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 닳았던 어린 손, 30대에 최북단 철문을 열다 [그 마을엔 청년이 산다]

  • 동아닷컴
  • 입력 2026년 6월 12일 16시 06분


철원 청년마을의 본부인 최북단 레스토랑 ‘오픈더문’
철원 청년마을의 본부인 최북단 레스토랑 ‘오픈더문’

민간인통제선(민통선)과 맞닿은 강원 철원군 최북단의 한 브런치 카페. 이곳의 창문은 모두 북쪽을 향해 나 있다. 맑은 날이면 북녘 산하가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곳에서 ‘총각 엄마’가 된 남자와 그 손에서 자란 ‘고향 잃은’ 청년들이 ‘철문’을 열고 있다.

올해 행정안전부 지원 청년마을 사업에 도전한 북한이탈청년그룹 ‘철문열다’의 이야기다. 단순한 귀촌·창업 이야기가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견뎌야 했던 청년들이 접경지에서 일구는 ‘미리 만나는 통일 마을’이다.

누군가는 함흥에서, 누군가는 양강도에서 넘어왔다. 어떤 이는 여섯 살에 홀로 국경을 건넜고, 어떤 이는 약초를 캐다 두만강을 넘었다. 그렇게 흩어질 뻔했던 삶들이 지금 철원에서 한 가족이 됐다.

‘총각 엄마’ 김태훈 씨
‘총각 엄마’ 김태훈 씨

‘총각 엄마’ 태훈 씨와 북에서 온 아이들

이곳의 공동대표 김태훈 씨는 부모 역할을, 북한 출신인 염하룡 씨는 전체적인 운영과 리더 역할을 맡아 동생들을 이끈다.

20여년 전 디자인을 전공하고 평범한 회사생활을 하던 태훈 씨. 그는 우연한 계기로 부모 없이 홀로 남겨진 탈북 아동을 만나게 됐다. “하룻밤만 같이 있어 달라”는 아이의 그 간절한 손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 시작이었다.

철원 새끼줄 축제에 참가한 멤버들
철원 새끼줄 축제에 참가한 멤버들

한 명이던 아이는 둘이 되고, 어느덧 열 명이 한솥밥 먹는 가족이 됐다. 결혼도 안한 태훈 씨는 그렇게 ‘총각 엄마’가 됐다. 태훈 씨는 아이들이 사회에 건강하게 뿌리 내릴 수 있는 모델을 고민했고, 그 답을 철원에서 찾았다.

멤버 한진범 씨는 열네 살 때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혈혈단신으로 두만강을 건넜다. 처음 태훈 씨를 만났을 때 잔뜩 겁에 질려 있었고, 너무 많은 노역으로 어린 손에 지문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아홉 살에 어머니와 고비사막을 건너 한국에 온 김원일 씨는 어느덧 30대 청년이 됐다. 이탈리안 요리가 입에 맞지 않았던 그는 이제 파스타를 가장 잘 만드는 셰프가 됐다.

오픈더문 주방에서 음료를 만들고 있는 멤버들
오픈더문 주방에서 음료를 만들고 있는 멤버들

막내 김금성 씨는 열여섯 살에 어머니와 북한 국경을 넘었지만 중국에서 생이별을 하고 홀로 한국에 왔다. 7년이 지난 지금도 어머니 생사를 걱정하며 눈물 흘린다.

함흥 출신의 염하룡 공동대표는 열한 살 때 중국과 몽골 국경을 넘어 한국까지 왔다. 철없던 당시에는 엄마 따라 여행 가는 줄로만 알았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몰랐다.

그는 남 못지 않게 열심히 살았다. 경북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청년창업지원사업으로 치킨집과 분식집도 운영했다. NGO에서 인구소멸지역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지원사업도 했다. 안정적인 일이었지만 결국 서울을 떠나 철원으로 왔다. 이유는 단순했다. “같이 미래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철원 새끼줄 축제에 참가한 멤버들
철원 새끼줄 축제에 참가한 멤버들

살기 위해 넘었던 국경, 이제 ‘살고 싶은 마을’로

2018년 8월. 이들은 철원 최북단 외진 도로변에 주황색 컨테이너를 쌓아 브런치 카페 ‘오픈더문’을 열었다. 철원의 문화를 연다는 의미이자, 남과 북의 닫힌 문을 연다는 중의적인 뜻이다. 초기에는 외진 위치 탓에 적자를 면치 못했지만, 지금은 타 지역에서도 찾는 명소가 됐다.

‘농사’에도 도전했다. 북한에서 자기 땅 한 뼘 없던 이들에게 철원의 흙은 정직한 수확의 기쁨을 가르쳐줬다. 비닐하우스를 짓고 3년간 연구한 끝에 당도 높은 토마토를 수확했다. ‘썬드라이드 토마토’라는 상품도 내놨다. 낯선 청년들을 경계하던 주민들도 이제는 농사 비법을 전수해 주며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2019년~2022년 철원 어깨동무공동체와 독일, 남한, 북한 청년 농활에 참가한 청년들
2019년~2022년 철원 어깨동무공동체와 독일, 남한, 북한 청년 농활에 참가한 청년들

수혜자 아닌 개척자로…

청년들은 한걸음 더 도약을 준비 중이다. 행안부가 지원하는 ‘청년마을’이다. 그동안 철원은 늘 분단의 상징으로 불렸다. 군사도시, DMZ, 안보관광…

이들은 통일을 거창한 정치 담론이 아니라, 함께 만나 밥 먹고 일하고 살아보는 생활의 문제로 풀어보고자 했다. 추진하는 사업은 크게 세 가지 축으로 압축된다.

첫 번째는 ‘접경라이프 프로젝트’다. 북한 출신 청년이 로컬 가이드로 철원을 안내하고 함께 살아가는 체류형 프로그램이다. 외부 청년들은 2박 3일, 길게는 한 달 동안 일상을 살며 통일마을을 경험한다.

두 번째는 ‘철원형 로컬 브랜드’다. 철원의 소시지·순대 같은 가공식품 브랜드를 직접 개발하고 판매할 계획이다. 철원 특산물과 북한 식문화를 결합한 ‘철원한끼’ 프로젝트로 수익 구조를 만들 계획이다. 염 대표는 함흥 출신답게 함흥냉면을 상품화한다.

24년 ‘내 친구 북쪽이’ 숏폼드라마 ‘우리 형아’ 제작
24년 ‘내 친구 북쪽이’ 숏폼드라마 ‘우리 형아’ 제작

세 번째는 ‘피스메이커’ 네트워크다. 철원 곳곳의 카페·상점·청년공간을 연결해 지역 전체를 하나의 통일마을로 구성하는 프로젝트다. 철원의 특수성을 ‘안보 관광’이 아닌 ‘평화와 공존’으로 바꾸겠다는 실험이다. 접경지역을 배경으로 다큐멘터리, 숏폼드라마 등 다양한 영상콘텐츠도 만들 예정이다.

살기 위해 건넜던 국경 끝에서, 이들은 누군가 살고 싶은 마을을 만들고 있다. 태훈 씨는 “북한 출신을 수혜자로만 보는 시선이 있는데, 우리의 힘으로 멋지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철원에서 ‘미리 만나는 통일마을’을 저희가 보여드리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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