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고/목소리도 마치 전생의 무늬 같다/취기만이 당신인 것처럼 곁에 앉았는데/많이 잘해주지 못해서 마음은 비었고/많이 안아주지 못해서 손도 비었다/꼭 내가 당신을 배반한 것 같다”(시 ‘공항에서’에서)
고독의 미학을 담아낸 허수경 시인(1964∼2018)의 유고시집이다. 1992년 한국을 떠나 독일 유학길에 오른 고인이 위암 말기 진단을 받고 2018년 10월 세상을 떠난 지 8년 만에 발간됐다. 작고 직전까지 남긴 시 42편과 산문 3편이 담겼다. 고인과 절친한 사이였던 김민정 시인이 남겨진 작품들을 모으고 골라 엮었다.
이번 시집의 표제작은 고인이 남편을 생각하며 쓴 시다. 정작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됐지만.
“가끔 생각하지,/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나는 구십이 넘어 연가 한 편을 꼭 쓸 거라고// … 나를 일으켜주던 간병인은 말할지도 몰라/오늘 얼굴이 환하세요 꼭 새색시, 같으세요/나는 웃으며 대답하겠지/오늘은 구십 년 동안 기다려온 연가를 쓰는 날이라오”
1987년 등단한 이래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2016년) 등을 통해 서정적인 시를 선보여 온 고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만남과 이별, 연민과 사랑을 다뤘다. 시는 ‘공항에서’를 시작으로 고인이 매겨둔 번호 순대로 수록됐다고 한다. 시를 삶의 언어로 삼아 온 시인. 지상에 남긴 그의 마지막 손글씨 내용은 이렇다.
“다시 태어나도 시를 쓸 것인가?”/이 모든 시간을 다 합하여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예!”/하고 저는 답할 것입니다.(2018년 6월 28일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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