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쓴 글 모두 학습한 AI, 시 창작 넘어 시인 정체성까지 창조”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4월 18일 01시 40분


[토요기획] AI가 시 쓰는 시대
‘AI 문학 미래’ 전문가 3인 진단… “창작에 스마트폰 쓰듯 AI 사용”
해외선 이미 AI 문학 실험 활발… 창작자 아닌 ‘큐레이터’ 될지도
AI-인간 문학 구별 어려워지면… 기존 문학, 명품 되거나 골동품

《2022년 11월 서울 대학로의 한 무대.

김언 시인은 인공지능(AI)에 자신이 2012년에 쓴 일기를 입력한 뒤, 이를 바탕으로 2022년의 ‘미래 일기’를 써 보라고 했다. AI는 곧바로 새로운 일기를 만들어 냈다. 당사자가 무대 위에 서 있는 상황에서, 기계가 그의 일기를 대신 쓰는 장면. 관객들은 개인의 경험을 담는 일기가 AI에 의해 쓰이는 과정을 눈앞에서 지켜봤다. 일종의 퍼포먼스였던 이 실험은 창작 과정 자체가 감상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15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어쩌면 문학이 아닐지도 몰라’ 공저자 3명이 ‘AI 문학’ 대담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허희 문학평론가와 권보연 사이버텍스트 디자이너, 김언 시인.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15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어쩌면 문학이 아닐지도 몰라’ 공저자 3명이 ‘AI 문학’ 대담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허희 문학평론가와 권보연 사이버텍스트 디자이너, 김언 시인.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AI가 소설이나 시를 쓸 수 있다는 건 이제 더 이상 생소한 주제가 아니다. 이미 해외에선 AI를 활용한 다양한 창작 실험이 이어지고 있다. AI라는 새로운 ‘글쓰기 도구’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또 인간은 이런 시대에 무엇을 할 것인가.

2022년 무대를 함께 기획했던 김 시인과 허희 문학평론가, 권보연 사이버텍스트 디자이너가 15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 모여 ‘AI와 문학의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했다. 세 사람은 2024년 3월부터 매달 AI 문학 스터디를 이어 왔다.

김 시인은 산업공학을 전공한 ‘공대 출신 시인’이고, 권 디자이너는 정보기술(IT) 업계 경력을 바탕으로 AI로 글 짓는 방식을 설계하고 있다. 허 평론가 역시 인공지능과 문학의 관계를 탐구하는 ‘AI 포에틱스’를 주요 연구 축으로 삼고 있다. 기술과 문학을 함께 다뤄 온 공통점을 지닌 세 사람은 최근 공저 ‘어쩌면 문학이 아닐지도 몰라’(리메로북스)도 펴냈다.

● “AI 안 쓰는 작가 없다”

권보연=요즘 작가들 중에 AI를 아예 사용하지 않는 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AI를 쓰는 영역이 검색이냐 창작이냐의 차이일 뿐, 하나도 안 쓸 수는 없다. 구글 검색 자체가 이미 AI를 바탕으로 작동하지 않나.

김언=이런 질문은 이제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작가가 있을까’라는 질문과 비슷해졌다. 적극적으로 활용해 자기 문학의 일부로 삼든, 아니면 단순한 자료 조사에 그치든 AI는 이미 스마트폰처럼 쓰이는 시대에 들어섰다고 본다.

허희=최근 황석영 작가가 소설 ‘할매’를 쓰면서 자료 조사에 챗GPT를 활용했다는 점이 언론에서 크게 다뤄졌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까지 대서특필할 일인가 싶었다. 한국 문학장에서 AI를 바라보는 수준이 아직 여기까지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약하다.

권=다른 작가들이 적극적으로 AI 활용을 드러내지 않는데, 굳이 숨길 일도 아니라고 본다. 작가가 자료 조사를 할 때 AI를 활용하는 건, 길 찾을 때 내비게이션을 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AI 문학이 겨냥하는 지점은 그보다 훨씬 더 멀리 있다. 예를 들어 김언 시인이 그동안 쓴 시와 글을 모두 학습시켜, 그것을 바탕으로 전혀 다른 ‘어떤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AI가 인간과 구별되지 않는 표현을 만들어 내는 시대가 온다면, 문학은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AI 윤동주가 윤동주와 얼마나 비슷한가’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더 할 수 있는 게 많은데, 수면 위에서만 맴도는 느낌이다.

허=유발 하라리가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 AI가 음악에서 차이콥스키를 넘어설 필요는 없고, 브리트니 스피어스만 능가하면 된다고. 그 말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한강 작가나 김혜순 시인을 뛰어넘는 작품을 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권=애초에 ‘뛰어넘는다’는 발상 자체가 크게 의미 있는지 의문이다. 특정 예술가를 넘어서기 위해 창작하는 사람은 없다. 각자 자기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다.

● AI 문학의 다양한 얼굴

허=미국 시인 찰스 번스타인은 자신의 평생 저작을 AI에 학습시켜, 자신의 언어관에 입각한 새로운 시가 가능한지를 실험했다. 번스타인은 여기서 스스로를 창작자가 아니라 큐레이터로 설정하고, AI가 생성한 텍스트를 선별하고 재배열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인간의 창작물도 기계의 산출물도 아닌, 일종의 ‘제3의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AI는 번스타인의 시적 스타일을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가의 기억과 정체성까지 흡수하려는 시도를 보여줬다.

권=AI 문학은 공연 형식으로 풀면 훨씬 더 흥미로울 수 있다. 결과물보다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 이른바 ‘블랙박스’를 들여다보는 것 자체가 문학적 체험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책이라는 형식은 AI 문학으로선 오히려 불리한 측면이 있다. 분량이나 지면의 한계 때문에 그런 과정을 충분히 전달하기 어렵다.

김=카메라와 회화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카메라가 등장했다고 해서 회화가 사라진 건 아니다. 두 영역이 일부 향유층을 공유하면서도 각자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AI 문학과 인간 문학도 제로섬 관계라기보다 서로 다른 문학성을 향해 가지를 뻗어갈 가능성이 있다.

권=조금 도발적인 사례를 하나 소개해 보겠다. 2008년 세계 시인 3164명의 이름을 내건 시선집 ‘이슈1’이 공개된 적이 있다. 그런데 실제로 작품을 보낸 시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편집자들이 기존 문학계에 충격을 주기 위해 AI로 생성한 시를 넣고, 시인들의 이름을 무단으로 기재했다. 당시 이름을 도용당한 시인 베리 슈왑스키는 “이 사건 덕분에 AI 시대의 시인이 겪게 될 위기를 미리 경험했다”고 말했다. 이런 사례는 앞으로 더 쉽게 반복될 수 있다. 예컨대 김언 시인의 이름을 단 시집이 김 시인과 무관하게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막 팔리는 일이 없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김=고속도로에서 좀 팔렸으면 좋겠다.(웃음)

● 다음 세대는 무엇을 읽을까

권=생성형 AI를 극한까지 밀어붙여 1000만 편의 시를 만드는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종래의 미적 기준으로 보면 ‘쓸데없다, 자원 낭비다’라고도 할 수 있는 시들이다. 하지만 AI는 이전에 무엇을 했는지 따지지 않고 큰 의미를 두지도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향유’라는 개념이다. 즐길 수 있는 것, 즉 놀이로서의 의미는 분명히 있다.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놀이를 원한다. 그게 문학이든 쇼츠든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문학이 그런 즐거움을 담당했다. 제가 대학 다니던 1990년대만 해도 한국 소설의 황금기였고, 대학생이라면 자연스럽게 소설을 읽는 분위기가 있었다. 지금은 다른 방식의 놀이를 계속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이 방향이 맞는가’라는 질문 자체는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이미 변화는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김=앞으로는, 작품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보다 ‘지금 나에게 무엇을 주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세대가 등장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즉각 소비할 수 있는 ‘기성품’ 같은 문학이 따로 있을 것이다. 반면 기존 문학은 시장에서 밀려나 골동품처럼 남거나, 기성품과는 다른 ‘명품’으로 자리 잡거나, 그 사이 어딘가에 놓이게 될 것 같다.

허=문학은 사라진다기보다 층위가 나뉘는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읽는, ‘어쨌든 문학은 인간이 하는 것이고 인간 사유의 정점’이라고 여기는 독자들도 계속 존재하지 않겠나. 대다수 95%의 독자는 결과를 볼 것이다. 이게 얼마나 재미있나, 나에게 얼마나 즉각적인 만족을 주는가. 다만 나머지 5%가 있기 때문에 (기존 방식의) 문학도 가능해진다.

권=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건 AI 문학이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이 무궁무진하다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선 ‘사건’을 일으키는 예술가들이 필요하다. 단순히 문체를 흉내 내는 게 아니라 한 작가의 모든 저작을 학습시켜 전혀 다른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까지 밀어붙여 봐야 한다.

허=그래서 대가들이 좀 적극적으로 나서 주길 바라고 있다.

권=김 시인부터 제가 설득을 해보려고 한다. 한번 사건을 일으켜 보자.

김=생각을 좀 해 보겠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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