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유물의 타임캡슐, 경주 월지[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입력 2021-06-15 03:00수정 2021-06-15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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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지에서 발견된 신라의 유물들. 금동삼존판불은 보물 제1475호로 월지에서 출토된 판불 10점 가운데 하나다.
경주 월지(月池)의 인기가 나날이 치솟고 있다. 경주시가 가꾸어온 꽃밭과 월지 경관이 어우러지면서 많은 사람이 그곳을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으로 손꼽는다. 월지는 신라 문무왕 때 궁궐 안에 만들어진 인공 연못이다. 그 시절에도 신라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핫 플레이스’였을 것이다.

근래 우리나라 고고학계에서 저습지 발굴이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전국 곳곳의 성터에 남아 있는 연못 발굴이 줄을 잇고 있다. 연못 속 펄이 나무나 동물 뼈 등 유기물을 잘 보존해주기 때문에 다른 유적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중요 유물이 출토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저습지 발굴의 첫 출발점이 바로 경주 월지 발굴이었다.

○ 신라의 유물이 쏟아진 월지
월지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 궁궐을 넓히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삼국사기’에는 674년(문무왕 14년)에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었으며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연못이 바로 월지이다.

월지였던 연못 이름은 후에 안압지(雁鴨池)로 불렸다. 신라 천년 사직이 종언을 고하자 궁궐 역시 퇴락의 길을 걸었다. 월지 주변의 고래 등 같은 기와건물들, 연못 속에 만들어진 조그마한 인공섬마저 무너져 내리면서 연못은 부평초나 연꽃이 무성한 모습으로 변했다. 조선시대 묵객들은 그곳을 안압지라 불렀다. 글자 그대로 기러기와 오리가 노니는 연못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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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황량한 연못이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1974년의 일이다. 청와대 지시로 수립된 경주종합개발계획에 따라 그해 말부터 연못 정비를 위한 준설작업이 시작됐다. 양수기로 연못의 물을 빼낸 다음 포클레인으로 진흙을 걷어내는 과정에서 다량의 유물이 섞여 나왔고 월지 호안석축의 일부가 드러났다. 공사는 즉시 중단되었고 이듬해 3월부터 발굴조사가 시작됐다.

○ 일본 교류 보여준 금동 가위
경주 월지에서 발견된 보물 제1844호 금동초심지가위. 두 마리의 봉황이 머리를 교차하는 듯한 독특한 손잡이가 인상적이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4월 초, 조사원들은 연못의 호안석축 가운데 서쪽 부분을 노출하는 한편으로 연못 내부의 펄을 계속 제거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이색적인 모양의 금동가위 1점이 출토됐다. 색깔만 조금 변했을 뿐 당장 사용해도 좋을 정도로 생생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가위는 형태부터 독특했다. 손잡이는 좌우로 조금 벌어졌는데 마치 두 마리의 봉황이 서로 머리를 교차하는 형상이었다. 표면 전체에 인동당초무늬가 빼곡히 조각되어 있고 물고기 알처럼 생긴 동글동글한 무늬가 여백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윗날 윗면에 각각 반달 모양의 조각이 덧붙여져 있었는데 초의 심지를 자를 때 심지가 밖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고안한 것이다. 비록 초의 심지를 자르는 가위에 불과하지만 뛰어난 실용성과 멋진 디자인, 세련된 금속공예 기법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근래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가위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8세기 무렵 신라가 바다 건너 일본과 매우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증명해 주었다는 점이다. 일본 나라현 동대사(東大寺·도다이사)에는 일본 왕실의 보물창고인 정창원(正倉院·쇼소인)이 있다. 그곳의 보물들 가운데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분명하지 않은 가위 한 점이 있었다. 그런데 월지에서 비슷한 금동가위가 출토됨에 따라 신라에서 수입한 물품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정창원 가위는 길이가 월지 가위보다 조금 작으며, 대칭을 이룬 손잡이는 월지 가위와 매우 비슷하다.

○ 오븐에서 소실된 목제 유물
위 사진은 건물 지붕마루 끝에 부착했던 기와, 아래 사진은 나무 주사위로 소리없이 춤추라는 뜻의 ‘금성작무’가 새겨져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5월 말에도 예상치 못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북쪽 구역에서 진흙을 제거하던 중 길이가 17cm 정도인 나무 조각 한 점이 드러났다. 조심스레 물로 씻던 조사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도 생생한 남근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궁궐 연못 속에서 이토록 사실적인 목제 남근이 출토된 이유를 놓고 많은 견해가 나왔는데, 여성을 상징하는 연못에 제사를 지내면서 넣은 제물로 보는 견해가 대세였다.

6월 중순에는 연못 서쪽 바닥에서 14면체의 나무 주사위가 출토됐다. 참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며 사각형이 6면, 육각형이 8면이고, 높이는 4.8cm 정도여서 한 손에 꼭 쥐고 놀이를 할 수 있는 크기였다. 각 면에 여러 글자의 한자로 구성된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그 가운데 ‘소리 없이 춤추기(禁聲作c)’ ‘술을 모두 마시고 크게 웃기(飮盡大笑)’ ‘술 석 잔을 한 번에 마시기(三盞一去)’ ‘누구에게나 마음대로 노래 청하기(任意請歌)’ 등 벌칙이 눈길을 끌었다. 이 때문에 이 주사위에 주령구(酒令具)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연못가 건물 위에 둘러앉아 박장대소하며 술잔을 돌리고 가무를 즐기던 신라인들의 풍류가 눈에 선하다.

그런데 신라인의 신앙 및 풍류를 잘 보여주는 목제 남근과 주령구는 현재 실물이 남아 있지 않다. 1979년 보존처리 전문가가 이 유물들을 건조용 오븐에 넣고 퇴근했는데, 아침에 출근해 보니 기계 과열로 모두 한 줌의 재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보존처리 장비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의 일이기는 하나 너무나도 아쉬운 대목이다.

월지 발굴이 끝나고 유물을 정리해보니 출토된 유물은 3만3000여 점에 달했다. 그 가운데는 실수로 연못에 빠뜨리고 안타까워했을 보물도 있고, 물속에 산다고 믿었던 신에게 소원을 빌면서 넣어준 물건도 있다. 궁궐이 무너지면서 연못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것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유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촉촉한 펄 덕분이다. 펄은 1200여 년의 세월 동안 마치 타임캡슐처럼 건축부재, 식기, 등잔, 휘장 걸이, 생활소품, 배, 불상 등 수많은 유물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가 토해냈다. 그러나 이 유적이 발굴된 지 반세기가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굴품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적은 편이다. 월지처럼 그곳 출토 유물에 대한 관심도 높아진다면 우리의 과거 생활사 연구가 한 단계 더 진전될 수 있을 것이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이한상의 비밀의 열쇠#경주#월지#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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