 피아니스트 임현정 씨가 있다. 프랑스 파리 국립음대를 졸업한 그는 한국의 가족을 위해 2009년 연주회 동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다. 빠른 명인기(名人技)가 필요한 ‘왕벌의 비행’ 동영상이 누리꾼들의 눈에 띄었고, 세계적 음반사인 EMI는 그를 픽업했다.‘강남스타일’처럼 세계를 놀이터로 싸이를 포함한 이들의 사례는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는 데 더이상 절대적인 필요충분조건은 없음을 보여준다. 누리꾼들은 이들의 이름값에, 학벌에 주목하지 않았다. 즉각적으로 화면에 반응하는 자신들의 본능을 좇았고,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 이를 좋아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했다. 얼마간의 낯섦은 오히려 친근함으로 작용했음을 ‘강남스타일’의 리액션 비디오들이 보여준다. 최근 문화강국으로 착실히 성장해온 한국이 더는 ‘변방’도 아니지만, ‘변방’의 개념 자체를 유튜브는 허물어가고 있다. 문화권 사이의 이해를 방해해온 언어 장벽조차 재미있는 콘텐츠 앞에서 무력화된다는 사실을 ‘강남스타일’ 비디오는 보여주었다. 이제 세계는 장벽 없는 하나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곳에서 가장 신나게 활약할 주인공들이 바로 우리의 눈앞에 있다. 뛰어난 재주와 감각을 갖춘 한국의 젊은이들이다.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이 초소 저 초소를 두드렸을 북한군 병사의 불안한 눈초리는 상상만으로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 서울시 대표 공연장의 사장이 ‘쌍용차 해고자 자살 같은 사례’를 공연에 반영하라고 서울시극단에 요구했다는 신문 제목 위에 가을의 양광(陽光)이 떨어질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노크 北병사’… 천박한 인터넷언론… 미성년 아이돌 그룹의 공연에서 카메라로 특정 부위를 ‘과도하게’ 부각하면 유해물로 규제하는 방안을 여성가족부가 추진한다는 소식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사춘기 남자들의 시선은 이미 카메라보다 훨씬 빠른 광속으로 아이돌 그룹의 전신을 스캔하고 있지 않을까. 과도함의 기준을 놓고서는 얼마나 말이 많을 것인가. 그런 상념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싸이의 ‘라이트 나우’를 비롯한 가요 300여 곡에 대해 청소년유해매체물 판정 철회 결정이 나온 것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 사회에서 ‘기준’은 여론의 압력 ‘데시벨’과 적용 대상의 위상에 따라 얼마나 탄력적인가. 이렇게 쓴 것을 일부 누리꾼이 ‘판정 철회는 잘못된 일이다’라는 주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또한 기자를 슬프게 한다. 지난주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감사에서 야당의원이 중학 교과서 검정위원회 수정 요구를 문제 삼아 국사편찬위원회를 ‘친일’로 몰아붙였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실제로는 국편이 ‘을사늑약’이라는 표현을 빼도록 한 것도 아니며, ‘성노예’라는 표현을 뺀 것도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잘 풀어 설명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4·3사건을 ‘무장봉기’로 수정하도록 했다는 말도 근거가 없으며, ‘무장봉기’라는 표현도 원저자의 표현에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국사편찬위원장이 현장에서 해명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보고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는 쓸쓸한 장면 역시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한때 국내 최고의 교향악단으로 꼽히던 악단이, 법인으로 바뀐 뒤 지명도와 실력을 함께 갖춘 지휘자를 초빙하려 하자 단원들이 조직적으로 번갈아 “우리 악단의 법인화는 잘못된 일이다”라는 메일을 보냈다는 소식이 우리를 다시 슬프고도 부끄럽게 한다. 해당 지휘자는 이에 일찌감치 한국행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화음을 맞춰본 지도 이미 오래인 단원들은 세계적으로 날로 위상이 도약하는 ‘옛 경쟁자’ 서울시립교향악단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언론으로서의 전문성도, 책임의식도 없는 인터넷 언론들이 오늘도 유수 포털 사이트의 앞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연예인 치골’ 어쩌고 하는 제목은 언제 사라질 것인가. 치골(恥骨)은 문자 그대로 부끄러운 부분의 뼈로서 남에게 보일 수 없는 곳이다. 골반 또는 엉덩뼈가 언제부터인가 엉뚱한 곳에 있는 뼈의 이름으로 입에 오르내리게 된 사실이 우리를 슬프고도 부끄럽게 한다.하긴 안톤 슈나크의 수필도 빠졌으니 ‘울음 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로 시작하는 안톤 슈나크의 수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 대해 알아본 결과 1980년대에 고교 국어교과서에서 빠졌더라는 사실이 필자를 쓸쓸하고 슬프게 한다. 청천 김진섭이 광복 직후 번역한 이 글은 1953년부터 교과서에 실려 수많은 학생들의 마음속에 각인됐다. 물론 교과서는 항상 바뀌는 것이고 시대가 모범으로 삼을 만한 텍스트는 변화한다. 그러나 이 독특한 색깔의 수필이 주는 향취를, 이 칼럼을 읽을 젊은 세대와 미리 공유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아쉽기 그지없다. 끝으로, 슈나크의 글을 인터넷에서 찾아본 결과 ‘우리를 술푸게 하는 것들’이라는 단상이 의외로 많이 검색된 사실이 필자를 슬프게 한다. 1950∼80년대 고교를 다닌 세대는 오늘날 술(酒)을 퍼마셔야만 풀릴 삶의 애환이 그리 많은 것일까.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조각가인 엄태정 서울대 명예교수(사진)가 한독협회(회장 김영진 한독약품 대표)가 주는 이미륵상 제7회 수상자로 선정됐다. 엄 교수는 1991년부터 1년간 독일 베를린 예술종합대 연구교수로 재직했으며 2005년 베를린의 게오르크 콜베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여는 등 한국 미술을 독일인들에게 알려왔다. 이미륵상은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 등으로 독일 문단에서 인정받은 작가 이미륵(1899∼1950)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9년 제정됐다. 시상식은 16일 주한 독일문화원.}

‘한글날 공휴일 추진 범국민연합(한글날연합)’이 18일 ‘한글날 공휴일 지정 국민청원서’를 행정안전부에 제출했다. 5만8105명의 서명을 받은 청원서에서 한글날연합은 “다른 나라에서 글자를 공휴일의 근거로 삼는 일이 없기 때문에 한글날 공휴일 지정은 세계적으로 더욱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한글날을 공휴일로” 복원 논의 활발 10월 9일 한글날은 광복 이후 공휴일이었지만 1991년 ‘공휴일이 많아 경제 발전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30대 초반이라면 한글날 학교에 가지 않은 일이 기억에 희미할 것이다. 청원서에서 보듯 공휴일 복원 논의도 활발하다. 문화체육관광부의 ‘한글날 공휴일 지정에 대한 조사’에서 찬성은 2009년 68%, 지난해 76.3%, 올해 83.6%로 해마다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광식 문화부 장관도 17일 ‘공휴일에 관한 법안은 행정안전위원회 소관’이라고 전제하며 “국회에서 한글날을 다시 공휴일로 지정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법률 제정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내년 달력에서는 한글날에 빨간 표시를 보게 될까. 청원서에서 한글날연합은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해 얻게 될 문화가치는 잃게 될 노동가치보다 훨씬 크다”고 강조했다. 기획재정부가 16일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근로자의 주당 근로시간은 44.6시간으로 자료가 발표된 30개국 중 터키(48.9시간)에 이어 2위였다. 이제 좀 쉴 때도 되었다든가, 근로시간을 줄여 일자리 개수를 늘리자는 차원에서만 하는 말이 아니다. 노동집약적 경제를 벗어나 창조산업, 창의경제로 가야 한다는 말이 새삼스럽지 않은 시대다. 울리히 슈나벨의 책 ‘휴식’(걷는나무)은 휴식이 주는 집중력과 평온함이야말로 창조성의 기반이라고 강조한다. 대한민국의 근로자가 가을날 하루를 쉬면서 마련할 새로운 아이디어와 활력은 1년의 300분의 1에 해당하는 근로일의 생산량보다 클 수 있다. 한글날연합은 “한글날 공휴일 지정은 4조9066억 원의 경제효과를 발생시켜 내수경기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고도 설명했다. 여기까지의 담론이 다루지 않은 부분도 있다. 오늘날 한국은 세계를 향해 수많은 문화콘텐츠를 발신하는 기지가 되었다. 최근 싸이의 ‘강남스타일’ 열풍에서 보듯 유튜브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지금까지 상상도 못했던 일들을 현실로 만들고 있다. 이런 가운데 외국인들에게 한글날을 ‘한국 문화의 날’로 각인시키면 어떨까. 명칭을 바꿀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미 한글은 한국 문화의 중심으로 커다란 상징성을 갖고 있다. 그 창조 과정이, 반대를 이겨낸 세종대왕의 의지가, 글자의 과학성이 그 자체로 훌륭한 내러티브요 콘텐츠다. ‘이렇게 우리가 자랑하는 한글날을 맞아 한국 문화의 다양한 매력을 소개한다’며 다양한 공연과 전시, 체험행사를 곁들여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외국인에게 ‘한국문화의 날’로 각인을 본보 20일자 A8면에 실린 ‘내러티브 리포트’는 한국에 온 뒤 한국 문화와 음악에 빠져 블로그와 유튜브로 그 매력을 알려온 캐나다 출신 사이먼과 마티나 부부 이야기를 소개했다. 부부가 운영하는 블로그의 정기 구독자만 130개국 30만 명에 이른다. 이들의 사례에서 보듯 국내 외국인은 한국 문화를 전파하는 첨병이요 훌륭한 민간 문화대사다. 1년 중 가장 날씨가 아름다운 10월, 한글날을 맞아 이들에게도 하루 더 쉴 틈을 주고 매력적인 우리의 문화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알리면 이들에겐 추억이 되고, 한국 문화의 매력에 흠뻑 빠져 이를 자국민에게 널리 전파하게 만드는 하나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쓰다 보니 세종대왕께서 애민정신의 깊은 뜻을 담아 창제하신 한글과 한글날을 그 효용가치로 논하는 불경죄를 저질렀다. 대왕께서는 용서해주시리라 믿는다.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소설가 유익서 씨(사진)가 한국소설가협회(회장 백시종)와 성균관유교학술원(원장 최남백)이 공동 주관하는 제1회 성균관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수상작은 소설집 ‘한산수첩’이며 상금은 1000만 원이다. 시상식은 9월 28일 오전 11시 종로구 명륜동 소재 성균관 대성전에서 열린다.}

음모로 가득 찬 세상이다. 그들의 시선에 따르면 그렇다. 치밀한 기획과 결탁이 빚어낸 음모가 가득하다. 21일 돌연히 ‘안철수 룸살롱’이 네이버 상위 검색어에 올랐다. 그들의 시선으로 재구성해보자.‘안철수 룸살롱’ 포털-언론 결탁? “‘안철수 원장이 유흥주점을 갔다고 말한 증인들이 있다’고 신동아가 보도했다. 그 뒤 네이버에서 ‘안철수 룸살롱’을 치면 성인 인증을 할 필요 없이 바로 결과가 검색된다. 반면에 ‘박근혜 룸살롱’을 치면 예전처럼 성인 인증을 요구한다. 이거 봐라. 안철수 원장의 룸살롱 출입설을 가능한 한 널리 퍼뜨리려는 속셈 아니냐. 언론과 포털이 결탁해서 의혹을 확대하려는 거다.” 이런 ‘결탁설’을 처음 제기한 장본인은 ‘나는 꼼수다(나꼼수)’ 패널인 주진우 시사IN 기자다. 그가 트위터에서 한 말이 퍼지면서 그동안 에 한을 품어왔던 ‘초딩(초등학생) 중딩 고딩’까지 ‘룸살롱’ 검색에 나섰다. 이윽고 유력 정치인의 이름에 온갖 민망한 금칙어를 갖다 붙인 조합들이 검색어 상위를 차지했다. 여러 해 동안 이 사회의 온갖 현상을 취재해온 ‘기자’의 머리에 떠오른 시나리오가 그 정도였나. 내 눈에는 이 같은 추측의 수준과 층위가 ‘티진요(티아라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멤버들이 제기했다는 음모설과 다르지 않다. ‘티진요’ 게시판에는 티아라 멤버 화영의 왕따설이 떠오른 데 대해 ‘저축은행 비리 은진수 전 감사위원의 가석방을 감추려는 것’이라는 음모설이 올라왔다. 한국 사회에서 은진수가 걸그룹까지 동원할 정도로 영향력과 파장이 큰 인물이었던지. 이런 음모론의 세계관에는 이른바 ‘센 자’들이 뭉쳐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언론과 유력 정치인, 재벌이 (이번 경우엔 유력 포털까지) 단물을 주고받으며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 드라마 ‘추적자’의 서 회장처럼 세상에 대한 애정은 사라지고 이기심만 남은 (‘옆집 딸내미가 시집 가뿐 기라. 두어 달 지나니 술 먹는 버릇만 남은 기라’) 노회한 인물들이 낄낄거리며 치밀한 각본을 구성하고 임무를 나누어 맡을 것이다. 그들이 마음대로 세상을 조종하고 이권을 분배하는 것이다. 그런가? 20년 넘게 기자로 일하며 선후배들과 저녁 자리에 끼어 언론계의 온갖 무용담을 듣고 지낸 나 혼자 그 치밀하고 거대한 카르텔을 몰랐던 것일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카카오톡까지 활성화된 정보대국 대한민국에서 그 많은 비밀을 누설 없이 집행할 수 있는 치밀한 조직은 무엇일까. 툭하면 실언으로 다 얻은 점수까지 까먹곤 하는 정치인들이 그들인가? 호텔방에서 서툰 감청을 시도하다 국제 망신을 겪기도 하는 국정원인가? 언제부터 포털이 유력 언론과 단물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나. 영화와 드라마를 너무 많이들 본 것 아닌가? 산업화 이후 벌써 반세기. 치밀하게 짜여 버린 사회 구조는 세상에서 큰 역할을 해보려는 돈키호테들을 예전보다 훨씬 적게 허용하게 됐다.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유동성이 줄어든 세상에선 내가 바꿀 수 있는 몫이 줄었다. 기성 사회의 벽은 한껏 견고하고, 뭔가 ‘내가 모르는’ 담합으로 세상이 짜여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일찍이 김어준 ‘총수’의 딴지일보가 애용했던 수사학 그대로 ‘아니면 말고’ 한마디면 그만이다.‘아니면 말고’식 의혹 얼마나 판칠지 이제 넉 달이 채 남지 않았다. 앞으로 이런 식으로 제기될 의혹들은 대선일 전에 충분히 검증할 시간도 없다. 이른바 유력 주자는 출마 선언도 하지 않은 상태다. ‘아니면 말고’가 쌓여 왁자지껄한 가운데 제법 많은 사람이 이 같은 ‘결탁의 음모론’에 영향을 받아 투표하게 될 것이다. 잠깐, 혼동된다. 과연 ‘기획’은 어느 쪽이 하고 있는 건가? 의심을 갖는다면 그것 역시 허술한 음모론인가?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회사원 A 씨(38)는 한때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회원이었다. 가수 타블로(본명 이선웅·32)가 미국 스탠퍼드대 학력을 위조했다고 확신했다. A 씨는 지난달 6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이 타진요 회원에게 명예훼손 혐의로 징역 10개월을 선고하자 의심을 풀었다. 그러나 그는 최근 ‘티진요’(티아라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라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새로 가입했다. 지난달 29일 개설된 이 커뮤니티에는 4일 만에 무려 33만2998명(1일 오후 7시 기준)이 회원으로 가입했다.최근 티진요처럼 군중이 집단적으로 음모론을 제기하는 현상이 심화되면서 한국 특유의 사회병리로 고착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티진요의 결성은 지난달 30일 아이돌그룹 ‘티아라’ 멤버 화영(본명 류화영·19)이 전속계약 해지 통보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소속사인 코어콘텐츠미디어는 “각자의 길을 가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지만 누리꾼들은 “화영이 왕따를 당했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이들은 티진요를 개설한 뒤 왕따설을 뒷받침할 증거를 올리기 시작했다.한 회원은 멤버들 사이에서 고개 숙인 화영의 사진을 게시판에 올린 후 “기합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회원이 소속사 건물을 촬영해 올리다 그만두자 회원들은 “(이 회원이) 붙잡혀 갔다”는 글을 올렸다. “정부가 공공기관 민영화를 감추려 연예 이슈를 터뜨린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화영 자신이 지난달 31일 트위터로 “(논란 확산을) 멈춰 달라”고 당부했지만 의혹은 계속됐다. 1일 오후 현재 게시된 글만 11만3000여 건에 달한다. 이처럼 음모론이 확산되는 데 대해 전문가들은 “사실보다 소문을 신뢰하고 개인의 의문을 사회적 의혹으로 확산하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이라며 2010년 이후 많은 사람을 답답하게 만들었던 ‘타진요 현상’이 반복될 수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전문가들은 “온갖 증거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이 다른 ‘진실’을 요구하는 현상은 기성세대를 믿지 않는 문화를 반영한다”고 분석했다. 주정민 전남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젊은이들이 진학이나 취업에 실패할 확률이 높다 보니 좌절감이 커지고 집단적 불신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이를 ‘집단관음증’으로 보는 시각도 나온다. 티진요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회원은 소수이며 상당수는 내용을 엿보기만 하려고 가입한 것으로 분석되기 때문이다. 이홍식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누리꾼이 집단으로 음모설을 제기하는 것은 ‘개똥녀’ 등 특정인에 대한 공격처럼 논란이 되는 일을 찾아 누군가를 공격하며 자신은 위로받는 ‘놀이문화’로 볼 수 있지만 사회에는 큰 위험요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권오혁 인턴기자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 최서영 인턴기자 성균관대 법학과 졸업 }

여당 대선 경선후보 포스터 다섯 장을 들여다본다. 임태희 후보는 ‘걱정 없는 나라’, 안상수 후보는 ‘빚 걱정 없는 우리 가족’을 중심 표어로 내걸었다. 바야흐로 ‘걱정’이 시대의 화두임을 보여준다. 유력 주자로 꼽히는 박근혜 후보는 어떨까. 그의 출마선언문에는 ‘불안’이 일곱 차례 잇따라 나온다. 청년들의 일자리 불안, 직장인의 실직 불안, 전세금 불안과 대출금 상환의 불안, 노후 불안 등을 꼽았다.대선 앞두고 ‘걱정’이 시대 화두로 야권도 이 시대의 불안을 조명하기에 인색할 리 없다. 문재인 후보는 ‘보통 사람은 취업불안, 주거불안, 고용불안, 건강불안, 노후불안 등 불안을 이불처럼 덮고 매일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고 출마선언문에서 진단했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도 책 ‘안철수의 생각’에서 경쟁 교육, 등록금, 사교육비, 노후 문제 등 가족 구성원 대부분이 불안한 게 우리 사회의 모습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대동소이한 내용들이다. 시대의 하늘에 낮게 내리깔린 불안의 구름이 우리만의 것일까. 글로벌 경제위기는 유럽의 우등생으로 꼽혀온 독일의 발치에까지 다가왔다. 역시 위기에서 한발 비켜서 있었던 영국의 공영방송 BBC는 최근 방영한 3부작 특집 다큐멘터리 ‘곧 여기 닥친다(Coming Here Soon)’에서 그리스, 아일랜드, 일본의 경기침체를 현장에서 잇따라 조명했다. ‘여기’는 당연히 영국을 의미한다. 그러나 경비업체 인턴으로 취업해 힘든 훈련 과정을 이겨내는 일본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인류 차원의 불안이 처음 진단된 일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불안을 현대라는 시대의 특징으로 설명했다. “우리의 시대는 흥분된 시대이지만 정열의 시대는 아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풍요와 자극이 남발되면서 인간이 무엇을 진정 의미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가가 한층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문화사적으로 19, 20세기의 전환기에 불안은 시대의 징표로 떠올랐다. 문학의 카프카, 미술의 뭉크, 음악의 말러는 불안을 주요 주제로 형상화한 각 장르의 아이콘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총성이 불안한 시대를 마침내 파국으로 몰아넣으면서 그들은 시대의 예언자로 인정받게 됐다. 1929년 일어난 대공황은 세계를 한층 두꺼운 불안의 구름 아래 내몰았다. 안철수 원장은 ‘안철수의 생각’에서 ‘정치를 한다면 롤모델로 삼고 싶은 사람’으로 미국 전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꼽았다. 대공황의 위기 속에서 뉴딜 정책을 추진해 경제를 재건했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점을 들었다. 안 원장이 택한 선택지는 오늘날 시대가 마주친 ‘불안’을 감안할 때 영악한 답안으로 볼 수도 있다. 루스벨트는 당대 위기관리, 불안관리의 달인이었다. 안 원장이 생각한 답안지가 암시하듯 올해 대권구도에서 불안을 잘 다루는 인물은 목표에 한발 더 가깝게 다가설 것이다. 국민들의 불안에 적절해 보이는 해답을 내놓는 ‘루스벨트형’ 주인공을 시대가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계해야 한다. 불안을 이용할 수는 있지만 거기엔 독이 들어있다. 파스빈더 감독의 독일 영화 제목처럼 ‘불안은 영혼을 먹어치우기’ 때문이다.미래로 나아갈 동력 소진될 수도 불안이 만연하는 시대는 이기심이 춤추고 미래로 나아갈 동력도 소진되기 쉽다. 1차대전 이후 불안과 공황의 시대는 루스벨트를 낳았지만 무솔리니와 히틀러도 낳았다. 개인은 자신의 경험 총합 안에서 가장 지혜롭게 불안과 위기를 관리하려 하지만 그 총합이 집단이 추구해야 할 가치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불안의 시기에 솟구치는 삶의 안전망, 복지의 요구는 위기를 딛고 재도약을 위해 활용해야 할 자원의 분배와 상충할 수도 있다. 루스벨트는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는 명언을 남겼다. 우리가 지금 진정으로 불안해할 것은, 어쩌면 불안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밴드 ‘장미여관’의 노래를 듣고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쉬고 가자’며 이성 술친구를 꾀는 내용이다. 1980년대에 기존 성윤리 타파를 외쳤던 마광수 교수의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와 그의 거침없는 발언들은 당시 적잖은 공격을 받았지만 그의 언어 속에 들어있던 ‘밈(meme)’은 한 세대를 지나 오늘날 밴드 ‘장미여관’에 복제돼 전파되고 있다. 아직은 낯설지만 ‘밈’은 오늘날 인문 사회 자연과학계를 통틀어 가장 ‘뜨거운’ 개념 가운데 하나다. 1960년대 토머스 쿤의 신조어 ‘패러다임’이 오늘날 일상어가 된 것처럼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창안한 ‘밈’도 다음 세대 일상어로 자리 잡을지 모른다. 밈이 무엇인가? 세상의 정보와 문화, 사상은 복제된다는 속성을 갖는다. 생명체의 특징을 복제 전파하는 것이 유전자(gene)라면 작은 몸짓부터 장대한 예술작품까지 정보와 문화를 복제 전파하는 낱낱의 의미가 밈이다.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종(種)처럼 강력한 밈을 가진 책이나 사상은 강력히 퍼져나간다. ‘멘털붕괴’ 같은 신조어가 인터넷에 만연하면 그것은 그 말이 가진 밈이 강력함을 나타낸다. 세계의 수많은 10대 소녀가 케이팝에 매료되는 것은 그 밈이 큰 전파력을 가진 것을 의미한다. 육종학자들이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품종을 개발하듯 한류의 밈도 강화할 수 있다. 변화하는 환경에서 땅파기, 날기, 위장 등 ‘주특기’를 개발한 생물종이 살아남은 것처럼 ‘왜 독특한가’ ‘왜 다른가’로 호소하는 차별성 전략은 한류의 번영을 위해 우선 고려해야 할 요소다. ‘좋아하면 따라한다’는 세상사의 철리 또한 밈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이국의 소녀들이 광장에 모여 한국 걸그룹을 따라하는 모습은 말할 것도 없다. 도킨스는 저서 ‘조상 이야기’에서 기숙학교 상급생들의 독특한 걸음걸이를 회상했다. 으스대는 듯이 걷는 모습에 매력을 느낀 하급생들이 이를 모방하면서 이 걸음은 그 학교의 독특한 문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은 축구선수나 배우 같은 숭배 대상으로부터 밈을 모방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이런 에피소드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종북 의심을 받고 있는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의원은 기자들을 부르면서 ‘일꾼’이라고 표현했다. 북한에서는 기자를 ‘보도일꾼’으로 부른다. 이 정당 당원들이 북한 노동당처럼 당원증을 들어 ‘찬성’의 의사를 표현하는 사진도 눈에 거슬린다. 1980년대 언젠가 대학가에서는 ‘담보하다’ ‘창발성’ 등의 말이 대자보와 전단에 만연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담보’란 ‘맡아서 보증하는 것’이란 뜻의 명사로만 알았지 ‘이뤄내도록 약속하다’라는 뜻의 동사로 쓰는 것은 생경했다. 전단을 준 선배에게 물어보니 “응, ‘조선’ 문건에선 자주 쓰는 말이야. 좋은 표현은 함께 써야지”라고 했다. 최소한 내가 알기에 그가 당시 ‘조선’을 사랑했던 것은 분명했다. 잘 안다. 북한 지배층 흉내를 낸다고 해서 벌을 줄 수는 없다. 기자도 후배들을 독려할 때 농담 삼아 “마감시간 준수 투쟁에 ‘떨치여’ 나서자”는 메시지를 보내곤 한다. 그래도 ‘북한의 지배자를 사랑하다 저렇게 따라하게 됐나’라는 궁금증을 가질 권리는 분명 있다. 국민이 뽑은 선량(選良)으로 입법의 막중한 책임을 가진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지난 총선 전 이 같은 모습들을 알 기회가 너무 적었다는 데 기자 주변의 많은 사람이 자신의 투표 성향과 관계없이 공감하고 있었다.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일요일 조금 일찍 집을 나와 차로 강변북로를 달려보았어. 차창 밖 노들섬은 서울시 계획대로라면 올가을엔 익은 벼이삭으로 황금물결을 이루겠지.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겠더라. 두 전임 시장은 이곳에 오페라하우스와 콘서트홀을 만들겠다고 했지. 강 복판에 공연장이 있다면 눈길이 갈 거야. 여러 나라가 물가에 랜드마크를 세우는 이유도 그거니까. 랜드마크가 중요해? …라고 할지도 모르겠네. 올해 국내 출간된 ‘빌 브라이슨의 대단한 호주여행기’를 볼까. 세계 여러 기업이 30여 년 전엔 호주 지사를 대부분 멜버른에 두었지만 오늘날엔 대부분 시드니에 두게 됐지. 책의 저자 브라이슨도 예전엔 자기 책 호주판을 멜버른에서 냈지만 이젠 시드니에서 낸대. 이유가 뭘까? 저자는 두 도시의 차이는 미미하다고 얘기했어. 단지 멜버른에만 있는 것이라면 독특한 우회전 규칙과 호주식 풋볼에 대한 애정, 시드니에만 있는 것이라면 오페라하우스(1973년 건립)와 하버브리지라고 썼더군. 광대한 나라에서 자기들끼리 경쟁한 이 두 도시와 달리 서울은 가까운 외국 도시들과 경쟁하고 있어. 1998년 세워진 상하이 국가대극원(國家大劇院)의 웅장함과 현대적 시설을 보면 놀랄걸. 중요한 건 극장을 채울 예술가들인데, 우리는 이 점에서 경쟁력이 커. 우선 노들섬 공연시설의 예술감독으로 유력했던 정명훈은 서울시향을 지휘해 세계 최고권위의 DG 레이블에서 음반을 내고 있는, 그야말로 희소한 존재야. 최근 벨기에 공영방송 RTBF는 특집 다큐멘터리에서 한국인 음악가들이 유럽 주요 콩쿠르를 장악하는 비결을 분석했지. 벨기에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의 경우 최근 결선 진출자의 절반 정도를 한국인이 차지하거든. 그 비결로 다큐는 ‘교육열’과 ‘꼼꼼한 커리어 관리’를 꼽았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이 예술가들이 서울의 랜드마크가 될 공연장을 채우면 그 자체로 문화를 사랑하는 세계인들의 존중을 받지 않을까? 알고 있어. 지금의 서울시는 ‘큰 상징물’ ‘경쟁’보다는 나눔과 참여를 강조하지. 그런데 오페라극장과 콘서트홀은 나눔의 역할을 할 수 없는 곳일까? 동아일보는 지난달 음악 전공 학생 16명과 음악계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경쟁은 치열하고 진로는 한정된 음대생, 해법은’을 놓고 토론을 열었어.(본보 6월 5일자 A10면 참고) 학생들은 “대학만 들어가면 황금빛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기회의 문이 좁을 줄 몰랐다”며 한숨을 쉬었지. 복합공연장 한 곳 짓는다고 해서 이들의 어려움이 해소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유독 연주가에 비해 음악팬의 비율이 적다는 우리나라에서 ‘랜드마크 공연장’이 가져올 사회적 세계적 관심이 기폭제가 되고, 전국에 고전음악 열풍을 불러올 수도 있겠지. 우리 청중의 절대수는 적지만 내한 연주가들이 입을 모아 얘기하듯 대학 동아리와 인터넷 동호회를 중심으로 한 이들은 ‘인상적으로’ 젊은 청중이고, 그만큼 확대 잠재력이 크거든. 이 글 하나 썼다고 해서 노들섬에 극장이 다시 추진되긴 힘들지도 몰라. 하지만 설계와 디자인 공모에만 수백억 원을 들인 이 극장이 이제 ‘물 건너갔다면’ 물 건너 어딘가에라도 아름다운 공연장이 꼭 생겼으면 좋겠어. 그때 우리가 한강변 어디엔가 서서 저 멀리 빛나는 공연장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처음엔 ‘환상곡’ 같은 편지를 쓰려고 했는데 두서가 없다 보니 ‘광시곡(狂詩曲)’처럼 돼버렸네. 더운 여름에 건강하고, 한번 만나서 얘기 나누자, 친구!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모차르트의 작품을 모차르트 생전의 악기로 연주하면 반음 정도 낮게 들린다. 200년이 넘는 동안 연주자들이 조금씩 소리를 높여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다르다. 세종대왕이 정해진 소리를 내는 율관(律管)을 제작해 음높이가 변하지 않도록 규정한 것이다. 훈민정음과 다른 또 하나의 정음(正音)이라 할 만하다. 세종대왕의 업적 중에는 정밀성과 계측을 강조한 것이 많다.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가 그렇고, 천문기구인 간의 혼천의 등도 그렇다. 우주의 엄정한 질서를 강조한 주자학적 세계관이 반영된 것도 이유겠지만, 매사에 ‘대충’을 허용하지 않았던 세종대왕의 성격이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 훈민정음, 즉 한글도 그렇다. 각 자모의 발성 원리와 쓰임새를 엄밀히 규정해 배우기 쉬우면서도 음가가 변하지 않도록 했다.(로마자의 C나 E, O가 나라와 시대에 따라 얼마나 다른 소리를 내는지 상기해 보라) 그 원리와 쓰임새를 상세히 설명한 책이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이다. 세종대왕이 ‘백성이 자기의 뜻을 널리 실어 펴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글 창제 의의를 밝혔지만 오늘날 한글이 주는 혜택은 한반도의 영역을 넘는다. 한국 포털의 ‘지식인’ 격인 해외 인터넷 ‘Q&A’ 코너들을 보면 ‘일본어와 한국어 중 어느 쪽이 배우기 쉬운가’라는 질문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일본어는 한국어보다 발음하기 쉽다. 반면 한국 글자인 한글은 하루면 배울 수 있다”는 답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 케냐인인 제인(20)은 수도 나이로비에서 한국 정부가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세종학당에 다닌다. 그는 2년 전 명문대에 합격했지만 등록금 때문에 진학을 포기했다. TV와 인터넷으로 ‘주몽’ ‘광개토태왕’ 등을 보며 한국 문화에 빠져 있던 그는 세종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던 친구가 장학금을 받고 한국에 유학 가는 것을 보고 기적을 꿈꾸게 됐다. 한국에서 정치학을 배운 뒤 고국 발전에 큰 힘이 되는 게 그의 소망이다. 제인의 이야기는 우리가 주목하지 못한 ‘아프리카 한글 한류’의 한 사례일 뿐이다. 세계 곳곳에 또 다른 ‘제인’이 수천수만 명을 헤아린다. 세종의 치밀한 정신과 창조성은 이렇게 온 세상에 퍼지는 밈(meme·유전자처럼 전파 확산되는 문화기호)을 낳았다. 이토록 훌륭한 선물을 받았지만 세종대왕 앞에서 우리는 송구할 수밖에 없다. 경북 상주에서 2008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새롭게 발견되었는데도 지금 소재조차 알 수 없는 현실 때문이다. TV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도 이 값진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높였지만 우리 후손들은 관심에 값하는 존중조차 보여드리지 못했다. 사건의 빠른 해결을 당부하는 동시에 오늘날 한글이 하나의 문자체계에 그치지 않고 한국 문화의 풍요성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음도 상기하고자 한다. 조선의 풍부한 시조와 소설, 대한제국기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근현대 문학의 자산이 한글을 통해 표현되고 쌓여왔다. 세계의 젊은이들이 한글로 된 케이팝 가사를 따라 부르고 한국 드라마 대사를 원문으로 읽어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 노력에 상응하는 의미에서라도 10월 9일 ‘한글날’은 ‘한국 문화의 날’의 의미까지 담아내야 한다. 공휴일 복원 논란은 따로 논하더라도. 내일 15일(양력)은 세종대왕의 탄생 615주년 기념일이다. 1965년에 스승의 날을 5월 15일로 정한 데도 ‘겨레의 위대한 스승’ 세종대왕을 기리는 의미가 담겨 있다.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한국신문협회,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한국기자협회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제56회 신문의 날(7일) 기념대회가 6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김재호 한국신문협회장은 대회사에서 “총선과 대선 등 정치권의 변화가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때일수록 신문인들이 자세를 가다듬고 신문의 저력을 보여줘야 한다”면서 “신문 제작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신문업계가 인터넷 공간에서의 저작권 보호나 콘텐츠 유통 문제, 부수공사 체제 개선 문제 등 현안 해결에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보균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장은 개회사에서 “여러 도전에 직면한 신문의 탈출구는 사실을 추적하는 열정과 진실을 발굴하는 정의감에서 찾아야 한다”며 “진실과 사실을 바탕으로 생산된 정보상품이 신문의 경쟁력을 부활시켜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박종률 한국기자협회장이 3개 주관단체가 공동으로 채택한 ‘우리의 다짐’을 낭독했고 2012 한국신문상과 신문협회상 수상자, 신문의 날 표어 및 신문주간 포스터 공모전 입상자에 대한 시상식이 진행됐다. 기념대회 직후 열린 신문의 날 기념 축하연에는 김황식 국무총리 등 각계 인사 200여 명이 참석했다. 김 국무총리는 축사에서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글로벌 금융·재정 위기 속에서도 더 탄탄히 성장하려면 건강한 여론 시장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

신문 제작 일선에 있다 보니 외부 뉴스서비스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다. 하루 1000여 건의 뉴스 제목이 주르륵 뜨는 가운데 꼭 읽어야 할 뉴스를 찾아내는 일이 쉽지는 않다. 회사 외부에 있을 때는 휴대전화로 인터넷 포털의 뉴스를 들여다본다. 인기 연예인의 사생활 문제 같은 뉴스는 경쟁적으로 앞줄에 뜨지만 우리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장기적으로 미칠 국제관계나 정치역학적 문제, 함의가 깊은 경제 문제는 가려지는 일이 많다. ‘더 친절한 뉴스 제공 형태는 없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몇 가지 요건이 필요해 보였다. 1.기사의 중요도를 표시해주면 좋겠음. 매체의 시각을 강요하는 (별점 등) 형태면 곤란. 중요한 기사일수록 자연스럽게 눈에 잘 띄도록 했으면. 2.각각의 기사와 연관되는 사진이나 그래픽을 한눈에 함께 인식할 수 있으면 편리함. 3.필요하지 않은 뉴스는 건너뛸 수 있으면서도 뉴스의 일관된 계열이 유지될 수 있어야 함. 스포츠에 열광하지 않는 나로서도 중요한 제목 정도는 일별하고 지나갈 수 있어야. 4.내가 가진 여유에 따라 비교적 짧은 시간에 죽 읽어볼 수도 있고 깊이 들여다볼 수도 있는, 유연한 시간 관리가 가능한 형태였으면. 메모해놓고 보니 이 같은 뉴스 인터페이스는 멀리 있지 않았다. 내가 생산에 참여하는 ‘신문’이 그것이었던 것이다. 한숨을 쉬었다. “독자들은 좋겠다, ‘신문’이 있어서…. 내게 필요한 것은 신문을 만드는 데 필요한 원(原)뉴스로 구성한 신문이야.” 수요일 아침 집에 배달된 동아일보는 40쪽이었다. 주간지 크기로 접으니 160쪽, 단행본 크기로 접으니 320쪽 책 한 권이 되었다. 광고 지면이 약 절반을 차지하는 점을 감안해도 매우 큰 정보량이다. 최근 오랜만에 만난 친구도 신문 없을 때의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이사한 뒤 한동안 신문을 안 봤는데,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면 되지 하고 생각했어. 아니더라고. 주변 사람들과 얘기해 보니 실제로 중요한 얘기들을 놓치고 있었어.” 그렇다. 신문이 없을 때의 문제는 단지 뉴스를 종합적으로 접하지 않는 데 있는 것뿐 아니라 인터넷 등에 자주 노출되는 뉴스만 접하고 ‘뉴스를 다 보았다’고 착각하는 데 있었다. 설탕물만 마시고 필수영양소를 섭취했다고 믿는 것과 같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의 보급이 늘면서 뉴스 편식가와 정보 착오족은 더욱 늘어나지 않을까 염려된다. 한국언론재단의 ‘2011 언론수용자 의식조사’에 따르면 월 가구소득 600만 원 이상의 사람들 40.4%가 신문을 정기구독하는 데 비해 200만∼300만 원인 사람의 경우 22.1%만 신문을 정기구독하고 있었다. 소득이 낮을수록 신문 구독료 등 지출을 포기하는 점을 감안해도, 종합적인 정보를 취득하는 환경과 성공은 (최소한 경제적으로)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종이 신문은 속보성에 있어서 인터넷을 따라갈 수 없다. 그러나 17세기 초 유럽에서 근대적 신문이 나타난 이후 4세기 동안 쌓인 편집의 기술, 효과적인 정보전달 기법은 이 시대에도 유효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의 뉴스는 이 전통의 인터페이스에 인터넷의 빠르기를 더하고 동영상을 접목하는 형태로 진화할 것으로 예측해본다. 사흘 뒤 4월 1일은 3·1운동 주도세력이 그 이듬해(1920년) 탄생시킨 동아일보가 창간호와 함께 고고성(呱呱聲)을 울린 날이다. 그 엿새 뒤인 4월 7일은 1896년 민족세력이 독립신문을 창간한 것을 기념하는 ‘신문의 날’이다.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아우슈비츠 이후에 문학은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던진 사람은 독일 미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였다. 솜털 보송한 중학생 시절 그 구절을 처음 보았을 때 ‘웃기는 소리’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따뜻함도, 배부름도, 문학도, 예술도 박탈당한 채 죽어간 사람들은 어떤 세상을 갈망했을까. 배부름과 온기뿐만 아니라 아름다움과 예술이 가까이 있는 세상이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았겠는가. 바르샤바 게토(유대인 격리구역)에 갇혔던 청년 마르셀은 그 숨 막히는 곳에서도 간간이 열리는 음악회가 한 줄기 숨통을 터주었다고 회상했다. 거기서 그는 시를 읊고 문학을 논했다. 최후까지 남은 유대인들을 독일군이 아우슈비츠 못지않게 악명 높은 트레블링카 수용소로 끌고 가기 직전 그는 탈출했고 훗날 독일을 대표하는 문학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되었다. 200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헝가리의 임레 케르테스도 아우슈비츠에 갇혔던 경험이 자신의 문학적 자양분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렇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문학은, 예술은 가능하다. 아니, 극한상황에서 예술은 더욱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인간이 인간을 말살하는 인간성의 실종 속에서 예술조차 의미를 갖느냐’는 물음은 도덕적으로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은 양심의 외침이 인류에게 던지는 빛이며 포기할 수 없는 것을 찾는 서치라이트다. 여기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인간은 본성에 내재된 악을 히틀러와 나치에 모두 투사하고 소각해 버린 뒤 이제 선하고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는가. 오늘의 인류가 처한 상황은 ‘아우슈비츠 이후’인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조금이라도 사람답게 살기 위해 고향을 등진 수십 명의 인간이 오늘도 생명과 존엄을 위협당하는 절망적 상황에 처해 있다. 그래도 우리는 돌아온 봄을 환영하며 나들이를 갔고 식사를 즐겼으며 TV를 보고 깔깔거렸다. 기자도 마찬가지고 이를 탓할 엄두는 없다. 그러는 동안 탈북자 강제 북송 중단을 위해 단식농성을 하던 국회의원 한 사람이 병원에 실려 갔다. ‘응원자’는 많았으나 그의 투쟁에 동참한 정치권 인사는 없었다.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가 지난달 24일 탈북자 강제 북송 중단 촉구 결의안을 통과시킨 것은 성과라 할 만하지만 최근 몇 년간 미국 외에 유럽연합, 영국 이탈리아 캐나다 의회까지 탈북자들의 상황을 청취했는데도 우리 국회는 단 한 번도 탈북자 청문회를 연 적이 없다. 공간으로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사라져 기념관이 되었다. 그러나 상징과 개념으로서의 아우슈비츠는 사라지지 않았다. 글을 쓰고 있는 이곳에서 한 시간 남짓 자동차로 달려가면 닿을 수 있는 국가에서 사람들이 꿈과 자유를 몰수당한 채 살아간다.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총 20만으로 추산되는 사람이 그 수용소 국가 안에 설치된 진짜 아우슈비츠형(形) 수용소에서 짐승처럼 살다 죽어간다. 그래도 우리는 ‘경계 밖’으로 치부한 사람들의 생명과 존엄보다는 부잣집 아이들까지 점심을 공짜로 먹어야 되느냐 아니냐는 문제에 더 몰두한다. TV에서는 ‘목장에서 행복하게 뛰놀며 자란 소들’에게서 짠 우유를 광고한다. 그런 우유를 마시면서 소들에게는 마음의 빚을 덜겠지만 정작 같은 핏줄의 형제들이 처한 현실에는 우리가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언젠가 저 공포의 국가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낱낱이 드러나고 중국에서 강제 북송된 사람들이 마주쳤던 일들이 밝혀지면 우리는 그때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다고 말해야 할까.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의 아리아 ‘잠들지 말라’는 ‘이길 것이다(vincero)’라는 높은 음의 외침으로 끝난다. 무엇을 이긴다는 것일까. 타타르의 왕자 칼라프는 중국의 투란도트 공주에게 내기를 건다. 밤새 자기 이름을 알아맞히지 못하면 자기와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다. 밤이 가고 동이 틀 것이라며 자신감에 차서 부르는 아리아가 이 노래다. ‘결혼행진곡’으로 친숙한 바그너의 ‘로엔그린’에는 반대의 이야기가 나온다. 정체불명의 기사는 여주인공 엘자와 결혼하기로 하지만 절대 자신의 이름을 묻지 말라고 한다. 의심에 빠진 엘자는 결국 이름을 묻고, 죽을 운명에 처한다. ‘결혼행진곡’은 알고 보면 이름도 모르는 신랑과 결혼할 신부를 위한 행진곡이었던 셈이다. 두 오페라에는 구조주의 문학자들이 세계의 민화와 전설에서 찾아내온 ‘이름 알아내기 동기’가 들어있다. 왜 이름이 중요할까. 구조주의자들의 설명은 이렇다. 예전에는 이름이 존재 전체와 등가(等價)였다. 이름을 빼앗기는(누설하는) 순간 존재는 상실될 수 있다. 이름이 그 신비한 기능을 결정적으로 잃은 것은 20세기 초 스위스 언어학자 소쉬르가 ‘이름이란 이것과 저것을 구분짓는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하면서였다. 올해 초 인터넷에서는 ‘인디언식 이름 짓기’가 화제였다. 출생연도와 날짜에 따라 이름이 규정된다는 것이다. 마침 여당도 16년 만에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당명 개정을 의결한 올해 2월 3일을 인디언식 이름 공식에 대입하면 ‘붉은 태양은 그림자 속에’다. 새 로고의 붉은색이 논쟁거리가 된 것이 어쩌면 예사롭지 않다. 인디언식 이름의 근거는 믿거나 말거나지만 시사하는 점이 있다. 소쉬르 이전에도 서양에서 이름, 특히 인명은 여러가지 중에서 뽑아 쓰는 ‘구분짓기’의 기호에 지나지 않았다. 성자(聖者)나 친지의 이름을 같은 세대 친척과 겹치지 않게 선택하는 것이 작명의 전부였던 것이다. 반면 중국과 한국을 포함한 다른 문화권에서 이름은 갓 출생한 자에 대한 소망과 희원(希願)을 반영한다. 기자도 유럽 친구들에게 이름이 ‘빛나는 종(鐘)’을 뜻한다고 설명해주면 눈을 반짝이며 매우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인다. 정당의 이름에도 나라마다 특징이 있다. 예외는 있지만 미국 일본 등은 서구의 인명처럼 ‘공화’ ‘민주’ 등 옛 전통의 익숙한 개념을 뽑아 쓰는 정당명을 선호한다. 한국은 ‘정의’ ‘참여’ 등 독특한 지향점이 드러나는 이름이 많다. 동양식 이름 짓기에 더 가깝다. 여당의 새 이름이야 마음에 드는 사람도, 들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에는 새 이름을 비틀고 씹는 킬킬거림이 가득하다. 여당이 예뻐서 지켜주고픈 마음에 하는 말이 아니다. 현재의 민주통합당으로 이어지는 옛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이 간판을 걸 때도 똑같이 수준 낮은 담론들이 판을 쳤다. 싸우면서 닮는다던가. 어쨌거나 채 두 달이 안 된 정당 이름들이 우리 정치계를 움직이게 됐다. 더도 덜도 말고 그 이름들이 희구하고 지향하는 가치의 절반이라도 이뤘으면 좋겠다. 각 당의 이름이 지향하는 대로 우리가 민주적 가치에 충실하고 국민통합을 이루며 새로운 세상을 열고… 정의롭고 열려 있고 새천년을 지향했다면 오늘날 ‘정치가 한국의 미래를 가로막는다’는 한탄이 나오겠는가. 우리 정당들에 당부하고 싶다. “소중한 국민 소망 키워 줘, 많이!”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이른바 ‘마야 달력’으로는 인류의 마지막 해가 될 2012년이지만, 미래를 내다보겠다는 전망과 예측은 끊이지 않는다. 인터넷에서는 112년 전 토목기사 존 앨프리드 왓킨스의 한 세기 뒤 전망이 화제가 되고 있다. 1900년 여성지에 쓴 칼럼에서 그는 ‘어디서나 실시간으로 사진을 전송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미국인의 평균 키가 1∼2인치 늘고’ ‘온실에서 야채를 재배하게 될 것’ 등을 전망했다. 제법 많이 맞힌 셈이다. 미래 예측은 19세기의 발명품으로 꼽힌다. 근대 이전에 미래 예측이란 종교적 ‘예언’과 같은 개념이었다. 두 번째 밀레니엄이 오는 순간 그리스도가 재림해 선한 사람들만을 천년 왕국으로 데려간다는 믿음으로 전 유럽이 전전긍긍했던 일이 대표적이다. 산업혁명 이후 기관, 전등, 전신 등 문명의 이기가 잇따라 출현하면서 사람들은 기술이 인간의 미래를 바꿔 놓으리라는 것을 예감하게 됐다. 유럽 대도시 곳곳에서 박람회가 열렸던 19세기 후반은 저널리즘과 픽션의 구분 없이 펼쳐진 미래 예측의 급성장기였다. 쥘 베른이 소설에서 해저와 우주를 쉼 없이 오가며 낙관적 미래상을 펼쳐냈던 것도 그때다. 19세기 마지막 해에 나온 왓킨스의 전망이 아니더라도 ‘오래된’ 미래 전망을 펼쳐보는 일은 각별한 재미를 준다. 오늘날 실현된 일을 짚어 보는 것이 흥미로우며, 실현되지 않은 것은 이유가 무엇일까를 숙고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1935년 1월 1일자 동아일보에도 흥미로운 미래의 예측이 펼쳐진다. 성층권에 ‘항공도로’가 생기고, 세계의 뉴스가 사진까지 보여주는 방송으로 진화하리라는 예언은 오늘날 실현됐다. 반면 ‘비행열차(모노레일)’가 장거리 운송수단으로 각광받으리라는 예측은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1971년 한국미래학회가 내놓은 ‘서기 2000년의 한국에 대한 조사연구’도 흥미를 자아낸다. 2000년 한국은 컴퓨터 1만 대를 보유하고, 필요한 정보는 컴퓨터 터미널을 통해 얻게 된다고 했다. 인터넷을 내다본 셈이지만 사람마다 컴퓨터를 갖게 될 것까지는 예측하지 못했다. 오늘날은 바야흐로 ‘미래 예측의 전성시대’가 됐다. 국가전략에서 개인의 투자전략까지 미래의 트렌드를 내다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어떤 것이 정확하고 어떤 것이 내실 없는 전망인지 달아보기도 쉽지 않다. 그렇지만 역사상의 수많은 예측과 그 결과에서 얻는 교훈은 분명 있다. 첫째, ‘예전에도 정확했으니 내 말을 믿으라’는 선동에는 현혹될 필요가 없다. 지난주 나온 책 ‘왜 똑똑한 사람들이 헛소리를 믿게 될까’(스티븐 로 지음·와이즈베리 펴냄)는 사람들을 미혹에 빠뜨리는 대표적 ‘심리적 파리지옥’으로 ‘일화 나열하기’ 전략이 있다고 지적한다. 여러 짐작을 나열한 뒤 몇 가지는 맞혔다는 점을 들어 신뢰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이다. 둘째, 인간의 기본적 생활양식인 언어와 음식문화에 획기적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는 항목이 있다면 버리는 것이 좋다. 이 요소들이 이웃한 문화권으로 침투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상기하면 된다. 식사를 알약으로 해결하게 될 것이라든지, 세계 언어가 통일된다든지 하는 예언들은 모두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왓킨스의 예언 중 대표적으로 틀렸다고 지목된 부분도 “알파벳에서 잘 쓰지 않거나 대체할 수 있는 X, Q, C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