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죄로 덮으려다… 美 법조 명문가의 몰락[횡설수설/장택동]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7일 21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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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걸린 초상화부터 치우세요.” 아내와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앨릭스 머독 변호사에 대한 공판 절차가 시작되기 전 판사가 직원들에게 지시했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앨릭스의 할아버지인 랜돌프 머독 주니어였다. 100년 이상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남부 일대에서 법조계의 왕처럼 군림해온 머독 가문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한 법원의 상징적 조치였다. 치열한 법정 공방 끝에 3일 앨릭스에게 종신형이 선고됐다.

▷“이 동네에선 머독 일가가 법이었고 때로는 법 위에 있었다.” 햄프턴 카운티의 한 주민이 방송에서 증언한 내용이다. 머독 가문은 앨릭스의 증조부부터 아버지까지 3대에 걸쳐 86년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카운티 5개를 관할하는 검사장을 맡았다. 선출직인 미국의 검사장은 해당 지역 범죄의 기소 여부를 전적으로 결정하는 막강한 권한을 갖는다. 머독 가문은 오랫동안 검사장직을 세습하며 법원과 경찰까지 좌지우지했다. 미국 한복판에 ‘머독 왕국’을 건설한 셈이다.

▷대형 로펌을 운영하는 데다 가문의 후광을 등에 업은 앨릭스 역시 이 지역에서 영향력이 컸다. 2019년 아들 폴은 술을 마신 채 보트를 몰다 다리와 충돌해 동승한 여성을 숨지게 했는데도 체포되지 않았다. 폴의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앨릭스가 동승자들을 회유하고 경찰을 압박했다는 의혹이 무성했다. 2018년 앨릭스의 집에서 가정부가 갑자기 숨진 사건은 부검도 없이 단순 실족사로 마무리됐고, 유족에게 돌아가야 할 보험금까지 앨릭스가 챙겼다. 법 기술과 권력을 동원해 사법 시스템을 무력화시켰다는 비판이 들끓었지만 그의 위상은 건재했다.

▷2021년 6월 아내와 폴을 살해할 때에도 앨릭스는 법망을 피할 수 있으리라 믿었을 것이다. 법률과 수사 절차에 해박한 그는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범행에 사용된 총기 등은 발견되지 않았고, 목격자도 없었다. ‘사건 당시 치매를 앓는 어머니와 함께 있었다’는 알리바이도 제시했다. 하지만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 폴이 찍은 동영상에 앨릭스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 것이 확인됐다. 그의 거짓말이 들통나면서 유죄 판결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팩트 앞에서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던 것이다.

▷검찰은 앨릭스가 거액의 회사 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수사선상에 오르자 여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런 끔찍한 일을 벌였다고 밝혔다. 당초 그가 회삿돈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마약성 진통제를 구입하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범죄를 다른 범죄로 계속 덮을 수는 없는 일이다. 언젠가는 죗값을 치를 수밖에 없다. 철옹성 같았던 법조계 명문가의 몰락이 어느 누구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죄#美 법조 명문가#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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