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후 경북 안동시 남선면 신흥리 이장 김현일 씨가 불에 탄 한 주민의 집을 둘러보고 있다. 이 마을은 지난해 3월 역대 최악의 산불이 발생한 이후 이주민들이 속속 마을을 떠나고 있다. 안동=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6년 전 경북 안동시로 귀농했던 김진석 씨(65)는 지난해 경북 북부 일대를 덮친 ‘괴물 산불’로 집과 과수원을 모두 잃었다. 하지만 그가 받은 재난 지원금은 약 1000만 원. 더딘 주택 복구 작업과 낮은 지원금 등으로 그가 살던 임동면의 이재민 160명 중 절반이 넘는 89명은 이미 다른 시군구로 떠났다. 김 씨도 “이웃도, 미래도 없는 곳에서 더는 살 수 없다”며 경기 성남시에서 반지하방을 찾고 있다.
지난해 3월 21일 경남 산청군을 시작으로 동시다발적인 산불이 발생한 지 곧 1년이 된다. 당시 역대 산불 피해 최대 면적인 10만 ha(헥타르)가 넘는 마을과 산이 잿더미가 됐고, 이로 인해 집을 잃은 2563가구 중 2211가구(86.3%)는 여전히 조립식 건물 등 임시 시설에 머무는 것으로 16일 확인됐다. 이처럼 더딘 복구와 현실과 동떨어진 지원 탓에 주민들은 정든 삶의 터전을 떠나기 시작했다. 안동시에선 이재민 3507명 중 328명(9.4%), 청송군에선 7669명 중 969명(12.5%)이 전출했다. 전문가들은 “안 그래도 고령화로 소멸 위기였던 지역에 대형 재난까지 겹치면서 지역 붕괴 수준의 인구 유출이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산불이 휩쓴 마을, 주민 절반 터전 떠나… 지역소멸 가속화 위기
[‘괴물 산불’ 1년] ‘소멸 위험’ 안동-청송-산청서 1년간 인구감소폭 10배 넘는 1301명 전출… 생계 수단 산림 복구율 69% 그쳐 8개 시군 이재민 86% 임시시설 거주… “지원금으로 방 한칸도 못지어” 한숨
역대 가장 큰 피해를 남긴 산불로 기록된 지난해 3월 경북 북부 산불이 발생한 지 1년이 지난 지금, 피해 지역 곳곳에서 지역 붕괴 수준의 폐촌(廢村)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10만 ha(헥타르)가 넘는 마을과 산이 소실된 지 1년이 되어 가지만 주택은 물론 생계 수단이었던 산림 복구도 기약 없이 늦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자연재해가 촉발한 문제가 공동체의 소멸로 번지지 않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이재민 86%가 여전히 임시 시설에
11일 오후 경북 안동시 임동면 박곡리에서 만난 류조기 씨(79)의 집과 외양간 곳곳에는 1년 전 산불에 그을린 흔적이 선명했다. 류 씨는 산불로 평생 일군 집과 소 4마리를 잃고 재난 지원금 약 5000만 원을 받았다. 그는 “요즘 세상에 이 돈으로 방 한 칸이나 제대로 짓겠나”라며 “생계를 꾸려 나가기도 막막해 고향을 떠나야 할지 매일 고민한다”고 토로했다.
앞서 정부는 주택이 완전히 불탄 이재민에게 재건비 등으로 1억∼1억2000만 원을, 반파된 경우 5000만∼6200만 원을 지원했다. 하지만 이는 치솟은 공사비와 자재비를 반영하지 못한 수준이라는 호소가 나온다. 현행 재난 지원금은 ‘최소한의 생계 구호’ 개념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실제 시장가보다 낮게 책정되는 게 일반적이다.
이 때문에 피해 지역 8곳(경남 산청·하동, 울산 울주군, 경북 안동·의성·청송·영덕·영양)의 이재민 중 86.3%가 여전히 조립식 건물 등 임시 거주 시설에서 지내고 있다. 본래 살던 집을 고치거나 새로 지어 돌아간 가구는 15%에도 못 미친다. 특히 영덕군은 이재민 780가구 중 728가구(93.3%)가 여전히 임시 시설에 머물고 있고, 청송군(90.4%)과 의성군(83.8%)도 그 비율이 높았다. 한 지방자치단체 관계자는 “이재민 대다수가 고령이라서 새로 집을 지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주민들의 생계 수단이었던 농장과 과수원, 어선도 함께 타버렸지만 마찬가지로 회복이 늦어지면서 지역 경제도 흔들리고 있다. 영덕군 지품면에서 송이 농장을 운영했던 신두기 씨(73)는 “송이 하나만 보고 살았는데 산이 다 타버렸으니 이제 뭘 먹고 살지 고민”이라며 “주변에서만 벌써 이웃 2명이 짐을 싸서 떠났다”고 말했다. 돌미역으로 유명했던 영덕 ‘따개비 마을’도 곳곳에 철거된 건물 터만 남았다. 영양군에 사는 김모 씨(60)도 “귀농을 문의하는 발길도 뚝 끊겼다”며 “이대로 마을의 존재가 잊힐까 봐 걱정된다”고 하소연했다.
지난해 산불로 큰 피해를 입은 경북 영덕군 영덕읍 석리 ‘따개비 마을’ 역시 산불 피해를 입은 주택이 철거됐지만 새롭게 지어지지 않아 곳곳이 텅 비어 있다. 영덕=뉴스1산림청은 지난해 12월까지 산림 복구를 마무리할 계획이었으나 올해 1월 말 기준 복구율은 69%로 집계됐다. 이마저도 어린 나무를 갓 심었다는 뜻이다. 주민의 수익 기반이 될 정도로 회복하려면 최소 10년은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 “생계 막막해 탈출” 지역 소멸 가속 우려
주택과 생계를 잃은 주민은 ‘재난 난민’이 되어 고향을 등지고 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양부남 의원실에 따르면 안동과 청송, 산청 이재민 가운데 1301명이 산불 이후 다른 시군구로 주소를 옮겼다. 해당 지역 이재민의 11.6%가 넘는 수치다. 안동시 임동면의 경우 이재민 160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다른 시군구로 떠난 것으로 파악됐다. 고령화가 심해 소멸 위험 지역이었던 이들 지자체에서 초유의 재난이 벌어지면서 통상적인 인구 감소 폭의 10배가 넘는 주민이 한꺼번에 떠난 것이다.
각 지자체는 1월 29일 발효된 ‘초대형 산불 피해 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 시행령에 따라 추가로 피해 구제 지원 신청을 받고 있다. 행정안전부 관계자는 “이달 말까지 다른 지역으로 떠난 이재민을 전수 조사해 맞춤형으로 지원하고 마을 단위 복구 재생 사업을 벌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재난이 지역 공동체가 통째로 소실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도록 안전판을 갖춰야 한다고 제언했다. 박기범 경일대 건축토목공학과 교수는 “지명과 공무원만 남는 마을로 전락하지 않도록 경제 공동체 복원에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대다수인 고령 이재민의 경우 단순 주거 지원을 넘어 이웃 관계망을 유지할 심리적 복구 모델이 병행돼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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