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기술 경쟁은 곧 데이터센터 구축 경쟁이기도 하죠. 빅테크 기업들이 천문학적인 금액을 데이터센터 건설에 쏟아붓고 있는 이유입니다. 국내 메모리 반도체 업계의 초호황을 이끄는 원동력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AI 데이터센터가 늘어갈수록 데이터센터에 대한 혐오도 커져 갑니다. 세계 곳곳에서 지역주민과 정치인이 뭉쳐서 ‘우리 지역엔 안 된다’며 데이터센터 건설을 막아 세우고 있죠. AI 산업의 ‘물리적 병목지점’으로 자리 잡은 데이터센터 님비(NIMBY) 현상을 들여다보겠습니다.
미국 버지니아주 퍼매톡스 카운티의 한 가정집 앞마당에 설치된 데이터센터 건설 반대 팻말. 미국에선 데이터센터 건설 붐이 일면서, 자기 지역에서 신규 건설을 멈추라는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도 커져 간다. 아포마톡스 데이터 센터 감시단
4월 6일 아침,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시의회 의원인 론 깁슨 집에 12발의 총알이 날아들었습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식탁 바로 앞까지 총알이 박혔죠. 범인이 문 앞에 남긴 쪽지엔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어요. ‘데이터센터 반대’. 며칠 전 시의회가 데이터센터 개발을 승인한 것에 항의하는 누군가가 총격을 가한 거죠. 미국에서 데이터센터 반대 여론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 사건인데요.
이런 여론에 맞춰 데이터센터 건설을 막아 세우려는 정치권 움직임도 커집니다. 메인주 하원은 얼마 전 2027년 11월까지 대규모(20MW 이상) 데이터센터 건설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어요. ‘전기 먹는 하마’인 데이터센터가 전력망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한다는 명분이죠. 이 법안은 민주당이 장악한 주의회 상원을 무난히 통과 예정이고요. 아마 메인주는 미국에서 최초로 ‘데이터센터 모라토리엄(건설 일시 중단)’을 선언한 주가 될 겁니다.
미국의 지역 풀뿌리 운동은 데이터센터 건설을 막아세우는 데 속속 성공하고 있다. 이제 미국 정치권까지 데이터센터 반대에 가세하면서, 기술업계와 월가가 모두 이를 주목하고 있다. 사진은 버지니아주 피트몬트 지역에서 데이터센터 반대 운동을 벌이는 피드몬트환경협의회의 모습. 그리고 이건 시작일 뿐입니다. 이미 뉴욕, 오클라호마, 사우스캐롤라이나, 미시간, 조지아 등 10개 주에서 데이터센터 일시 금지 법안이 제출됐거나 추진 중이거든요. 특히 미국 데이터센터 최고 중심지인 버지니아주 의회엔 데이터센터 건설에 반대하는 법안이 60건 넘게 제출됐어요. 모두가 ‘우리 지역은 안 돼’라며 빗장을 걸어 잠글 기세인 거죠.
전국적인 움직임도 본격화했어요. 지난달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과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 하원의원이 공동 발의한 ‘AI 데이터센터 모라토리엄’ 법안인데요. 미국 전역에서 신규 AI 데이터센터 건설과 확장을 일시적으로 전면 중단하자는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입니다.
사실 데이터센터라는 건 1990년대 인터넷 혁명 이후 있었고요. 창문도 없는 상자갑 같은 거대한 건물이 보기 싫다며 건설에 반대하는 여론도 이전부터 적지 않았는데요. 이런 반감이 미국에서 최근 들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배경엔 이게 있죠. 전기료 인상.
미국 에너지부에 따르면 2025년 주택용 전기요금은 전국적으로 평균 4.9% 올랐습니다. 전체 소비자 물가상승률(2.7%)을 크게 웃돌았죠. 또 올해도 4%가량 오를 거란 전망이 나와요. 전력 회사들이 송전망 인프라 투자를 크게 늘린 것과 관련 있는데요. 전력망 업그레이드는 항상 필요한 일이지만, 유독 지금 투자가 활발한 데는 AI 데이터센터 영향이 큰 게 사실입니다.
버몬트주 무소속 상원의원 버니 샌더스(왼쪽)와 뉴욕주 민주당 하원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가 3월 25일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AI 데이터센터 모라토리엄‘ 법안에 관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AP 뉴시스 AI 데이터센터는 전력 소비량에서 일반 데이터센터와 차원이 달라요. 기존의 일반 기업용 데이터센터는 랙당 5~15kW 수준이었지만, 고성능 GPU를 탑재한 AI 전용 40~100kW를 쓰죠. 말 그대로 ‘전기 먹는 하마’인데요.
이런 AI 데이터센터 건설 붐은 전력망에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클린뷰 집계에 따르면 현재 미국에서 개발이 진행 중인 데이터센터는 883개로, 총 276.6GW 용량이 추가될 예정인데요. 이는 현재 운영 중인 602개 데이터센터 용량(16.9GW)의 무려 16배에 달하는 거죠. 열심히 송전망을 깔고 변전소를 지어도 이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질문. 그 많은 AI 데이터센터 건설, 도대체 누구한테 이익이 되는 거죠? 일단 AI 기술과 관련된 모든 기업, 특히 앞서나가는 빅테크 기업엔 이익이죠. 데이터센터는 AI 기술 경쟁의 승리자로 도약하기 위한 필수요소니까요. 또 지역 정부 입장에서도 상당한 돈이 됩니다. 그 지역에 데이터센터가 설립되면, 거둬들일 수 있는 재산세가 짭짤하니까요.
국가 경제에 대한 기여도는 상당하죠. 배런스에 따르면 2025년 1~9월 미국의 실질 GDP 성장 기여도에서 데이터센터 건설이 차지하는 비중이 14%나 돼요. 건물을 짓고 장비를 사고 전력망을 까는 모든 활동이 경제 호황에 톡톡히 기여하고 있죠. 무엇보다 미국이 세계 AI 기술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선 지금 꼭 필요한 투자입니다.
데이터센터 건설은 미국 경제호황을 이끄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게티이미지 그럼 ‘이렇게 모두에게 이익이 되니까 전기요금은 좀 감수합시다’라고 하면 주민들에게 먹힐까요? 그럴 리가요. 국가와 기업이 잘 되기 위해 내 지갑을 희생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도 거대하고 못생긴 건물을 매일 마주치고, 24시간 돌아가는 냉각팬의 저주파 소음에 시달리면서 말이죠. 마치 빅테크를 위해 소비자가 일종의 보조금을 제공해야 한다는 허무맹랑한 얘기처럼 들릴 뿐이죠.
게다가 AI 기술자라면 모를까, 대부분 주민들은 아직 데이터센터나 AI 기술의 사회적 가치를 실감하지 못합니다. 기술 저널리스트 재스민 선은 이렇게 전하죠. “이곳(데이터센터 인근)에 사는 대부분 사람은 프로그래머가 아닙니다. 그들은 AI를 기껏해야 ‘구글 검색보다 나은 것’ 정도로 여기죠. 제가 만난 사람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습니다. ‘이 모든 소동이 고작 내 아이들이 부정행위를 하는 걸 돕기 위한 것인가요?’”
말레이시아: 먹을 물이 부족하다
사실 데이터센터는 화력발전소처럼 매연을 뿜는 것도 아니고, 물류창고처럼 새벽에 대형 트럭이 오가는 것도 아닙니다. 직접적으로 해를 끼치는 시설이라고 하긴 좀 어렵죠. 특히 AI 시대에 중요한 게 ‘데이터 주권’이잖아요. AI 산업을 키우고 데이터 자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국 내에 데이터센터를 둬야 하는 건 맞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데이터센터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선 신흥국들이 많은데요.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인도네시아, 브라질 등은 법인세와 장비 수입 관세를 파격적으로 감면·면제해주면서 데이터센터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경쟁에서 현재 가장 앞서간 나라를 꼽으라면 여깁니다. 말레이시아.
2022년 말레이시아는 해외 디지털 기업 투자유치를 위해 파격적인 혜택을 내놨어요. 데이터센터 구축에 투입된 자금의 60~100%를 세액 공제해주고, 관련한 장비 수입 관세를 면제해 주기로 했죠. 싱가포르의 빈자리를 과감하게 치고 들어온 겁니다. 동남아시아 데이터센터 허브였던 싱가포르는 당시 국토와 전력 부족 탓에 규제를 대폭 강화했거든요.
말레이시아 조호르주 세데낙 테크 파크에서 건설 중인 데이터센터 건물. 싱가포르와 1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조호르주는 동남아시아의 새로운 데이터센터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AP 뉴시스 싱가포르와 비교하면 땅과 건설비용은 반값인데, 파격적인 세제 혜택에 싱가포르 바로 옆이란 최적의 입지까지. 글로벌 기술 기업들이 돈을 싸 들고 말레이시아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오라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 엔비디아 같은 미국 빅테크가 각각 수십억 달러의 투자를 약속하며 진출했고요. 바이트댄스와 알리바바, 텐센트 같은 중국 기업도 말레이시아를 택했죠.
유례없는 데이터센터 건설 붐이 도래했습니다. 특히 싱가포르와 다리 하나 사이인 조호르 지역은 북적거렸죠. 야자수와 고무나무 농장을 밀고 데이터센터가 들어섰고요. 2021년 고작 10MW에 불과했던 이 지역 데이터센터 용량은 지난해 1025MW로 불어났습니다. 지금도 건설 공사가 한창이어서, 2027년이면 조호르 지역 용량만 2.7GW가 될 전망이죠. 싱가포르(1.4GW)를 뛰어넘는 동남아시아 최대 데이터센터 허브로 도약할 날이 머지않았는데요.
하지만 ‘AI 열풍의 최대 수혜국’이라던 열광은 가라앉고 있습니다. 자원이 너무나 빠르게 고갈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력과 물, 둘 다요.
송전망이 포화상태에 이르면서 전력공사는 대대적인 전력망 확장에 나서야 했고요. 이를 메우기 위해 지난해 기본 전기요금을 14%나 올렸습니다. 그래도 전기료 인상은 경제성장을 위해 필요하다며 이해해 주는 분위기이긴 했는데요.
진짜 큰 문제는 식수 부족이죠. 지난해 조호르 주민들은 여러 차례 단수를 경험했습니다. 원래도 가뭄에 취약한 지역인데, 엄청난 양의 냉각수를 소비하는 데이터센터가 속속 들어섰으니 그럴 수밖에요. 정부 추산에 따르면 이 지역 데이터센터 47곳(건설 중인 곳 포함)이 필요로 하는 냉각수량은 하루 6억7500만 리터. 올림픽 규격 수영장 270개를 채울 양입니다.
최신 대형 데이터센터는 열을 식히기 위해 물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인 증발식 냉각 방식의 경우 주로 상수도를 사용하는데, 사용된 물의 80%는 수증기로 증발돼 버린다. 게티이미지 참다못한 조호르 주민들이 행동에 나섰습니다. 2월 초 한 데이터센터 건설 현장 앞에 50여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죠. 말레이시아에서 데이터센터 건설에 반대해 벌어진 첫 번째 시위였어요.
분위기는 급격히 반전됐고요. 결국 말레이시아 정부도 속도 조절에 나섰습니다. 안와르 총리는 2월 말 국회 답변에서 “에너지와 물 사용량이 급증해서 주시하고 있다”면서 “AI나 첨단기술과 관련 없는 데이터센터 신청은 이미 모두 중단했다”고 밝혔죠. 앞으론 말레이시아 경제 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전보다 더 깐깐하게 따져서 데이터센터 건설을 승인하겠단 뜻입니다.
아일랜드: 4년 만에 모라토리엄 해제
데이터센터 님비(NIMBY: Not In My Back Yard)현상과 모라토리엄(건설 중단)의 원조 격인 나라로는 아일랜드가 있습니다. 빅테크의 유럽 데이터센터 허브로 통하는 아일랜드는 2021년 규제당국이 수도 더블린 인근의 신규 프로젝트를 사실상 금지했어요.
당시 아일랜드는 이미 데이터센터가 전체 전력의 14%를 차지했고요(2024년엔 약 22%). 쓸 전기가 부족해서 주택과 공장 건설이 지연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환경단체와 지역 주민들이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났고요. 결국 이게 정부의 데이터센터 모라토리엄 결정으로 이어졌던 거죠.
그리고 4년이 지난 지난해 12월, 아일랜드가 다시 신규 데이터센터 건설을 허용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데이터센터는 혁신적인 경제를 가능케 하는 핵심 인프라”라면서 말이죠. 그런데 무작정 허용은 아니고요. 이전에 없던 엄격한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앞으로 새로 짓는 데이터센터는 가동 후 6년 안에 전력 사용량의 80% 이상을 재생에너지로 채워야 한다는 거죠.
아일랜드에선 강화된 규제에 따라 재생에너지 발전과 데이터센터를 결합한 새로운 개발 모델이 등장했다. 더블린 북쪽 드로게다 지역에서 추진되는 ‘드로게다 에너지 파크’의 조감도. 언뜻 보면 너무 무리한 요구 아닌가 싶습니다. 아일랜드의 재생에너지 발전이 늘고는 있다지만, 아직은 그 비중이 40% 정도밖에 되지 않거든요.
하지만 실험은 해볼만 합니다. 실제 더블린 북쪽 드로게다에선 재생에너지 발전소와 AI 데이터센터를 결합한 첫 번째 프로젝트가 지난달 발표됐어요. 데이터센터가 쓸 전기는 스스로 알아서 공급하는(그것도 친환경적으로) ‘자급자족형’으로 바뀌는 거죠. 만약 아일랜드의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새로운 표준이 될지도 모릅니다.
IMF에 따르면 2030년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는 2023년보다 4배로 늘어난 1500TWh로, 인도(세계 3위)에 맞먹을 거라고 하죠. 몇 년 만에 거대한 국가 하나가 생겨나는 셈인데요. 이거 정말 감당할 수 있는 거 맞을까요. AI 기술 경쟁은 결국 송전망과 상수도라는 물리적인 자원의 싸움일 수밖에 없겠습니다. By.딥다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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