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부터 코로나까지…재난·재해 구호·모금의 산 역사 희망브리지

장윤정 기자 입력 2021-03-08 14:18수정 2021-03-08 14:44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BC를 코로나 이전(Before Corona), AC를 코로나 이후(After Corona)로 부르며 세계는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이자 퓰리처상을 받은 토머스 프리드먼이 지난해 칼럼 ‘새로운 역사적 경계’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미칠 영향을 두고 쓴 표현이다. 실제로 지난 15개월 사이 우리 삶은 프리드먼의 표현대로 달라졌지만 우리 국민은 코로나19 위기 속에서도 저력을 보였다. 국내 첫 확진자가 나온 지 3달 만에 2000억 원이 넘는 성금이 모였다. 정부의 1차 재난지원금이 지급되기도 전이다. 모금단체들은 방역 마스크를 구하지 못하는 이웃, 치료를 받는 이웃, 시설이나 집에 격리된 이웃, 의료진에게 필요한 물품을 전했다. 코로나19 위기를 계기 삼아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를 중심으로 우리 민간모금의 역사를 돌아봤다.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민간모금의 역사

1963년 수해 당시 동아일보가 각계에서 의류, 신발, 쌀, 비누 등 수해의연금품을 모아 전달하는 모습.

한국에서 민간모금이 시작한 것은 코로나19가 강타하기 100년 전(19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에 큰 수해가 발생했지만 조선총독부 지원은 미미했다. 이에 동아일보가 그해 7월 의연금품을 모집했고 이는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최초의 민간모금 운동으로 기록됐다.

명맥이 잠시 끊겼던 언론사 주도 민간모금은 광복 이후 재개된다. 언론사들은 6·25 전쟁 기간에도 모금 운동을 펼쳐 피난민을 도왔고 수해나 가뭄 피해가 나면 주도적으로 성금을 모았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해 가짜 모금을 진행하거나 횡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의연금품의 쏠림, 소외와 같은 부작용도 나타났다.

주요기사
모금창구 일원화의 필요성이 대두되던 중 1961년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에 큰비가 내려 수많은 인명,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이 때 언론사를 주축으로 한국 최초의 민간모금 기구 ‘전국수해대책위원회’가 설립됐다. 전국수해대책위원회는 임시기구였던 탓에 2달 만에 자진 해체하지만 4274만 원의 모금액으로 신속한 구호활동을 펼치면서 ‘민간모금 운동 일원화’의 필요성을 각인시켰다.

언론사와 사회단체들은 민간모금 운동을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끌어갈 새로운 상설기구의 설립에 뜻을 모아 같은 해 10월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의 전신 ‘전국재해대책위원회’를 발족했다. 이를 기점으로 국내 민간모금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다양한 모금 방식 개발하며 이재민과 불우이웃의 곁을 지킨 희망브리지

체신부는 우표모금을 진행하고, 구호우편 전보 등을 무료로 취급해줬다.

재난·재해가 발생한 후 시작하는 모금 활동으로는 즉각적인 구호 활동이 어렵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는 정부와 함께 사전 모금 문화를 조성했다. 1961년 학생모금, 공무원모금, 극장모금, 경기장모금을 시작으로 1963년 우표모금을 도입했다.

옛 사랑의 열매
1972년 ‘사랑의열매’ 범국민 모금운동 당시 광화문지하도에서 ‘사랑의열매’를 달아주는 육영수 여사와 고재욱 회장.
사랑의 열매를 달아주는 육영수 여사.


1966년엔 역사적인 캠페인을 전개한다. 동아일보 사장으로 있으면서 5대 희망브리지 회장에 취임한 고재욱 회장이 범국민적 관심과 참여를 독려하고자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설득해 ‘사랑의 열매 달기 운동’을 시작한 것. ‘재해구호의 달’ 지정에도 힘을 썼다.

고 회장은 1976년 작고하기까지 협회의 기틀을 닦는 데 애썼다. 특히 사회단체이던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를 사단법인으로 전환했다. 이전까지 성금 전액을 모두 구호비로 지출해야 했던 협회는 비로소 운영기금을 적립할 수 있게 됐다.

2012년 9월 KBS에서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볼라벤 피해 이웃 돕기를 위한 ARS 성금 모집이 한창이다.

이후에도 대형재난·재해가 국민들에게 상처를 남긴 가운데 희망브리지는 1996년 방송사 협조로 국내 모금 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온 ARS 모금을 시작했다. 기탁자가 신문사나 방송사를 찾아가 의연금을 낼 필요 없이 집에서 전화 한 통으로 기탁할 수 있다는 장점에 ARS 방식 모금액은 점차 그 규모가 커졌다.

획기적인 모금 방식을 도입하면서 피해 주민을 돕기 위한 국민 성금 규모도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의연품도 이전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아졌다. 의연품을 적재하고 분류할 작업 공간이 부족해 제때 배분하기에 어려움이 생기자 희망브리지는 1997년부터 광역물류센터 건립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다. 예산 지원 과정과 부지 선정에 난항을 겪었지만, 2004년 경남 함양과 이듬해 경기 파주에 물류센터가 준공되면서 희망브리지는 체계적인 물류 체계를 바탕으로 전국 각지의 재해에 더욱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됐다.

●재해구호 전문 법정기관으로 재도약

2011년 1월 3일 희망브리지의 임시주택을 실은 트럭들이 연평도로 향하고 있다.

1998년 사랑의 열매로 유명한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출범했고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는 재난·재해 모금·구호에 전념하게 되면서 2002년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한다. 새로운 재해구호법 시행으로 법정기관으로 재탄생한 것. 모금사업을 통일성 있게 집행할 수 있게 되면서 신속하고 체계적인 지원에 나설 수 있게 됐다. 재해구호 전문기관으로서 지자체의 구호업무를 위탁 계약할 수 있는 자격도 갖게 됐다.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는 온라인 모금과 전산화 시스템을 도입해 모금과 분배의 효율화를 도모했고, 재해 피해지역의 오염된 의류와 이불 등을 세탁해주는 새로운 구호활동도 개발했다.

이후에도 희망브리지는 2002년 태풍 루사, 2003년 태풍 매미, 2018년 경북 포항 지진, 2019년 태풍 링링 등 자연재해는 물론 2009년 태안 기름유출 사고, 2010년 연평도 포격 피해, 2014년 세월호 참사, 2019년 강원 산불, 코로나19 등 사회재난 시에도 피해 국민이 하루빨리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1961년부터 지난해까지 60년 동안 희망브리지 모금액은 1조5000억 원을 넘어섰고, 누적 지원 구호 물품은 5000만 점이 넘는다.

장윤정 기자 yunjng@donga.com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0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