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유윤종]좋아하면 닮는 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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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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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윤종 문화부장
유윤종 문화부장
밴드 ‘장미여관’의 노래를 듣고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쉬고 가자’며 이성 술친구를 꾀는 내용이다. 1980년대에 기존 성윤리 타파를 외쳤던 마광수 교수의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와 그의 거침없는 발언들은 당시 적잖은 공격을 받았지만 그의 언어 속에 들어있던 ‘밈(meme)’은 한 세대를 지나 오늘날 밴드 ‘장미여관’에 복제돼 전파되고 있다.

아직은 낯설지만 ‘밈’은 오늘날 인문 사회 자연과학계를 통틀어 가장 ‘뜨거운’ 개념 가운데 하나다. 1960년대 토머스 쿤의 신조어 ‘패러다임’이 오늘날 일상어가 된 것처럼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창안한 ‘밈’도 다음 세대 일상어로 자리 잡을지 모른다.

밈이 무엇인가? 세상의 정보와 문화, 사상은 복제된다는 속성을 갖는다. 생명체의 특징을 복제 전파하는 것이 유전자(gene)라면 작은 몸짓부터 장대한 예술작품까지 정보와 문화를 복제 전파하는 낱낱의 의미가 밈이다.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종(種)처럼 강력한 밈을 가진 책이나 사상은 강력히 퍼져나간다. ‘멘털붕괴’ 같은 신조어가 인터넷에 만연하면 그것은 그 말이 가진 밈이 강력함을 나타낸다. 세계의 수많은 10대 소녀가 케이팝에 매료되는 것은 그 밈이 큰 전파력을 가진 것을 의미한다.

육종학자들이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품종을 개발하듯 한류의 밈도 강화할 수 있다. 변화하는 환경에서 땅파기, 날기, 위장 등 ‘주특기’를 개발한 생물종이 살아남은 것처럼 ‘왜 독특한가’ ‘왜 다른가’로 호소하는 차별성 전략은 한류의 번영을 위해 우선 고려해야 할 요소다.

‘좋아하면 따라한다’는 세상사의 철리 또한 밈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이국의 소녀들이 광장에 모여 한국 걸그룹을 따라하는 모습은 말할 것도 없다. 도킨스는 저서 ‘조상 이야기’에서 기숙학교 상급생들의 독특한 걸음걸이를 회상했다. 으스대는 듯이 걷는 모습에 매력을 느낀 하급생들이 이를 모방하면서 이 걸음은 그 학교의 독특한 문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은 축구선수나 배우 같은 숭배 대상으로부터 밈을 모방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이런 에피소드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종북 의심을 받고 있는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의원은 기자들을 부르면서 ‘일꾼’이라고 표현했다. 북한에서는 기자를 ‘보도일꾼’으로 부른다. 이 정당 당원들이 북한 노동당처럼 당원증을 들어 ‘찬성’의 의사를 표현하는 사진도 눈에 거슬린다.

1980년대 언젠가 대학가에서는 ‘담보하다’ ‘창발성’ 등의 말이 대자보와 전단에 만연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담보’란 ‘맡아서 보증하는 것’이란 뜻의 명사로만 알았지 ‘이뤄내도록 약속하다’라는 뜻의 동사로 쓰는 것은 생경했다. 전단을 준 선배에게 물어보니 “응, ‘조선’ 문건에선 자주 쓰는 말이야. 좋은 표현은 함께 써야지”라고 했다. 최소한 내가 알기에 그가 당시 ‘조선’을 사랑했던 것은 분명했다.

잘 안다. 북한 지배층 흉내를 낸다고 해서 벌을 줄 수는 없다. 기자도 후배들을 독려할 때 농담 삼아 “마감시간 준수 투쟁에 ‘떨치여’ 나서자”는 메시지를 보내곤 한다. 그래도 ‘북한의 지배자를 사랑하다 저렇게 따라하게 됐나’라는 궁금증을 가질 권리는 분명 있다. 국민이 뽑은 선량(選良)으로 입법의 막중한 책임을 가진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지난 총선 전 이 같은 모습들을 알 기회가 너무 적었다는 데 기자 주변의 많은 사람이 자신의 투표 성향과 관계없이 공감하고 있었다.

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광화문에서#유윤종#종북주의#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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