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질서 위협하는 與野의 ‘헌재 모독’[오늘과 내일/장택동]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4월 3일 21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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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수완박법’ 결정에 與협박, 野왜곡
최종심 신뢰 흔들리면 법치 못 지켜

장택동 논설위원
장택동 논설위원
중동의 이스라엘에서는 지난달 말 70만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정부여당이 사법부 권한을 약화하는 법안을 추진하는 것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중동의 스트롱맨’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도 한발 물러서 법안 처리를 미뤘을 만큼 시위의 기세는 거셌다. 그 법안의 내용 중 핵심이 대법원의 위헌법률심판권(한국에서는 헌법재판소에서 담당)을 박탈하는 것이다.

왜 이스라엘인들은 이 법안에 그토록 분노했을까. 지금은 크네셋(의회)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등 헌법에 어긋나는 법률을 만들었을 때 사법부에서 바로잡을 수 있다. 하지만 대법원이 그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면 이스라엘 국민은 다수당이 바뀌어 법률을 개정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다. 악법에 따른 피해는 국민이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제헌 헌법부터 위헌법률심판 제도가 도입되기는 했다. 하지만 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유명무실했다. 민주화 이전에는 1971년 대법원이 국가배상법 조항에 위헌 결정을 내린 것이 사실상 유일하다. 군인이 직무수행 중 다치거나 사망해도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을 제한하는 내용의 조항이었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이듬해 유신헌법에서 대법원의 위헌법률심판권을 빼앗고, 위헌 의견을 낸 대법관 9명은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87년 개헌으로 헌재가 설립되면서 비로소 헌법재판이 제자리를 찾았다. 헌재는 헌법 해석을 둘러싼 정치·사회적 갈등의 심판 역할을 해왔고 호주제 폐지 등 국민 일상에 변화를 가져온 결정도 여럿 내렸다. 국가기관 중 헌재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가장 높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다. “민주화를 열망하던 국민에게 하늘이 준 망외(望外·기대 이상)의 선물”이라는 이강국 전 헌재 소장의 말이 자화자찬만은 아니다.

그런데 지난달 23일 이른바 ‘검수완박법’에 대한 권한쟁의심판 결정 이후 정치권에서 헌재를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발언이 쏟아지고 있다. 헌재 결정의 핵심은 민주당을 탈당한 민형배 의원이 법사위 안건조정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과정에는 문제가 있지만 법률 자체는 유효하다는 것이다. 이후 국민의힘에서는 연일 헌재에 대해 “신(新)적폐 세력” “다수당의 하수인” 등 막말 수준의 발언을 내놨다. 민주당 역시 ‘위장 탈당’에 대한 헌재의 지적에 “합법적 과정”이었다고 우겼다. 불리한 대목은 무시하고 유리한 부분만 부각하는 것은 헌재 결정을 왜곡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2009년 미디어법 관련 권한쟁의심판에서 헌재가 비슷한 취지의 결정을 했을 때도 정치권은 지금과 유사한 반응을 보였다.

헌재가 성역은 아니고, 헌재의 결정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정치권의 억지 주장이 어제오늘 일이냐’고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헌법재판관을 인신공격하고 헌재 결정을 부정하는 ‘헌재 모독’ 수준까지 가서는 안 된다. 헌재는 헌법재판의 최종심이다. 그 결정이 존중돼야 갈등을 사법 시스템 안에서 풀어낸다는 법치의 근간을 지킬 수 있다. 그런데 정치권에서 헌재를 위협하는 일이 반복되면 헌재의 결정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약해지게 된다.

지금까지 헌재가 내린 결정 가운데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사건은 현직 대통령들에 대한 탄핵심판이었을 것이다. 헌재는 한 건은 기각, 한 건은 인용 결정했고 더 이상의 혼란 없이 탄핵 논란은 마무리됐다. 대다수 국민이 헌재의 판단을 수용했기 때문에 헌법질서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헌재는 이제 법치의 중요한 한 축이 됐다. 정치인들이 눈앞의 득실만을 따져서 흔들어도 될 만큼 헌재의 가치가 가볍지 않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검수완박법#헌재 모독#헌법질서 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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