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소멸 부추긴 ‘괴물 산불’… 상습 방화범 전자발찌 등 논의를[기자의 눈/이수연]

  • 동아일보

이수연·사회부
이수연·사회부
80년 세월이 단 하룻밤의 불길에 바스러졌다. 경북 안동시 신흥리 보금자리는 꽃다운 나이에 신혼살림을 차렸던 이종연 씨(95)가 평생 일궈 온 삶 그 자체였다. 하지만 지난해 3월 영남을 휩쓴 산불은 모든 것을 태웠다. 산불 이후 치매 증세가 급격히 악화한 데다 정든 이웃마저 42명이 무더기로 떠나자 이 씨는 결국 고향을 떠나야 했다. 이달 11일 기자가 찾은 이 씨의 집터에는 검게 그을린 가재도구만 뒹굴었다.

역대 최악이었던 영남권 산불 이재민의 고통은 1년째 ‘현재 진행형’이다. 집을 잃은 2563가구 중 무려 86.3%에 달하는 2211가구가 여전히 임시 시설에 산다. 전처럼 송이 등을 키울 정도로 산이 회복하려면 수십 년은 걸린다는 전망 속에, 이들은 터전을 떠나고 있다. 안동과 청송, 경남 산청의 이재민의 11.6%가 이미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안 그래도 소멸 위기였던 지역에서 ‘붕괴’ 수준의 인구 유출이 일어나면서 사회적·경제적 자생력마저 잃는 모습이다.

이러한 산불은 때론 누군가의 비뚤어진 유희에서 시작된다. 올해 첫 대형 산불이었던 경남 함양 산불을 일으킨 이른바 ‘울산 봉대산 불다람쥐’ 김모 씨(66)가 대표적이다. 그는 과거 17년간 90여 건의 산불을 내다가 2011년 붙잡혀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했지만, 2021년 3월 출소하고 5년 만에 다시 불을 질렀다. 그는 “산불 뉴스를 보고 희열을 느껴 충동을 참지 못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러한 상습 방화범을 막을 장치가 느슨하다는 점이다. 2009년 전자발찌 부착 대상에 방화범을 추가하는 법안이 발의됐지만 적용 범위가 불분명하고 예산이 많이 든다는 반대에 밀려 무산됐다. 처벌도 마찬가지다. 최근 5년(2019∼2023년)간 검거된 산림 방화범이 징역형을 선고받은 비율도 3.4%에 그쳤다.

이제는 김 씨처럼 재범 위험이 큰 상습 방화범에 대한 전자발찌 부착 등 강력한 예방책을 논의할 때다. 법망이 지금처럼 상습 방화범을 무방비하게 풀어두는 한, 제2의 불다람쥐가 댕긴 불씨는 또 다른 지역 공동체의 맥박을 끊어 놓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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