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엔 승패 없어… 찬반 입장 모두 서본 후 합의점 찾아요”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3월 13일 03시 00분


[공존형 토론으로 키우는 시민] 〈1〉 ‘역지사지 토론’으로 시야 넓혀
서울시교육청이 개발한 토론 수업
주제 놓고 찬반 바꿔가며 발언 후, 의견-대안 등 정리해 합의문 작성
근거 자료 찾으며 정보 문해력 교육… 신문-학술지 등 매체 활용법 배워

지난해 11월 서울 송파구 정신여고에서 열린 학교 연합 대토론회. 학생들은 ‘독신세를 도입해야 하는가’를 주제로 서울시교육청의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 방법에 따라 토론을 진행한 뒤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춘명 보성고 교사 제공
“국가와 공동체 존속을 위해 필요하다.”(독신세 도입 찬성 측 주장)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면 안 된다.”(독신세 도입 반대 측 주장)

지난해 11월 서울 송파구 정신여고에서 서울 지역 4개 고교(동북고 보성고 오금고 정신여고) 학생과 교사들이 모여 ‘독신세(싱글세)를 도입해야 하는가’를 주제로 학교 연합 대토론회를 열었다. 대개 토론회는 찬성과 반대로 팀을 나눠 누가 논리정연하게 말했는지를 겨루고 우승팀을 도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날 토론은 학생들이 찬성과 반대 측 모두의 입장에 대한 자료를 함께 조사하고 개요서를 작성한 뒤 토론을 진행했다. 이어 서로 합의할 수 있는 게 무엇이고 대안이 무엇인지를 정리해 합의문을 작성한 뒤 발표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 토론 방식은 서울시교육청이 2023년 개발한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 프로그램에 따른 것이다. 서울시교육청은 인공지능(AI)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활성화로 확증 편향 현상이 심각한 시대에 학생들이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며 민주적인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를 수 있도록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 수업을 추진하고 있다.

● 찬성, 반대 입장에 모두 서 보고 합의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은 참여자가 토론 전에 주제에 대한 찬성과 반대 의견을 모두 파악한다. 1차 토론을 할 때는 무작위로 찬성이나 반대 입장을 정해 토론하고, 2차 때는 1차 토론과 상반된 입장을 취한다. 찬성과 반대 두 입장을 모두 경험하며 역지사지를 실천하라는 취지다.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의 목적은 ‘시민적 합의’다. 모둠 내에서 합의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분류하고, 만장일치로 합의할 수 있도록 의견을 조정한다. 만약 합의에 이르지 못해도 합의가 어려웠던 이유를 성찰하고 성숙한 토론 과정 자체를 격려한다.

이러한 토론을 하기 위해서는 토론 전 준비 과정이 중요하다. 우선 학생들에게 토론은 이기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잘 설명해야 한다. 대토론회를 진행한 이춘명 보성고 교사는 “대학 입시를 위한 진도 나가고 시험 보기도 바쁜 고등학교에서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 수업을 진행했던 데는 한 학생이 ‘토론했는데 이겼어요’라고 이야기하는 걸 듣게 된 게 계기가 됐다”며 “내 입장만 고수하지 않고 상대방 이야기를 경청하고 합의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걸 가르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에 동북고 보성고 오금고 정신여고 학생들은 각자 학교에서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에 임하는 자세를 배웠다. 교사들은 토론할 때 반대 의견에 대해서도 “의견 잘 들었습니다”라고 말한다거나 상대방의 말을 중간에 끊지 않으며 상대방 의견에 동의할 수 없어도 “이 부분에 대해 생각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 학생들이 찬성과 반대에 대한 근거 자료를 찾을 수 있게 정보 문해력 교육도 실시했다. 요즘 학생들은 챗GPT, 구글, 동영상만 활용하려는 경우가 많지만 신문, 단행본, 학술지 등에서 원하는 정보를 찾는 방법을 가르쳤다. 이런 사전 교육 끝에 대토론회는 지난해 11월 2일 오전 8시 반부터 오후 4시 반까지 진행됐다. 합의문까지 작성해 발표한 학생들은 “찬성과 반대 의견을 모두 고려하니 오히려 내 생각이 더 명확히 정리됐고, 합의해서 대안을 개발하는 과정은 어떤 수업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 상대방 존중하며 해결책 찾는 시민으로 성장

서울시교육청은 사회적 갈등이 존재하고 거짓 뉴스가 난무하는 사회에서 학생들이 올바른 정보를 찾고 타인과 건전하게 토론할 수 있는 시민으로 자랄 수 있도록 돕는 게 교육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찬반 양측의 입장을 균형 있게 경험함으로써 정치적 편향성에서 벗어나고, 삶에서 맞닥뜨리게 될 갈등 상황에서 상대를 존중하고 대화하며 해결책을 찾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서울시교육청은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원칙에 기반한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 수업 프로그램을 2023년 1월 개발해 시범 운영했다. 1, 2차 세계대전 뒤 분단 국가가 된 독일은 민주시민 교육 방법론을 둘러싸고 갈등이 심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76년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교육자, 학자, 정치인들이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도출했고, 지금도 이에 근거해 초등학교부터 토론 수업을 진행한다.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교사는 자신의 견해나 이념을 강압적으로 주입하면 안 된다 △정치적·사회적으로 의견 대립이 있는 사안은 한 입장만 가르치지 말고 여러 관점을 균형 있게 소개하고 토론해야 한다 △학생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인식하고 사회적·정치적 참여 역량을 키울 수 있게 교육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해 2월 초중고교 전체에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 교사용 및 학생용 교육자료를 배포하고, 초중고교 120곳을 선정해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 수업을 운영했다. 지난해 12월에는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 수업을 진행한 교사들이 모여 ‘실천하는 학생 시민을 기르는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 수업 실천 교사 선언’을 진행했다.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 수업을 진행한 교사들은 학생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서울 광진구 자양중 이상석 교사는 지난해 재직했던 다른 학교에서 토론 수업을 해보고 올해도 또 진행할 예정이다. 이 교사는 “처음에는 친숙한 주제여도 학생들이 말도 잘 못 하고 자기 할 말만 하는데, 나중에는 ‘자국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역사 교과서를 쓰는 게 바람직한가’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상대방 의견을 받아 적으며 듣고 자기 의견을 제시하는 수준이 된다”고 했다.

서울시교육청은 “사회적으로 예민한 현안에 대해 교사가 정치적 중립성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수업 속에서 토론을 다룰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공존형 토론#역지사지 토론#서울시교육청#정보 문해력#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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