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산골 우체부에게 ‘새 삶’이 배송되었습니다

  • 동아일보

뉴욕서 마케팅 컨설턴트로 일하다… 팬데믹으로 하루아침에 직장 잃어
고향에 돌아가 우편배달부로 취직… 회사 밖 자신의 존재 가치 재발견
삶에 닥친 불행을 행복으로 바꿔
◇메일맨(MAILMAN)/스티븐 스타링 그랜트 지음·정혜윤 옮김/404쪽·1만8800원·웅진지식하우스

초보 우편 배달부인 저자는 에어컨도 안 나오는 낡은 트럭을 몰고 애팔래치아산맥의 험준한 산길을 누비며 전과 달리 자신이 살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생생한 감각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초보 우편 배달부인 저자는 에어컨도 안 나오는 낡은 트럭을 몰고 애팔래치아산맥의 험준한 산길을 누비며 전과 달리 자신이 살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생생한 감각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20년 넘게 미국 뉴욕의 마케팅 컨설턴트로 성공적인 삶을 살던 남자가 하루아침에 해고당한 뒤 시골 우편배달부로 일하게 됐다. 이 책은 그가 보고 느낀 ‘또 다른 삶’을 유쾌하고 솔직하게 수다 떨듯 풀어놓는다. 읽다 보면 독서하는 느낌보다 덜컹거리며 시골길을 달리는 우편 트럭에 함께 타서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그게 광활한 애팔래치아산맥의 대자연을 누비며 새로운 삶의 경험을 전하는 방식으로는 더 자연스러운 것 같으니 웬일일까.

쉰 살의 나이에 팬데믹으로 갑작스럽게 직장을 잃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암 투병 중이던 저자는 건강보험 자격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고향인 버지니아주의 시골 연방 우정국 우편배달부로 취직한다.

“…급여는 눈물이 날 정도로 짰다. 그런 수준의 임금을 받은 건 20대 초반 이후 처음이었다. 하지만 다른 면들은 그럴 수 없이 완벽해 보였다. 건강보험이 제공됐고, 우정국의 예비군 같은 존재로서 일주일에 하루만 근무가 보장되었으므로 나머지 시간엔 더 나은 일자리를 찾을 수도 있었다.”(제3장 ‘종말의 우편배달부’에서)

우편 배달은 전직인 컨설팅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단순한 일이지만, 지역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는 필수적인 서비스. 하지만 그 중요성과 달리 배달 노동과 배달부는 사회적 관심이나 존중을 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저자는 매일같이 쏟아지는 우편물을 트럭에 싣고 시골길을 달리며 비로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시 발견해 간다.

“한쪽 팔 아래 꼭 끼고 있던 소포 상자를 마치 아무도 보지 않는 터치다운을 한 사람처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주여, 만일 제게 계속할 힘을 주신다면 하겠나이다. 죽도록 힘들지만 하겠나이다.’ …때로는 이긴다는 것이 지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그 이상이 있었다. 내가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은 포기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었다.”(제11장 ‘때론 이긴다는 것은 포기하지 않는 것’에서)

질병, 해고, 이직, 사랑하는 이의 죽음 등 원치 않지만 살면서 누구나 겪는 일들이 있다. 마치 갑자기 예상치 못하게 식사 대용으로 나온 레몬처럼. 버리든, 신맛을 참고 먹든 각자의 선택이 있겠지만, 저자는 레몬을 레모네이드로 만들기 위한 길을 걷는다. 왜 하필 시큼한 레몬이냐며 불평하는 게 아니라, 그 불운을 더 나은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재료’로 썼다.

사실 이런 유형의 회고록이 이 책뿐인 건 아니다. 당장 서점에만 가도 비슷한 책을 여럿 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눈길이 가는 이유는 마음 한구석에 ‘언젠가 내게도 닥칠 일’이라는 잠재의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저자는 수십 년간 회사를 다니며 놓쳤던 것, 내내 시달려온 근본적인 혼동은 ‘일이 곧 현실’이라는 착각이었다고 말한다. 누구나 일을 하며 먹고살지만, 일이 인간을 정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아침 햇살, 자녀들의 사랑, 사랑하는 가족 안에서 아버지로 존재한다는 엄청난 선물 등 그동안 삶이 준 풍요를 낭비하고 살았다고 토로한다.

언젠가 본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왔다. “비행의 끝은 착륙이고, 우리 모두는 언젠가 내려와야 한다.” 반드시 닥치는, ‘내려옴’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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