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유윤종]세계에 퍼지는 바른 소리

  • Array
  • 입력 2012년 5월 14일 03시 00분


코멘트
유윤종 문화부장
유윤종 문화부장
모차르트의 작품을 모차르트 생전의 악기로 연주하면 반음 정도 낮게 들린다. 200년이 넘는 동안 연주자들이 조금씩 소리를 높여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다르다. 세종대왕이 정해진 소리를 내는 율관(律管)을 제작해 음높이가 변하지 않도록 규정한 것이다. 훈민정음과 다른 또 하나의 정음(正音)이라 할 만하다.

세종대왕의 업적 중에는 정밀성과 계측을 강조한 것이 많다.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가 그렇고, 천문기구인 간의 혼천의 등도 그렇다. 우주의 엄정한 질서를 강조한 주자학적 세계관이 반영된 것도 이유겠지만, 매사에 ‘대충’을 허용하지 않았던 세종대왕의 성격이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

훈민정음, 즉 한글도 그렇다. 각 자모의 발성 원리와 쓰임새를 엄밀히 규정해 배우기 쉬우면서도 음가가 변하지 않도록 했다.(로마자의 C나 E, O가 나라와 시대에 따라 얼마나 다른 소리를 내는지 상기해 보라) 그 원리와 쓰임새를 상세히 설명한 책이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이다.

세종대왕이 ‘백성이 자기의 뜻을 널리 실어 펴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글 창제 의의를 밝혔지만 오늘날 한글이 주는 혜택은 한반도의 영역을 넘는다. 한국 포털의 ‘지식인’ 격인 해외 인터넷 ‘Q&A’ 코너들을 보면 ‘일본어와 한국어 중 어느 쪽이 배우기 쉬운가’라는 질문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일본어는 한국어보다 발음하기 쉽다. 반면 한국 글자인 한글은 하루면 배울 수 있다”는 답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

케냐인인 제인(20)은 수도 나이로비에서 한국 정부가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세종학당에 다닌다. 그는 2년 전 명문대에 합격했지만 등록금 때문에 진학을 포기했다. TV와 인터넷으로 ‘주몽’ ‘광개토태왕’ 등을 보며 한국 문화에 빠져 있던 그는 세종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던 친구가 장학금을 받고 한국에 유학 가는 것을 보고 기적을 꿈꾸게 됐다. 한국에서 정치학을 배운 뒤 고국 발전에 큰 힘이 되는 게 그의 소망이다.

제인의 이야기는 우리가 주목하지 못한 ‘아프리카 한글 한류’의 한 사례일 뿐이다. 세계 곳곳에 또 다른 ‘제인’이 수천수만 명을 헤아린다. 세종의 치밀한 정신과 창조성은 이렇게 온 세상에 퍼지는 밈(meme·유전자처럼 전파 확산되는 문화기호)을 낳았다.

이토록 훌륭한 선물을 받았지만 세종대왕 앞에서 우리는 송구할 수밖에 없다. 경북 상주에서 2008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새롭게 발견되었는데도 지금 소재조차 알 수 없는 현실 때문이다. TV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도 이 값진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높였지만 우리 후손들은 관심에 값하는 존중조차 보여드리지 못했다.

사건의 빠른 해결을 당부하는 동시에 오늘날 한글이 하나의 문자체계에 그치지 않고 한국 문화의 풍요성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음도 상기하고자 한다. 조선의 풍부한 시조와 소설, 대한제국기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근현대 문학의 자산이 한글을 통해 표현되고 쌓여왔다. 세계의 젊은이들이 한글로 된 케이팝 가사를 따라 부르고 한국 드라마 대사를 원문으로 읽어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 노력에 상응하는 의미에서라도 10월 9일 ‘한글날’은 ‘한국 문화의 날’의 의미까지 담아내야 한다. 공휴일 복원 논란은 따로 논하더라도.

내일 15일(양력)은 세종대왕의 탄생 615주년 기념일이다. 1965년에 스승의 날을 5월 15일로 정한 데도 ‘겨레의 위대한 스승’ 세종대왕을 기리는 의미가 담겨 있다.

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세종대왕#한국어#한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