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젊은 자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임희윤 기자의 죽기전 멜로디]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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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윤 기자
임희윤 기자
어쩌다 보니 한 살 또 나이를 먹었지만 귀는 다행히 나이를 안 먹었나 보다. 새로운 노래가 좋다. 지난해 데뷔한 여성그룹 뉴진스의 신곡 ‘Ditto’와 ‘OMG’에 빠졌다. 멤버 중 막내 혜인이 만 14세. 평균연령 16.6세. 지적 성장판 아닌 실제 성장판이 활짝 열린 아이돌이다. 특히나 애타는 짝사랑을 다룬 ‘Ditto’는 들어도, 들어도 안 물린다.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몽글몽글한 신시사이저 화성. 그 밑그림 위로 ‘Woo woo woo woo ooh∼’ 하는 도입부가 스피커에 흩뿌려질 때면 열 몇 살 때 이후 차갑게 식었던 이 내 ‘심장’이 아찔하게 되살아나는 듯하다. 어떤 노래가 대책 없이 좋아지면 그 노랫말을 실생활에서 내뱉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얼마 전 영국 출신 케이팝 작곡가 샘 카터가 기나긴 영어로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취지의 말을 건네기에 쿨하게 ‘Ditto(마찬가지)!’라고 받아줬다.

#1. 호모 사피엔스의 육체적 성장판에는 기한이 있지만, 문화적 인간인 호모 루덴스의 지적 성장판, 감성적 성장판에는 그런 것 따위 없나 보다. 지난해 우린 적잖은 나이에도 아직 그것이 닫히지 않은 아티스트 몇 명을 재확인했다. 나훈아는 판타지 게임 주인공 같은 뮤직비디오 연기로 파격했고, 조용필과 최백호는 공교롭게도 나란히 ‘찰나’라는 제목을 화두로 국내외의 젊은 케이팝 아티스트나 작곡가들과 협업해 컴백했다.

최근 만난 음악가 나윤선 씨는 “월드투어를 다녀도 비슷한 옷 세 벌만 가방에 넣어 다니고 머리 스타일도 바꾸지 않았다. 이번에 
‘다르게 살아보자’는 생각에 이미지에 변화를 줬더니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음악적 도전도 가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엔플러그 제공
최근 만난 음악가 나윤선 씨는 “월드투어를 다녀도 비슷한 옷 세 벌만 가방에 넣어 다니고 머리 스타일도 바꾸지 않았다. 이번에 ‘다르게 살아보자’는 생각에 이미지에 변화를 줬더니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음악적 도전도 가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엔플러그 제공
#2. 음악계에서 지난해 파격을 감행한 또 한 명의 ‘성장판 미(未)폐쇄’의 아티스트를 알고 있다. 작년 초 11집 ‘Waking World’를 낸 나윤선. 프랑스를 기반으로 유럽을 일찌감치 ‘접수’했던 이 세계적 재즈 보컬은 신작에서 손수 편곡과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해 기이한 ‘일렉트로닉 팝’의 소리 풍경을 펼쳤다. 2001년생 미국 팝스타 빌리 아일리시를 데뷔 때부터 눈여겨봤다던 그가 아예 아일리시의 작법을 연구하며 신작의 소릿결을 벼렸다고.

#3. 최근 만난 나 씨는 난생처음 머리카락을 탈색하고 새빨간 뾰족 안경테를 쓰는 시각적 변신도 감행한 상태였다. “그저 변화를 주고 싶었다”고.

“제 멘토가 계신데, 매일 아침 일어나 거울 보며 평생 안 해본 세 가지를 적어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자기 전까지 그중에 사소한 것 한 가지라도 이루려고 노력해 보라고…. 요즘 그 말이 머리를 울려요. 희윤 씨도 이참에 머리 한번 샛노랗게… 어때요?”

#4.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캐럴, 팝, 재즈를 부르던 1934년생 미국 팝가수 팻 분은 1997년, 6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에 광기를 폭발시켰다. ‘In a Metal Mood: No More Mr. Nice Guy’라는 앨범에서 민소매에 근육질 상체를 보여주며 주다스 프리스트, 메탈리카의 곡을 재해석한 것. 1949년생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2012년 앨범 ‘Wrecking Ball’에 격렬한 랩 메탈 밴드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기타리스트를 참여시켰다.

#5. 음악성과 나이는 반비례할까, 정비례할까. 모르긴 몰라도 ‘정답!’ ‘별 상관없다’에 한 표! 2011년, 미국 리코딩 아카데미는 블루스 피아니스트 파인톱 퍼킨스에게 그래미 트로피를 수여했다. 퍼킨스의 나이, 97세였다. 그래미 최고령 수상자다. 퍼킨스의 아성에 도전한 이가 있으니 1926년생 토니 베넷. 팝 아이콘 레이디 가가와의 듀엣 앨범으로 지난해 그래미를 받았다. 95세였다.

#6. 별난 성장판 이야기는 예술계, 별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다. 2023년은 다 함께 귀를 좀 더 열어 보는 해로 삼으면 어떨까. 각종 음원 서비스, 유튜브 덕에 지구상 거의 모든 음악을 거의 공짜로 들어 볼 수 있는 지금은 바야흐로 ‘듣기’의 골든 에이지(황금시대)니까.

#7. 임종 때 주의사항으로 회자되는 흔한 상식(?) 하나. 심장은 정지해도 청각은 당분간 살아 있으니 고인 곁에서 험담하지 말라는 얘기다. 그러고 보면 청각이야말로 가장 늦게 늙고 가장 늦게 닫히는, 젊음의 감각이 아닐까. 그러니 내 곁의 그대, 부디 말해 달라. 나와 함께 늙어가겠다고. 새 청바지를 사러 함께 외출하겠다고. 나와 함께 2033년에도, 2043년에도, 2083년에도 신곡을 듣고 ‘개똥 평론’을 나누겠다고…. 지금 당신께 듣고픈 말이 있으니 그것은 단 하나.

‘Ditto(나도 그럴게)!’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감성적 성장판#성장판 미(未)폐쇄#나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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