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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권력에 펜을 겨눈 시인, 세 번 살해당하다[석영중 길 위에서 만난 문학]

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입력 2021-10-08 03:00업데이트 2021-10-0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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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문학과 정치는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특히 러시아의 경우 푸시킨에서부터 솔제니친에 이르기까지 정치와 무관한 문호는 존재한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시아 작가에게 ‘참여’냐 ‘순수’냐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어떻게’ 참여하는가만이 문제다. 러시아에서 작가란 재미있고 아름다운 허구를 지어내는 장인이 아니라 심오한 통찰력으로 현실 정치를 비판하고 민중을 이끌어가는 ‘큰 스승’이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그래서 역대 황제를 비롯한 최고 권력은 언제나 정적(政敵)보다 대문호들을 더 두려워했다. 위대한 작가들은 문자 그대로 ‘무관의 제왕’이었다. 그러나 작가에게 부여된 제왕의 권위는 때로 그의 생존을 위협하고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심지어 죽은 후에도 그의 이름을 복잡한 정치적 셈법에 휘말리게 한다. 천재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1893∼1930)는 특별히 비극적인 경우다. 20세기 러시아를 강타한 정치적 대격변은 그를 무려 ‘세 번이나’ 살해했다.

시인과 혁명이 만났을 때

마야콥스키는 1910년대 러시아 시단에 미래주의라는 아방가르드 유파와 함께 등장했다. 미래주의자들은 기존하는 모든 것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들은 구습에 물든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리고” 케케묵은 예술의 전통을 단박에 부숴버리기 위해 가장 전위적이고 기상천외한 형식의 실험에 뛰어들었다. 이 시점에서 미래주의는 공산주의와 의기투합했다. 양자 모두 기득권을 분쇄하고 새로운 질서를 도입한다는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특히 마야콥스키는 신생 볼셰비키 정권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육척 장신의 시인이 무대에 등장하여 이글거리는 두 눈으로 청중을 쏘아보며 천둥 번개가 치듯 부르주아를 질타할 때 시인과 혁명은 하나로 합쳐졌다.

그러나 혁명이 적군의 승리로 마무리되고 소비에트 관료주의가 정착해감에 따라 시인과 공산주의의 밀월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향해 치달았다. 가장 치명적인 요인은 양자가 견지한 극명하게 다른 혁명관이었다. 마야콥스키가 헌신한 예술 형식의 혁명은 ‘영원히 진행 중인’ 창조행위였다. 반면 소비에트 정권에 볼셰비키 혁명은 ‘마지막 혁명’이 되어야만 했다. 자기들이 ‘마지막 혁명’의 완성자라 주장하는 정권은 철저하게 당의 통제를 받는 평균적인 문학을 요구했고 ‘영원히 진행 중인’ 창조의 주역은 통제와 평준화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시인은 혁신을 깔아뭉개는 문화정책과 “털어도 털어도 날마다 되앉는 먼지” 같은 진부함에 분노했다. 그는 “총검에 버금가는 펜”을 소비에트 권력자들, 민완가와 책략가들, 정치적 속물들에게 겨누었다. 한때 혁명의 나팔수를 자처했던 시인이 정권의 눈엣가시로 전락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 번의 정치적 타살


소비에트 정권의 눈엣가시였던 마야콥스키가 1930년 사망하자 스탈린은 그를 “소비에트 시대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치켜세운다. 이후 구 소련 전역에 마야콥스키 동상과 그의 이름을 딴 광장이 들어선다. 사진은 1958년 모스크바 마야콥스키 광장에 세워진 동상. 조각가 알렉산드르 키발니코프의 작품이다. 광장은 현재 승리광장으로 개명됐다. 석영중 교수 제공
1930년 4월 15일 오전 10시 15분, 마야콥스키는 모스크바 시내 루뱐카 거리의 작업실에서 권총 자살로 37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자살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어차피 몇 년 뒤에 숙청당했으리라는 것이 평론가들의 중론이다. 당황한 정부는 그의 죽음이 과로로 인한 신경쇠약에서 비롯되었다고 발표함으로써 서둘러 사태를 종결지었다. 축소와 은폐가 뒤따랐다. 마야콥스키라는 이름은 슬슬 교과서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마야콥스키에 대한 첫 번째 살해다.

반전은 1935년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스탈린의 논평이 실리면서 일어났다. 문화 아이콘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스탈린은 마야콥스키를 “우리 소비에트 시대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 추켜세우며 “그의 작품과 추억에 대한 무관심은 범죄다”라고 썼다. 이때부터 구소련 전역에 마야콥스키 컬트가 광풍처럼 몰아쳤다. 모스크바를 비롯한 방방곡곡에 마야콥스키 동상과 마야콥스키 광장이 들어서고 마야콥스키 기념관이 세워졌다. 아방가르드 시인은 완전히 묻히고 혁명 시인이라는 이름만이 과도하게 부풀려졌다. 그의 일부 선동적인 시구들이 정치가들과 소년단 지도교사들의 입을 통해 무한히 증폭되고 확산되었다. 시인을 깊이 존경했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정권이 시인을 두 번 죽였다며 애통해했다. 세 번째 살인은 페레스트로이카와 함께 찾아왔다. 공산주의의 사멸과 더불어 마야콥스키에게도 스탈린의 범죄에 동조한 어용시인의 낙인이 찍혔다. 1991년도에 마야콥스키 광장은 원래의 이름인 승리 광장으로 개명되었다. 마야콥스키 동상은 철거되지 않았지만 그는 잊혀지고 있었다.

‘스웨그’ 넘친 청춘의 시인

마야콥스키가 12세 때 쓴 시. 어머니와 두 누나가 살던 아파트에 전시돼 있다. 석영중 교수 제공
마야콥스키의 일부 과장된 시들은 청년 래퍼의 ‘스웨그’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은 시대를 앞서간 천재성이다. 그는 모국어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러시아어가 가지고 있는 시적 잠재성을 극한으로 밀고 갔다. 그는 새로운 비유를 고안해 내고 참신한 리듬을 만들어내기 위해 “날마다 10시간 내지 18시간 동안 러시아어를 중얼거렸다.” 마야콥스키는 “달구어진 육체에 봄처럼 설레는 심장이 스무 개나 박힌 시인”이었다. 그의 말은 “영혼을 소생시키고 육체에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가 만들어낸 전대미문의 리듬은 외국어로 전달할 길이 없다. 그러나 몇몇 비유들은 번역으로도 그 강렬함이 충분히 전달된다. 그에게 한밤의 우주는 “별들이 진드기처럼 박힌 거대한 귀를 앞다리에 처박은 채 잠자고 있다”. 그는 자신의 “등골로 만든 플루트를” 연주했고 “실성한 보석공처럼 스스로의 절규를 깎아 다듬어 다이아몬드의 시로 만들었다”. 언어가 그를 “종이에 못 박을 때까지” 그는 시를 썼고 자신의 시가 “힘겹게 시간의 암석을 뚫고 묵직하게, 거칠게, 생생하게” 살아남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마야콥스키는 영원한 청춘의 시인이다. 그의 시 속에 들어있는 도전과 용기와 자유와 분방함과 대담함은 젊음만의 특권이다. 그의 시는 청춘의 오만과 분노와 과장과 허세까지도 자양분으로 흡수한다. 그 혼란스럽고 눈부신 젊음의 힘은 늙어가는 소비에트 정권에 경종을 울리며 20세기 시사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화려하고 극적이고 창의적인 표현을, 가장 저돌적이고 역동적인 리듬을 창출해냈다. 그는 음악에서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영화에서의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이 이룩한 것과 동등한 업적을 시에서 이룩했다. 모스크바의 마야콥스키 기념관이 장기간에 걸친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거쳐 2023년에 개장될 예정이라고 한다. 지난 세기 러시아가 낳은 최고의 시인을 정치 혁명의 아이콘이 아닌 창조와 혁신의 아이콘으로 재평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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