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유윤종]슬프게 만드는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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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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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윤종 문화부장
유윤종 문화부장
이 초소 저 초소를 두드렸을 북한군 병사의 불안한 눈초리는 상상만으로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

서울시 대표 공연장의 사장이 ‘쌍용차 해고자 자살 같은 사례’를 공연에 반영하라고 서울시극단에 요구했다는 신문 제목 위에 가을의 양광(陽光)이 떨어질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노크 北병사’… 천박한 인터넷언론…

미성년 아이돌 그룹의 공연에서 카메라로 특정 부위를 ‘과도하게’ 부각하면 유해물로 규제하는 방안을 여성가족부가 추진한다는 소식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사춘기 남자들의 시선은 이미 카메라보다 훨씬 빠른 광속으로 아이돌 그룹의 전신을 스캔하고 있지 않을까. 과도함의 기준을 놓고서는 얼마나 말이 많을 것인가. 그런 상념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싸이의 ‘라이트 나우’를 비롯한 가요 300여 곡에 대해 청소년유해매체물 판정 철회 결정이 나온 것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 사회에서 ‘기준’은 여론의 압력 ‘데시벨’과 적용 대상의 위상에 따라 얼마나 탄력적인가. 이렇게 쓴 것을 일부 누리꾼이 ‘판정 철회는 잘못된 일이다’라는 주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또한 기자를 슬프게 한다.

지난주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감사에서 야당의원이 중학 교과서 검정위원회 수정 요구를 문제 삼아 국사편찬위원회를 ‘친일’로 몰아붙였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실제로는 국편이 ‘을사늑약’이라는 표현을 빼도록 한 것도 아니며, ‘성노예’라는 표현을 뺀 것도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잘 풀어 설명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4·3사건을 ‘무장봉기’로 수정하도록 했다는 말도 근거가 없으며, ‘무장봉기’라는 표현도 원저자의 표현에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국사편찬위원장이 현장에서 해명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보고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는 쓸쓸한 장면 역시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한때 국내 최고의 교향악단으로 꼽히던 악단이, 법인으로 바뀐 뒤 지명도와 실력을 함께 갖춘 지휘자를 초빙하려 하자 단원들이 조직적으로 번갈아 “우리 악단의 법인화는 잘못된 일이다”라는 메일을 보냈다는 소식이 우리를 다시 슬프고도 부끄럽게 한다. 해당 지휘자는 이에 일찌감치 한국행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화음을 맞춰본 지도 이미 오래인 단원들은 세계적으로 날로 위상이 도약하는 ‘옛 경쟁자’ 서울시립교향악단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언론으로서의 전문성도, 책임의식도 없는 인터넷 언론들이 오늘도 유수 포털 사이트의 앞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연예인 치골’ 어쩌고 하는 제목은 언제 사라질 것인가. 치골(恥骨)은 문자 그대로 부끄러운 부분의 뼈로서 남에게 보일 수 없는 곳이다. 골반 또는 엉덩뼈가 언제부터인가 엉뚱한 곳에 있는 뼈의 이름으로 입에 오르내리게 된 사실이 우리를 슬프고도 부끄럽게 한다.

하긴 안톤 슈나크의 수필도 빠졌으니

‘울음 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로 시작하는 안톤 슈나크의 수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 대해 알아본 결과 1980년대에 고교 국어교과서에서 빠졌더라는 사실이 필자를 쓸쓸하고 슬프게 한다. 청천 김진섭이 광복 직후 번역한 이 글은 1953년부터 교과서에 실려 수많은 학생들의 마음속에 각인됐다. 물론 교과서는 항상 바뀌는 것이고 시대가 모범으로 삼을 만한 텍스트는 변화한다. 그러나 이 독특한 색깔의 수필이 주는 향취를, 이 칼럼을 읽을 젊은 세대와 미리 공유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아쉽기 그지없다.

끝으로, 슈나크의 글을 인터넷에서 찾아본 결과 ‘우리를 술푸게 하는 것들’이라는 단상이 의외로 많이 검색된 사실이 필자를 슬프게 한다. 1950∼80년대 고교를 다닌 세대는 오늘날 술(酒)을 퍼마셔야만 풀릴 삶의 애환이 그리 많은 것일까.

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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