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인문학으로 세상 읽기]3월에 내리는 눈처럼… 금세 사라져버릴 것에 대하여

  • 동아일보

배삼식 작가의 희곡 ‘3월의 눈’
주인공 장오, ‘진짜 한옥’ 팔고 철거 과정 지켜보며 과거 추억
금방 녹는 ‘3월의 눈’ 바라보며 저물어가는 것의 소중함 고찰

서울 중구 국립극장 무대에 올랐던 연극 ‘3월의 눈’의 한 장면. 작가 배삼식이 쓴 ‘3월의 눈’은 재개발로 허물어지는 고택을 배경으로 잊히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국립극장 제공
서울 중구 국립극장 무대에 올랐던 연극 ‘3월의 눈’의 한 장면. 작가 배삼식이 쓴 ‘3월의 눈’은 재개발로 허물어지는 고택을 배경으로 잊히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국립극장 제공
1월이 엄연한 새해의 시작이지만, 바로 시작하기에 주저하는 마음도 있고 연초라 긴장해서인지 슬금슬금 마음이 느슨해지기도 합니다. 시작을 미루다가 ‘진정한 한 해의 시작은 설날부터지’라고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그렇게 바쁘게 2월을 보내고 나니 헛헛한 마음이 찾아오더군요. 새로워야 하는데 마음도 몸도 연말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모든 학교가 개학하는 3월이 진짜 시작이라고, 이제 진짜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 입학하는 학생들이 떠오르는 3월

3월이면 연둣빛이 떠오르는 새싹을 생각하기도 하고, 새롭게 입학하는 학생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작은 늘 끝과 연결돼 있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3월에 때늦은 눈이 내리기도 합니다. 약동하기 시작하는 봄 앞에서 지난 추위는 마지막으로 존재를 알립니다. 3월에 눈이 내린다면, 그 눈은 싸라기눈이겠지요. 금세 사라져 버릴 눈이 분명합니다. 때를 지난 것들이 사라지는 자연스러운 과정은 인간의 마음을 괜스레 쓸쓸하게 만듭니다. 한겨울의 아름다운 설경과 다르게요.

그래서 지워지고 퇴색하고 저물어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어쩌면 이 봄에 더 잘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지난 삶의 이야기를 한 번 나누고 먹먹해진 마음을 여미며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는 게 인생일 수 있으니까요.

배삼식 작가의 희곡 ‘3월의 눈’은 주인공 장오가 이발소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아내 이순에게 전하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발소 안에 붙은 건 찌그러진 양은 대야까지 죄 뜯어’ 박물관에서 사 갔다며, 그들 삶의 한 부분이 점차 박물관에서 볼 법한 것들로 바뀌는 현장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 진짜를 잃는 사람들

장오의 집은 ‘진짜배기 한옥’입니다. 손자가 먹고살 수단을 만들어 주느라 집을 팔았고 이제 곧 일꾼들이 와서 집을 뜯을 예정입니다. 새 건물을 올려야 하거든요. 집을 뜯으러 온 일꾼들마저 ‘대들보며 문틀도 일일이 대패로 밀어 골을 잡은 집’이라고 장오의 집을 보며 감탄합니다. 그러나 그걸 알아보는 사람은 적습니다.

진짜 한옥집인 장오의 집 마루가 뜯겨 갈 때, 관광객들이 와서 한옥을 구경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들이 찾는 것은 ‘상고재’라는 유명한 한옥입니다. 이곳이 진짜 한옥이라고 말해줘도 그들은 상고재의 위치만 묻고 떠납니다.

현대인들이 소비하는 과거의 추억은 어쩌면 한껏 치장한 가짜일지도 모르지요. 바로 앞에 있던 것들이 뜯기고 사라져갈 때, 우리는 말간 눈으로 소중한 것을 놓치기 마련이니까요. 그렇게 인간은 세대를 교체하고, 지난 것을 치워가며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물건에서 어떤 장소에서 옛 정취를 느낄 때면 이렇게라도 남은 것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보여주기식 가짜만 남은 건 아닌가 싶어서 혼란스러워지기도 합니다.

뜯길 걸 알면서도 장오와 이순은 창호지를 사와서 문종이를 새로 바릅니다. 오순도순 옛이야기를 나누면서 일찍 세상을 떠난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을 말하고, 긴 겨울 지나 봄이면 가끔씩 집을 찾아왔던 노숙자 황 씨도 반갑게 맞이합니다. 집이 헐리면 장오와 이순, 그리고 황 씨는 어찌 될지 모를 일입니다. 그렇게 퇴색하듯 사라지는 과거의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가고 마는 걸까요.

● 금세 사라져 버릴 3월에 내리는 눈

장오는 집을 떠나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길을 서둘러 떠나고, 이순은 ‘떨어진 섬처럼, 툇마루에 앉아, 내리는 눈’을 바라봅니다. 우두커니 앉아 있는 이순이 집에 있던 영혼이었음을 독자는 조금 늦게 깨닫습니다. 혼이 나가고 몸만 남은 노숙자 황 씨와 몸은 떠나고 혼만 남은 이순이 마지막으로 집의 철거를 바라봅니다. 희곡에는 대사와 지문, 해설이 있지요. 마지막 해설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뜯겨져 나가는 집이 애처롭게 앓는 소리를 낸다.’

사라지는 것의 작은 소리, 금방 녹는 3월에 내리는 눈. 이렇게 순식간에 사그라지는 것들은 볼 수 없게 되지만, 이렇게 문학에서 연극에서 이야기에서 내내 전승되겠지요. 옛것을 상실하는 우리들의 애잔한 쓸쓸함도 함께 남겠지요.

인생에서 사그라지고 만 것들을 생각해 봅니다. 새봄이 오는 걸 알지만, 지나가 버리는 작은 것들에 귀를 기울이고 시선을 고정시켜 봅니다. 시작이 쉽지 않았듯이, 떠나보내는 일도 쉽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배삼식 작가님처럼 희곡을 계속 쓰고, 극예술을 이어가는 분들을 응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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