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임원’서 택배사 ‘직원’으로… “과거 내려놓으니 새 길 활짝”[서영아의 100세 카페]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9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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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높이 낮춘 강찬영-박경옥 부부
강씨, 퇴직후 현실 직시하는 데 2년… 택배분류 일 맡은후 몸도 튼튼해져
“기대 낮추고 일 보람 찾으면 편안”
박씨, 한의학 관련 강사로 변신… 남편 퇴직후 경험 책으로 내기도

퇴직 이후 ‘내려놓기’를 통해 인생 2막을 펼치고 있는 박경옥 강찬영 부부. 친구와 노는 것처럼 함께 공부한다는 부부가 서울 교보문고에서 포즈를 취했다(왼쪽 사진). 택배 물류센터를 배경으로 한 강찬영 씨(위 사진)와 온라인 강의 중인 박경옥 씨. 강 씨는 물류센터에 촬영 오는 것을 극구 거절하는 대신 셀카를 찍어 보내줬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강찬영 박경옥 씨 제공
퇴직 이후 ‘내려놓기’를 통해 인생 2막을 펼치고 있는 박경옥 강찬영 부부. 친구와 노는 것처럼 함께 공부한다는 부부가 서울 교보문고에서 포즈를 취했다(왼쪽 사진). 택배 물류센터를 배경으로 한 강찬영 씨(위 사진)와 온라인 강의 중인 박경옥 씨. 강 씨는 물류센터에 촬영 오는 것을 극구 거절하는 대신 셀카를 찍어 보내줬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강찬영 박경옥 씨 제공
53세에 닥친 퇴직, 재취업과 두 번째 퇴직, 그 후 2년간의 도전과 실패의 반복…. 산전수전 겪으며 어깨에서 힘을 뺀 남편은 택배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전업주부였던 아내는 작가로 데뷔했다. 가장의 퇴직 이후 숨 가쁘게 돌아간 자신들의 삶의 기록이 책이 되었다. 이제 깜깜한 터널 같던 시기를 빠져나온 부부는 “내려놓는다는 각오를 하니 새로운 삶이 펼쳐졌다”고 말한다.

○ 갑작스레 닥친 경영진 일괄 사퇴

7년 전, 강찬영 씨(60)는 27년간 다닌 한진해운 임원직을 내놓았다. 아무리 임원이 ‘임시직원’의 준말이라지만, 성과가 좋았고 나이도 있어 한 번쯤은 더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경영이 휘청대던 회사는 주주들에게 ‘자구 노력’을 보여줘야 했다. 사장을 비롯해 전 경영진이 일괄 사퇴했다. 그 2년 뒤 한진해운은 파산했다.

“처음엔 여유가 있었지요. 4개월 만에 같은 계열 중소기업에 부사장으로 갔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주도한 외국 회사와의 프로젝트가 성사 직전에 무산되면서 두 번째 퇴직을 하게 됐죠.”

그래도 어딘가에 새로 자리를 잡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수히 많은 이력서를 썼지만 다음은 없었다. 그렇게 2년이 흘러갔고 통장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아내에게 별 얘기 없이 택배회사 물류센터 일을 시작한 것이 그 즈음이었다.

○집 줄이고,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삶

박경옥 씨(57)는 그런 남편을 지켜보며 “당신이라면 할 수 있다”고 격려했다. 하지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50대의 관리직 재취업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깨닫게 됐다. 이때까지도 과거의 씀씀이를 유지하고 있었고 두 아들은 대학생이었다. 마침 유학을 떠난 둘째 아들 학비까지 대주고 나니 위기의식이 들었다.

“매달 고정으로 들어오는 현금이 필요했어요. 남편만 쳐다볼 수 없어서 저도 돈 벌 길을 백방으로 찾았죠. 감초농사도 지어보고, 고향에서 해산물을 떼어와 택배로 팔아도 보고…. 결국 집을 줄이기로 했어요.”

정든 37평 아파트를 전세로 내놓고 16평 빌라로 이사했다. 남는 전세금으로 월세가 나오는 오피스텔을 장만했다. 이사 전 중고장터에서 팔 수 있는 건 모조리 팔고 못 파는 것은 버렸다.

박 씨는 서울시 등 각종 구직센터에서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찾았다. 동의보감과 분노조절장애 강사로 재능기부를 하다 보니 조금씩 수입도 생겼다. 이런 일자리들은 어떤 일이건 월 30만∼40만 원 정도만 벌 수 있도록 설계돼 있는데 경쟁이 치열하다.

“중노년 중 적은 수입이라도 얻으려 애쓰는 분이 무척 많아요. ‘상담’처럼 좀 우아한 일거리는 스펙이 대단한 분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어요. 다들 품위는 유지하면서 봉사 겸 사회생활 겸 해서 월 몇십만 원이라도 벌고 싶은 거죠.”

○“예순 다 돼 노동의 신성함을 배우고 있습니다”

강 씨는 4년 전 시작한 택배회사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매일 오후 4시경부터 11시경까지 택배 분류와 상하차 일을 한다. 젊은이들도 며칠 일해 보고 그만둔다는 ‘극한직업’이다. 업무량에 따라 출퇴근시간을 조절하는데 월수입은 120만∼130만 원 정도다.

“예순이 다 되어 육체노동의 신성함을 배우고 있습니다. 몸을 움직이니 잡념이 사라지고 건강해졌어요. 그렇게 노력해도 안 빠지던 체중이 8kg이나 빠졌습니다.”

오전에는 온라인으로 수업을 들었다. ‘주독야경(晝讀夜耕)’인 셈이다. 원광디지털대 동양학과에 등록해 오전 내내 강의 듣고 직장까지 왕복 2시간 남짓 걸리는 전철에서 복습하는 방식으로 생활의 리듬을 만들었다.

“회사 생활은 영업의 연속이라 매일 밤 술 마시고 주말이면 골프 치러 다녔습니다. 그런 생활에 중독돼 있었어요. 은퇴하면 좋든 싫든 자기 시간을 갖게 됩니다. 시행착오 겪고, 시달리고, 바뀐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게 뭐냐’는 근원적인 질문을 시작하게 되죠. 진정한 나를 찾는 일은 처음입니다.”

그가 내민 명함의 직함은 ‘우주변화원리연구소’ 소장이다. 동양학을 함께 공부할 사람을 찾는다고 한다.

○“사모님 소리 듣던 과거는 싹 잊었습니다”

아내는 함께 헤쳐 나온 남편의 퇴직 과정을 책으로 써냈다. 2019년 7월 나온 ‘오늘 남편이 퇴직했습니다’(나무옆의자)다. 최근 5쇄를 찍었고 대만에서 번역본이 나왔다고 한다.

난생처음 책을 쓸 용기를 낸 계기가 있었다.

“남편 퇴직 이후 아무것도 안 풀릴 즈음 우울증이 찾아왔어요. 그 무렵 중장년들이 본인 이야기를 털어놓는 유튜브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는데, PD와 카메라맨 두 분이 제 얘길 너무 열심히 들어주시는 거예요. 비록 어떤 해결책도 줄 수는 없지만 누군가가 제 말을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고 마음속 응어리가 풀어지며 후련해졌어요. 당시 책을 쓰면 어떻겠느냐는 권유도 받았죠.”

―책에는 남편이 싫어할 내용도 있는 것 같은데….

박 씨가 “쉽지 않았다”며 웃기 시작하자 강 씨가 끼어든다. “은퇴하는 분들에게 제가 겪은 것을 전하는 것도 의미 있겠다 싶었고 책이 조금 과장되게 포장되더라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과정에서는 힘들었어요. ‘삼식이’란 표현이 대표적입니다. 절대 그 말을 쓰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는데 썼더라고요. 제가 화를 많이 냈죠.”

박 씨는 “독자들 중에 책을 낸 것 자체에 대해 비난하는 반응도 있었다”고 말한다.

“대기업 임원까지 했으면 조용히 살 것이지 무슨 택배회사에서 일을 하냐는 둥의 비난이죠. 직업에 대한 고정관념이 심한 것 같아요. 일자리란 다양한 역할 중 하나를 내가 하고 있을 뿐이에요. 우린 모두 다양성의 세계를 살고 있고 안정된 삶은 없어요. ‘대기업 임원까지 한 친구가 왜 나락으로 떨어졌냐’는 식으로 보는데, 우린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거든요.”

○은퇴 후 배우자는 보험 같은 존재

큰아들은 지난봄에 결혼했고 둘째는 유학 간 일본에서 취직해 눌러앉았다. 부부의 고난을 지켜보며 아이들은 일찍 철이 들었다. 집에는 오롯이 부부만 남았다. 박 씨는 “서로 스승이자 친구이자 동반자로 다중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부부가 택한 놀이는 공부다. 돈이 적게 들고 만족도는 높기 때문이란다.

―퇴직이 갑작스러울수록 마음의 상처, 달라진 생활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퇴직 후 마음치료 프로그램이 있어야 해요. 제가 우연히 유튜브 프로그램을 통해 마음치료 효과를 얻었듯이 말이죠. 퇴직자가 ‘난 당시 억울했어. 난 더 일할 줄 알았단 말야’라고 충분하게 터놓을 수 있는 자리가 없어요.”(박 씨)

○은퇴 후 재취업은 기대 수준 낮춰야

―이제 경력을 살린 재취업은 포기한 건가요.

“50세 넘어 경력을 살린 재취업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란 걸 서서히 깨달았어요. 생각해 보세요. 어딜 가나 피라미드식 조직인데 그 상단에는 내부에서 올라오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있어요. 웬만큼 대단한 능력이 있거나 전관예우가 아니고서야 굳이 외부에서 굴러온 돌을 그 꼭대기에 박아 넣을 이유가 없는 거죠.”(박 씨)

강 씨의 말은 더 현실감이 있다. “회사가 나에게 연봉 1억 원을 준다면 최소한 10억 원 정도 이익을 뽑아내야 합니다. ‘내가 이 회사에 10억 원 정도 가치를 가져다줄 수 있는가’라고 자문해 봐야 하는 거죠. 입장 바꿔놓고 생각하니 판단이 되더라고요.”

이런 그는 “지금이 딱 좋다”고 말한다.

“이리저리 둘러보니 월급 200만 원 정도부터는 고용주나 일 그 자체에 자기 삶을 구속당해야 합니다. 제 나이쯤 되면 일은 보람될 정도로만 열심히 하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대신 소비를 줄이면 됩니다. 적게 벌어 적게 쓰니 세상 편하고 즐겁습니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임원#직원#노후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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