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겪은 계엄군의 외침…“더 용기내서 이제라도 진상규명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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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년 5월 22일 11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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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가 공개한 5·18민주화운동 당시 미공개 사진. 5·18 당시 광주 동구 금남로 일대에 한 시민이 계엄군에 끌려가고 있다. 2020.11.24/뉴스1 © News1
한국일보가 공개한 5·18민주화운동 당시 미공개 사진. 5·18 당시 광주 동구 금남로 일대에 한 시민이 계엄군에 끌려가고 있다. 2020.11.24/뉴스1 © News1
“민주화를 외친 시민들에게 총칼을 겨눴습니다. 지금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제41주년 5·18민중항쟁 민주기사의 날인 지난 20일, 광주 무등경기장에서 만난 임찬식 전국민주택시노동조합원 위원장(65)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조합원들이 목 놓아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일대에 울려 퍼지자 그는 41년 전 그날의 자신을 떠올렸고,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임 위원장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민주화를 열망했던 시민들에게 총과 칼을 겨눴던 20사단 20연대 7중대 소속 계엄군이었다.

현재는 서울에서 택시기사로 근무하면서 ‘민주기사의 날’마다 광주를 찾아 오월영령에 추모·사죄하고 있지만 죄인이라는 ‘마음의 짐’은 좀처럼 떨쳐내기 어렵다고 했다.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 선포되기 3일 전인 1980년 5월14일, 그는 소대원 등 70여명과 함께 군부의 명령에 따라 성남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타고 광주에 투입됐다.

도착 직후 중대장들은 당시 병장이었던 임 위원장을 비롯한 계엄군에게 ‘광주사태는 폭동이다. 폭도를 진압하라’고 세뇌시켰다고 했다.

그는 “기억하건대 중대장들이 소대원들을 모아놓고선 하는 소리가 ‘우리는 총칼을 들고 광주 폭도들과 싸우고 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말이었다”고 회상했다.

세뇌교육으로 민주화를 향한 외침을 폭동이라 치부했고, 계엄군들 스스로는 밤낮으로 울리는 총성에 되레 힘입어 사기진작을 했다고 한다.

“성남비행장에는 수 백 장의 삐라(전단)가 뿌려져 있었고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으니 폭도를 진압하라’는 내용이 담겨있었어요. 제대로 된 진상을 모르는 계엄군들은 폭도를 진압한다는 생각에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했죠.”

군 전역을 10개월가량 앞둔 그가 맡았던 임무는 ‘서구 농성동 한국전력 건물 진압’, ‘광산구 송정리역·송정리파출소 일대·외곽지역 사주경계’였다.

시민군과의 직접적인 대치는 없었지만 오월 광주는 참혹함 그 자체였다고 설명했다.

임 위원장은 “낮에는 오가는 시민 한 명 없고, 밤에도 불이 꺼진 도시, 유령도시이자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면서 “도로엔 시민군이 바리게이트로 사용한 나무와 폐타이어가 널브러져 있었고, 고무 같은 것이 불에 타는 냄새로 진동했다”고 말했다.

1주일 남짓한 진압 작전이 이어졌고, 그런 와중에 그를 무엇보다 힘들게 했던 것은 광주가 고향인 전우들이 시민군 진압 작전에 투입되는 것이었다.

임 위원장은 “광주가 고향인 전우들이 하루 정도 도심으로 외출을 다녀온 적이 있다”며 “전우가 말해주기를 시민군과 계엄군간 대치상황은 처참했고, 이를 목격한 전우들은 동향 사람들을 진압해야 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고 전했다.

‘제41주년 5·18민중항쟁 민주기사의 날’을 맞은 20일 오후 광주 북구 유동사거리 일대에서 태극기를 단 70여대의 민주택시노동조합 관계자들의 택시가 차량행렬 시위를 하고 있다. 민주택시노동조합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옛 전남도청 탈환의 기폭제가 됐던 택시 기사들의 차량행렬 시위가 있었던 5월20일을 민주기사의 날로 정하고 1997년부터 매년 이날 차량행렬 시위를 재현해 왔다. 2021.5.20/뉴스1 © News1
‘제41주년 5·18민중항쟁 민주기사의 날’을 맞은 20일 오후 광주 북구 유동사거리 일대에서 태극기를 단 70여대의 민주택시노동조합 관계자들의 택시가 차량행렬 시위를 하고 있다. 민주택시노동조합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옛 전남도청 탈환의 기폭제가 됐던 택시 기사들의 차량행렬 시위가 있었던 5월20일을 민주기사의 날로 정하고 1997년부터 매년 이날 차량행렬 시위를 재현해 왔다. 2021.5.20/뉴스1 © News1
시간이 흐르고, 4차례 정권이 바뀐 뒤에야 광주사태가 폭동이 아니라 ‘민주화를 향한 시초’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는 하루하루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그는 “계엄군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광주로 투입됐고, 상부의 명령에 따라 시민군 진압작전에 나섰다”며 “한동안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했다고만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가며 희생됐는데, 이제라도 관련자들은 반성하고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며 “더 많은 계엄군이 용기를 내고, 당시 상황을 증언해 5·18민주화운동을 바로잡는 데 일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두환씨를 향해 사죄 촉구의 말도 잊지 않았다.

그는 “역사적 사실을 증언하는 것에 대해서 이제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며 “당시 야전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 발포 명령을 내렸고, 명령을 하달받은 계엄군은 광주시민에 발포한 것으로 알고 있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전두환은 본인이 죽기 전까지 광주시민들에 사과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광주=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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