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바로잡기” vs “마녀사냥” 미국 달구는 취소문화 논쟁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입력 2021-04-08 03:00수정 2021-04-08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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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현장을 가다]
이달 초 미국 버지니아주 매클레인에 있는 반스앤드노블서점의 2층 서적 코너, 한쪽 책장이 ‘닥터 수스‘의 책들로 채워져 있다. 매클레인=이정은 특파원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이달 초 미국 버지니아주 매클레인의 반스앤드노블 서점을 찾았다. 2층 어린이 도서 책장에 유명 동화작가 ‘닥터 수스’의 책이 가득했다. 닥터 수스는 ‘모자 속 고양이’ ‘그린치는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훔쳤나’ 등 영어 고유의 운율을 살린 맛깔스러운 글과 독특한 삽화로 전 세계적 인기를 얻은 동화작가 시어도어 수스 가이젤(1904∼1991)의 필명이다. 대부분의 미국 어린이가 그의 책을 보고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 ‘내가 동물원을 운영한다면(If I Ran the Zoo)’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원숭이를 연상시키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의 흑인, 눈이 찢어진 동양인 그림 등이 유색인종을 비하한다는 논란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지난달 수스의 유가족이 운영하는 닥터수스엔터프라이즈는 이 책을 포함해 인종차별 의혹에 휘말린 총 6권의 판매를 중단한다고 밝혔다. 서점 직원은 “우리 역시 그 결정을 이해하고 따른다”며 판매가 중지된 책들을 다시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미국을 뒤흔드는 취소 문화

최근 그의 대표작 중 ‘내가 동물원을 운영한다면‘ 등 6권이 흑인, 아시아계에 대한 비하 요소가 있다는 이유로 판매가 중단됐다. AP 뉴시스
닥터 수스 책의 판매 중지는 지난해 5월 백인 경관의 목 조르기로 숨진 비무장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이후 미국을 강타한 ‘취소 문화(Cancel Culture)’의 단적인 사례다.

특히 지난달 한인 여성 4명을 포함한 아시아계 희생자 6명을 낸 조지아주 애틀랜타 연쇄 총격 사건으로 플로이드 사태 못지않게 취소 문화가 위력을 떨치고 있다. 아시아계를 향한 증오범죄 우려가 커지고, 이에 맞서 아시아계 단체와 정치인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도 이런 분위기에 힘을 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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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기 아동도서 ‘캡틴 언더팬츠’ 시리즈의 ‘욱과 글럭의 모험: 미래에서 온 쿵후 원시인’의 출판도 정지됐다. 어린 두 자녀를 둔 한국계 미국인이 한 온라인 청원 사이트에 “인종에 관한 고정관념을 강화하고 아시아계 차별을 조장하는 내용이 담겼다”며 퇴출 청원을 올린 후 이런 결정이 내려졌다. 청원자는 “아시아계 등장인물들의 눈을 모두 찢어지게 그려놓았다”고 비판했다. 비아시아계 주인공이 어려움에 처한 쿵후 전문가를 구출한다는 내용이 전형적인 백인 영웅 서사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가수 오지 오스본의 아내로도 유명한 방송인 샤론 오스본(69) 또한 최근 미 CBS방송의 토크쇼 진행자에서 사퇴했다. 오스본은 흑백 혼혈인 메건 마클 영국 왕손빈을 비판한 영국 유명 방송인 피어스 모건(56)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자리를 잃었다. 모건은 영국 왕실 내 인종차별을 폭로한 왕손빈을 향해 ‘거짓말을 일삼아 코가 늘어나는 피노키오’라고 비난해 영국 ITV방송 프로그램에서 하차했다. 오스본까지 하차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모건은 “나를 옹호했다는 이유만으로 잘렸다”며 반발했다.

지난달 초에는 유명 연예지 ‘틴 보그’의 흑인 여성 편집장으로 발탁된 알렉시 매커맨드(27)가 10대 시절 반(反)아시아적이고 동성애를 혐오하는 트위터 글을 올린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취임 약 2주 만에 사퇴했다.

단골 주제는 ‘반(反)트럼프’

또 다른 인기 아동도서 시리즈 중 하나인 ‘욱과 글럭의 모험: 미래에서 온 쿵후 원시인‘ 역시 아시아계 비하 의혹에 휩싸여 출판이 정지됐다. 블루스카이 출판
재임 내내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였던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과 주변인은 취소 문화의 단골 대상이다. 폴리티코 등에 따르면 트럼프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 변론팀을 이끌었던 유명 변호사 데이비드 쇼언은 2월 “올해 가을 학기에 한 로스쿨에서 민권법 강의를 맡을 계획이었지만 탄핵 변론을 맡은 후 대학 측이 ‘일부 학생과 교수가 불편해할 수 있다’며 사실상 강의 불가 통보를 했다”고 밝혔다. 그는 “가르치는 일을 좋아해서 슬프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트럼프 전 대통령과 가까운 일부 기업인은 조직적인 불매 운동에 직면했다. 올해 1월 트럼프 지지자가 주도한 전대미문의 의회 난입 사태 직후 워싱턴 백악관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만났던 베개 제조업체 ‘마이필로’의 마이클 린델 최고경영자(CEO)가 대표적이다. 당시 그가 트럼프 전 대통령과 계엄령 선포 문제를 논의했다는 보도가 잇따르자 미 최대 주방·욕실용품 소매업체 ‘베드배스앤드비욘드’ 등이 잇따라 마이필로의 판매를 중단했다. 하지만 린델 CEO는 “취소 문화에 굴하지 말고 맞서야 한다. 미국은 위험에 처했다”고 개의치 않을 뜻을 밝혔다.

의회 난입 사태 당시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들도 잇따라 트럼프 전 대통령의 계정을 영구 정지시킨 것도 일종의 취소 문화로 평가받고 있다. 페이스북은 최근 트럼프 전 대통령이 며느리 라라(39)와 한 인터뷰 동영상도 삭제했다. 라라가 개인 온라인쇼 ‘더 라이트 뷰’에서 진행한 시아버지와의 대화 내용 일부를 페이스북에 올리자 페이스북 계정이 정지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등장했다며 가차 없이 삭제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 측은 그를 향한 취소 문화가 일종의 정치 보복이라고 비판한다. 탄핵심판 변론 당시 그의 변호팀은 “정치적 수사(rhetoric)를 벌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부정하는 ‘헌법적 취소 문화’”라고 꼬집었다.

“마녀사냥 지나쳐” 우려도

실제 취소 문화를 둘러싼 여론은 팽팽히 맞선다. 취소 문화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쪽은 ‘시대가 달라진 이상 인종차별 등에 대한 기준이 엄격해져야 한다’ ‘여성혐오, 인종주의, 아시아계 및 흑인 혐오 발언을 표현의 자유로 포장해 정당한 취소 문화를 공격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두둔한다.

반면 ‘단순한 사회적 압박을 넘어 극단주의와 정치 양극화를 부추기고 있다’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자기 검열을 부추겨 민주주의를 저해한다’는 반론 또한 상당하다. 취소 문화 반대론자들은 소셜미디어에 ‘취소 문화가 미쳤다’ ‘취소 문화를 취소해야 한다’는 글까지 올리고 있다.

최근에는 취소 문화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의견이 힘을 얻는 분위기다. 지난달 말 하버드대 미국정치학센터(CAPS), 여론조사회사 해리스폴의 공동 조사 결과 응답자의 64%는 “취소 문화를 ‘자유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54%는 “온라인에 의견을 올렸을 경우 금지당하거나 해고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야당 공화당과 보수세력은 취소 문화가 일종의 ‘공개적인 마녀사냥’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지난달 유명 보수단체 보수정치행동회의(CPAC)가 ‘취소되지 않는 미국(America Uncanceled)’이라는 주제로 행사를 개최한 것 역시 취소 문화에 대한 보수층의 반발 심리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취소 문화(Cancel Culture)
특정 사안에 대해 동의하지 않거나 사회적 압박을 가하기 위해 대규모 취소에 관여하려는 성향이나 행동. 최근에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이뤄지는 특정 제품, 기업, 인물 등에 대한 공개적 반대 행위를 가리킨다. 불매운동, 소셜미디어에서의 관계 끊기 등이 포함된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lightee@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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