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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의 도발]코로나19, 독재자 끌어내릴까

김순덕 대기자 입력 2020-09-11 14:42수정 2020-09-11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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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루스가 코로나19 여파에 무너진 첫 독재국가로 기록될지 모르겠다. 공산주의 소련 붕괴로 독립한 이 나라를 26년째 철권통치하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66). 한 달 전 대선에서 6선에 성공했지만 반(反)독재 시위는 갈수록 격해진다. 대선 후보를 포함한 여성 리더 3명이 추방, 납치되는 일까지 벌어져 세계가 좌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나라의 첫 노벨문학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목소리 소설’을 썼다. 지금 벨라루스의 민주주의는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어 더 관심을 끈다.

‘벨라루스의 잔다르크’로 불리는 야권 여성 정치인 3인방. 베로니카 쳅칼로, 스베틀라나 티하놉스카야, 마리아 콜레스니코바(왼쪽부터). 민스크=AP 뉴시스


● 여자의 얼굴을 한 벨라루스 민주주의
2001년, 2006년, 2010년 그리고 2015년 대선 때도 부정선거 규탄 시위는 있었다. 지금 같지 않았을 뿐이다. 독재 아래 오래 살아선지 벨라루스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온순’하다. 소련이 해체될 때도 대다수가 소비에트연방에 남기를 원했을 정도다. 하원의원 110명을 뽑는 작년 선거에서도 야당 의원은 한 명도 안 뽑혔다(친정부 성향의 무소속이 89명, 나머지는 공산당과 노동정의당 등 친정부 정당 소속 의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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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평화로운 정치판에 ‘쎈 언니’ 3명이 떴다(셋 다 미스유니버스대회급 미녀들이다). 루카셴코는 대선 때마다 유력 주자들에게 누명을 씌워 주저앉히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번엔 출마가 막힌 정치인 대신 그 아내가 대선 후보로 나선 것이다.

“정치보다 부엌에서 돈가스 튀기는 게 더 좋다”던 스베틀라나 티하놉스카야(38)의 당선을 위해 유력 주자의 부인 베로니카 쳅칼로, 또 다른 유력 주자의 선거운동원 마리아 콜레스니코바(38)가 합류하자 공기가 달라졌다. 투표가 공정하게 진행된 투표소에선 티하놉스카야의 표가 70% 이상 나왔다는 게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보도다.

그럼에도 루카셴코는 80%가 넘는 득표율로 당선됐다. 세 여성 리더는 독재자의 탄압에 추방됐거나 체포됐다. 여자들이 백러시아라는 나라 이름대로 흰 전통의상을 입고 시위에 나섰는데 남자들이 몸 사릴 리 없다. 그리하여 독재자를 끌어내리는 데 성공한다면, 벨라루스의 국민적 사랑을 받는 명화 ‘에바’에서 따온 ‘에발루션(Eva+revolution) 혁명’이 되리라는 외신까지 나왔다.

부정선거 논란에 휩싸인 동유럽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 AP 뉴시스


● 독재자에게는 국민보다 권력이 중하다
벨라루스는 선거로 독재의 정당성을 입증해온 선거권위주의 정권이다. 달랑 부정선거뿐이라면 시위는 진작 진압됐다. 이번 시위가 과거와 다른 건,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정권의 형편없는 대응이 뇌관으로 깔려 있다는 점이다.

첫 확진자가 발생한 2월 28일, 루카셴코는 “(이웃나라) 폴란드에 발이 묶인 러시아인들이 벨라루스를 통과해 귀국하게 해주겠다”고 나서 제 국민을 분노시켰다(국경 폐쇄가 효과적이지 않다던 어느 대통령이 연상된다). 5월 9일엔 수천 군중을 모아놓고 2차 세계대전 전승 기념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벌여 2주 후 이 나라를 100만 명당 확진자 수 상위 10개국에 올려놨다.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가 없는 나라에서 반대가 빗발쳤지만 대선이 닥친 루카셴코에겐 국민의 생명보다 중한 게 있었던 거다. 대통령 권력을 지켜주는 군과 경찰의 사기!

그 결과 인구 980만 명도 안 되는 이 나라의 코로나19 확진자가 7만3000여 명, 사망자가 720여 명이다. 100만 명당 확진자로 따지면 세계 평균(3549명)의 두 배가 넘는 7777명이다. “루카셴코가 국민을 뭘로 보는 건지, 뒤늦게 국민이 알게 된 것”이라는 콜레스니코바의 외신 인터뷰도 있다. 대통령이 지금까지는 기업이나 반정부 세력을 증오의 대상으로 지목해 왔는데 알고 보니 전체 국민을 적(敵)으로, 노예로 여기더라는 대목에서 나는 울컥했다.

8월 10일 동유럽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에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의 장기집권 연장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민스크=AP 뉴시스


● 자유냐 소시지냐,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

벨라루스는 북한과 함께 ‘폭정의 전초기지’로 지목된 나라다. 소련 붕괴 후 동유럽 국가처럼 민주화 해본 적도 없어 아직도 KGB라는 이름의 비밀경찰이 대통령의 개 노릇을 한다. 벨라루스의 남쪽 국경과 맞닿은 우크라이나가 2004년 오렌지혁명,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두 번이나 대통령 당선자와 대통령을 갈아 치운 것과 참 대조적이다.

하지만 경제로 따지면 벨라루스가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에 육박하는 반면 우크라이나는 1만 달러를 못 넘는다(나라 면적과 인구 규모는 우크라이나가 훨씬 크다). 세계은행의 ‘기업하기 좋은 환경’에 이유가 있을까 싶어 2019년 순위를 보니 벨라루스가 190개 국가 중 49위, 우크라이나는 64위였다.

한때 벨라루스에선 “자유냐, 소시지냐” 같은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한때 법무장관이었던 조국은 “중요한 건 용이 되지 않아도, 개천에서 가재·붕어·개구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독재국가와 독재가 아닌 국가 중 어디가 나은지 나는 잠깐 고민했다.

벨라루스의 국민적 사랑을 받는 명화 ‘에바(Eva)’. Art-Belarus 홈페이지


● 독재자에게 ‘가붕개’ 운명을 맡길 텐가
벨라루스 민주화를 응원하는 인터넷 매체 ‘벨라루스 다이제스트’에서 답을 발견했다. “우크라이나엔 국회에 야당이 있어 정쟁이 요란하다. 그러나 정부가 못하면 교체를 할 수 있다. 벨라루스에선 루카셴코를 빼고는 모든 법과 제도가 무의미하다. 부자나 기업인도 야권을 지원하거나 대통령 눈 밖에 나면 한순간에 날아간다.”

루카셴코도 이번엔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다. 평화시위를 벌이던 시민 두명을 죽음으로, 수천 명을 감옥으로 몰아넣고도 모자라 “벨라루스가 무너지면 다음은 러시아 차례”라며 동색의 러시아 대통령 푸틴에게 신호를 보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나라를 팔아먹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판국이다.

독재자가 안정과 성장을 제공하고 가붕개(가재·붕어·개구리)는 독재를 묵인하는 ‘사회적 계약’은 깨졌다. 평화로운 척했던 개천은 뒤집어졌고 가붕개는 더러운 물로 돌아갈 수 없다. 내가 용이 될지 말지를 대통령이 정하는 나라, 집권세력 자제들만 용 되는 나라에서 나는 살고 싶지 않다. 벨라루스의 자유와 민주, 그리고 쎈 언니들의 귀환을 빈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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