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몰이땅→공항→금융허브… 이 땅의 다음 변신은[황재성의 황금알]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27일 08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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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시, 여의도 국제적 금융중심지로 육성 추진
2: 모래섬, 도심 주택난 해결 위한 신도시로 변신
3: 삼핵 도시 구상에 국제금융특화구역으로 변경
4: 방송 증권사 줄줄이 떠나며 명성 퇴색 평가도

황금알: 황재성 기자가 선정한 금주에 알아두면 좋을 부동산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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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25일부터 주민 열람을 진행 중인 ‘ 여의도 금융중심 지구단위계획구역 및 계획 결정(안)’은 여의도를 국제적인 금융중심지로 육성하겠다는 게 핵심이다. 사진 아래쪽은 시범아파트 전경이다. 동아일보 DB
“서울 도시계획에는 철학이 없습니다.”

1974년 10월 26일 당시 서울시장이던 구자춘 시장과 점심을 하던 김형만 국민대 건축과 교수는 “모든 도시기능이 종로구와 중구에 집중돼 있는데, 이런 상태로는 앞으로 큰일이 난다”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이 한마디는 서울을 한양도성과 영등포·여의도, 강남 등 3개 지역을 중심지로 하는 ‘삼핵(三核) 도시 구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최근까지 서울의 도시발전계획의 기본방침으로 활용돼 왔습니다.(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교수, ‘서울 도시계획이야기 39-다핵도시 구상의 파급효과’)

다만 1974년 당시 계획에는 강북지역은 국심(國心)으로서 중추적 중앙행정기능의 도심으로, 여의도를 포함한 영등포는 경인·경수 간 산업지대 중심기능의 도심으로, 강남지역(당시에는 영등포 동쪽에 위치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영동지역’)은 기존 강북 도심의 기능 가운데 과밀의 주된 요인이 되고 있는 기능의 분산지역으로 육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강남 이전 대상에는 ▲서울역의 일부 기능 ▲서울시청을 포함한 2차 관청이 집합된 새로운 시청센터 ▲금융 및 업무기능 등이 거론됐습니다.

하지만 이후 조정과정을 거쳐 삼핵 구상의 세부 내용은 달라집니다. 2014년 발표된 ‘2030서울도시기본계획’에는 ▲종로구와 중구를 중심으로 하는 강북 도심은 역사문화의 중심지로 ▲영등포와 여의도는 국제금융특화지역으로 ▲강남지역은 글로벌 업무중심지로 각각 육성하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새삼 40년 전 일을 떠올린 것은 오세훈 시장이 ‘한국판 맨해튼’으로 만들겠다며 최근 잇따라 굵직굵직한 여의도 개발계획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25일부터 주민 대상 열람공고가 진행 중인 ‘여의도 금융중심 지구단위계획(안)’(이하 ‘여의도 계획’)이 대표적입니다. 이에 따르면 동여의도 일대 112만여㎡의 용적률은 최대 1200%까지, 높이규제는 350m 이상도 허용됩니다.

이미 여의도는 한국의 맨해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지역 모두 큰 강을 끼고 있는 섬이고 금융기업들이 입주한 고층빌딩들이 밀집한데다 한복판에 대형 도시공원을 갖고 있다는 공통점 때문입니다. 게다가 여의도는 수도권지역 최초의 계획 신도시로서 맨해튼에서 볼 수 있는 격자형 도로망을 갖췄습니다. 또 세계 문화 중심지로 불리는 맨해튼처럼 여의도도 한 때 국내 지상파 방송 3사가 모두 모여 있으면서 국내 대중문화의 산실로 여겨졌습니다.

오 시장의 여의도 계획은 별명에 머무는 수준을 넘어서 여의도를 실제로 세계적인 금융허브로 육성해보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금융업은 파생효과가 큰 만큼 계획대로 된다면 성장 동력이 떨어지고 있는 국내 경제에 큰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잠재적인 대권후보인 오 시장에게도 큰 득점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전에도 정부 차원에서 여의도를 국제금융허브로 만들겠다는 계획이 추진됐지만 성과는 기대를 크게 밑돕니다. 모래밭으로 뒤덮인 인적 드문 섬에서 목장과 비행장을 거쳐 수도권 최초의 계획도시로 변신을 거듭했던 여의도는 과연 세계적인 금융허브로 거듭날 수 있을까요.

● 목장에서 군 비행장을 거쳐 신도시로
서울시는 도심지역의 주택난 해결을 위해 여의도에 신도시를 짓기로 하고, 홍수 때마다 물에 잠기는 여의도의 문제 해결을 위해 제방(윤중제)를 설치해  택지를 조성했다.  사진은 윤중제 준공식에 참석한 빅정희 대통령(왼쪽)이 한강개발이라고 쓰인 표지석 앞에서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으로부터 설명을 듣는 모습이다. 국가기록원 제공
서울시는 도심지역의 주택난 해결을 위해 여의도에 신도시를 짓기로 하고, 홍수 때마다 물에 잠기는 여의도의 문제 해결을 위해 제방(윤중제)를 설치해 택지를 조성했다. 사진은 윤중제 준공식에 참석한 빅정희 대통령(왼쪽)이 한강개발이라고 쓰인 표지석 앞에서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으로부터 설명을 듣는 모습이다. 국가기록원 제공
여의도는 문헌상에 잉화도(仍火島), 나의도(羅衣島), 여의도(汝矣島) 등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넓은 섬이라는 뜻의 ‘너벌섬’을 한자어로 음차한 것입니다. 다만 여의도가 홍수로 물에 잠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 여의도에서 제일 높은 지역이었던 양말산(현재 국회의사당 자리)만 나타나 부근 사람들이 나의섬, 너의섬이라고 부르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속설도 있습니다. 또 여의도를 쓸모없는 땅이라 여겨 너나 가질 섬이라는 뜻에서 나왔다는 주장도 있습니다.(영등포구청, ‘영등포 근대 100년사’)

여의도는 조선시대에 주로 국가가 관리하는 짐승을 기르는 목장이었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이 2021년 여의도 100년사를 기획전시(‘모래섬, 비행장, 빌딩숲 여의도’)하면서 배포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세종실록 등에서 여의도를 가축을 기르는 섬으로 소개했습니다. 또 소수이지만 여의도에 대를 이어 사는 정착민들이 폐쇄적인 섬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목축장이면서 척박한 농지였던 여의도는 일제가 강점기인 1916년 비행장을 설치하면서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당시 일제는 여의도를 군용지로 매수해 연병장으로 사용했는데, 그 중 일부에 활주로와 격납고를 세우고 간이비행장으로 활용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모습은 큰 화제가 됐습니다.

이어 1929년에 ‘경성비행장’이 되고, 군용과 민간이 함께 사용하는 시설로 바뀝니다. 만주와 일본 가운데 위치한 지리적인 특성에 여의도비행장은 항공교통의 요지로 자리 잡습니다. 처음에는 우편비행으로 시작했지만 여객항공으로 발전했고, 1930년대에는 일본 도쿄-경성-중국 다롄(大连)을 잇는 정기 항공노선까지 개설됩니다.

광복 후에도 여의도비행장은 국내에서 외국을 나갈 때 이용하는 관문 국제공항으로 이용됩니다. 하지만 여름철 홍수 때마다 물에 잠겨 안정적인 이용이 어렵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에 1958년 김포국제공항 준공과 함께 관문공항 역할은 폐기됐고, 1970년 경기 성남시에 위치한 서울공항이 개항하면서 여의도비행장은 완전히 문을 닫습니다.

1968년 여의도는 상전벽해를 하게 됩니다.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이 인구과밀화에 따른 주택난으로 몸살을 앓던 서울 도심부의 문제를 해결할 신도시 후보지로 여의도를 점찍은 것입니다. ‘불도저’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그는 취임 다음날부터 서울의 지도를 송두리째 바꿔놓을 사업들을 대대적으로 펼쳤는데, 여의도 개발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핵심은 홍수로 물에 잠기기 일쑤인 여의도에 제방(윤중제)을 설치하고 지반을 높인 뒤 집을 짓고, 강북도심의 행정시설을 대거 이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20세기 한국 현대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수근을 중심으로 젊은 건축가들이 만든 계획에 따라 최첨단의 아파트 단지와 고층의 업무시설 등이 새로 지어지고, 국회의사당 등이 이전시설로 정해졌습니다.

1968년 2월 윤중제에 사용할 골재 확보를 위해 밤섬을 폭파하고, 군사작전을 펼치듯 몰아붙인 덕에 2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됐던 윤중제 조성 공사는 불과 5개월 만에 준공됩니다. 그런데 김 시장의 행보에 급제동이 걸립니다. 1970년 4월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기슭에 위치한 시민아파트(일명 ‘와우아파트’) 일부가 무너지면서 33명이 죽고, 38명이 다치는 대형 사고가 발생합니다. 이에 책임자였던 그가 시장자리에서 물러납니다.

후임자였던 양택식 서울시장은 개발계획을 전면 수정합니다. 1969년 수립된 여의도 개발계획에 따르면 지상 7m 높이의 거대한 보행로가 섬을 동서로 관통하고, 보행로 양 옆을 고층건물이 에워싸는 ‘입체적 업무도시’였습니다. 또 여의도 서쪽 끝에는 국회의사당, 동쪽 끝에는 서울시청과 대법원, 종합병원 등이 들어서게 돼 있었습니다.

양 시장은 이를 무시하고 첫 사업으로, 대법원 예정지에 아파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씻기 위해 당시로서는 최첨단 시설을 갖춘 시범아파트를 건설합니다. 또 동시다발적으로 추진됐던 서울시내 개발사업들에 필요한 재원 확보를 위해 여의도 내 사업부지들을 민간건설업체에 대거 매각합니다. 여기에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초대형 아스팔트 광장인 5·16광장(현 여의도공원)을 여의도 중앙에 조성하면서 김수근 등이 만든 여의도 계획은 완전히 물 건너갑니다.

● 모래섬이 한국의 맨해튼이 되다
여의도는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에 금융과 방송 관련 기업들이 밀집해 있다는 공통점에  ‘한국의 맨해튼’을 불렸다. 사진은 KBS 본관 모습이다. 동아일보 DB
여의도는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에 금융과 방송 관련 기업들이 밀집해 있다는 공통점에 ‘한국의 맨해튼’을 불렸다. 사진은 KBS 본관 모습이다. 동아일보 DB
거침없던 양 시장도 예상치 못한 일에 발목이 잡힙니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행사에서 터진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사망하자 양 시장도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이 바로 구자춘 당시 경북도지사입니다. 1974년 9월 취임한 그는 한 달여 뒤인 10월 26일 김형만 교수를 만나 ‘서울 삼핵 도시 구상’을 접하게 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여의도가 한국 자본시장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되는 계기입니다.

이후 1979년 7월 2일 대한증권거래소(현 한국거래소)가 명동에서 여의도로 이전하면서 이러한 구상은 현실화되기 시작합니다. 이에 앞선 1978년 증권감독원(현 금융감독원)도 여의도로 옮겨옵니다.

이후 1980년대 중반 경제 호황으로 몸집을 불리기 시작한 증권사들은 거래 업무 전산화가 진행되자 빠른 전산거래를 위해 거래소 전산시스템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하기 위해 여의도로 이전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여의도로 옮긴 증권사는 대신·대우·럭키증권(현 우리투자증권) 등 18곳으로, 거래소 뒤편에 1차로 터를 잡았습니다.

1990년대에는 한국·대한·국민 등 3대 투신사와 서울(현 유진투자증권)·제일(현 한화증권)·쌍용증권(현 신한금융투자)이 여의도광장 쪽으로 이전해오면서 현재 여의도 일대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그 사이 코스피 지수는 1000(1989년), 2000(2007년) 포인트를 차례로 넘어서며 자본시장 규모도 급성장합니다. 덩달아 주식 투자자와 거래량이 늘고, 펀드가 대중화하면서 여의도 증권사들의 수입도 크게 늘어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여의도는 돈과 정보, 인프라가 고루 갖춰진 명실상부한 자본시장의 중심지로서의 입지를 굳힙니다.

여기에 노무현 정부가 2003년 ‘동북아 금융허브 추진전략’을 발표하자 서울국제금융센터(IFC서울)가 2006년, 파크원이 2007년에 각각 착공합니다. 또 금융위원회가 2009년 여의도를 ‘국제금융중심지’로 지정하면서 여의도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질 것으로 기대를 모았습니다.

방송사들은 금융업체들보다 한 발 앞선 시점에 여의도에 둥지를 틉니다. 1976년 KBS가 서여의도에 신사옥을 건설한 이후 1980년 동양방송(TBS·현 KBS2), 1983년 MBC가 각각 동여의도로 이전합니다. 1990년에는 SBS도 서여의도에 위치한 태영빌딩에서 개국합니다.

지상파 3사가 모두 여의도에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여의도에는 방송 관련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고, 방송산업은 여의도를 대표하는 산업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습니다. 또 방송과 연관된 산업들이 밀집하면서 여의도는 한국 방송의 메카이자 대중문화의 산실로 불리게 됩니다.

● 여의도, 다시 세계 금융허브를 꿈꾸다
여의도는 1980~2010년 초반까지 한국의 정치, 금융, 대중문화의 중심지로 여겨졌지만 최근 방송사와 증권사들이 잇따라 빠져나가면서 위상이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진은 여의도 증권가의 야경이다. 동아일보 DB
이처럼 1980년 이후 2010년 초반까지 한국의 정치, 금융, 대중문화의 중심지로 화려한 시기를 보내던 여의도는 최근 위상이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우선 방송사들이 여의도를 줄줄이 떠났습니다. 2014년 상암 디지털미디어시티로 SBS와 MBC가 이전하고 일산, 목동 등으로 방송가가 흩어지면서 현재 여의도에는 KBS만이 남아 있습니다.

금융시장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뚜렷합니다. 증권업계를 대표하는 대우증권과 대신증권이 2016년 본사를 여의도에서 명동으로 옮겼습니다. 대우증권은 미래에셋증권과 합병하면서 미래에셋증권과 자산운용사가 있는 중구 수하동 센터원 빌딩으로, 대신증권은 명동 중앙극장 터에 새집을 지어서 이전했습니다.

이에 앞서 유안타증권(옛 동양증권)은 2004년 명동으로 본사를 옮겼습니다. 또 삼성증권은 여의도에 있던 전신 한일투자금융을 1992년 삼성그룹에 편입하고서 여의도를 떠나 중구 국제빌딩과 내외빌딩, 종로타워 등 명동과 을지로, 태평로 등지를 떠돌다 2016년 서초동 삼성타운으로 이사했습니다. 삼성자산운용도 2011년 여의도를 떠나 태평로빌딩에 있다가 2016년 삼성타운에 합류했습니다.

이처럼 증권사들이 여의도를 떠나는 이유는 정보기술(IT) 발달로 더 이상 지리적인 위치가 업무 효율성을 저하시키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적잖습니다. 게다가 수익원 다변화 차원에서 시중은행 본사와 외국계 투자은행(IB), 자산운용사 등이 다수 자리하고 있는 명동, 광화문, 을지로, 종로 등 서울 도심지역으로 옮기는 게 유리하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여기에 노무현 정부가 발표했던 ‘동북아 금융허브 추진전략’이 흐지부지된 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정부는 2020년까지 한국을 홍콩과 싱가포르 수준의 금융중심지로 키우겠다는 밑그림을 그리고, 2005년 한국투자공사(KIC)를 발족시키는 등 정책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2008년 전 세계를 덮친 금융위기로 동북아추진전략의 발걸음에 제동이 걸립니다. 또 금융규제 개혁과 금융중심지 지원에 대한 정부의 일관성 없는 정책도 악재로 작용했습니다. 그 결과 영국 글로벌 컨설팅사 ‘지옌’이 집계하는 GFCI(국제금융센터지수)에서 서울은 한때 6위(2015년 9월)까지 올라갔던 순위가 36위(2019년 3월)로 곤두박질쳤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올해 3월 평가에서 다시 10위로 올라섰다는 것입니다. 2015년 이후 8년만의 일입니다. 국제금융센터지수는 영국계 컨설팅 그룹 지옌(Z/Yen)과 중국종합개발연구원(CDI)이 2007년부터 매년 3월과 9월 두 차례씩 전 세계 주요 도시의 금융경쟁력을 비교 분석한 결과입니다. 올해 3월 발표는 전세계 130개 도시를 대상으로 진행됐는데, 서울시는 5개 평가분야 중 ▲인프라(5위) ▲도시 평판(9위) ▲기업환경(10위) ▲금융산업 발전(10위) 등 4개 분야에서 10위권에 진입했습니다.

서울시는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서울을 ‘글로벌 톱5 금융허브 도시’로 도약시키고 그중에서도 여의도에 국제 디지털 금융지구를 조성하겠다고 밝혀왔습니다. 이번에 마련한 여의도 계획은 이런 구상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도시설계 가이드라인입니다. 오 시장의 계획이 제대로 추진돼 반드시 좋은 결실이 맺어지길 기대해봅니다.


황재성 기자 jsonh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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