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19세기… 韓日 운명을 가른 순간[박훈 한일 역사의 갈림길]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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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마주하다]

메이지 정부군과 반란군이 맞붙은 서남전쟁(1877년). 일본에서는 이 전쟁을 끝으로 더 이상 정치 리더십의 결정적인 균열은 없었다. 당시 군기로 사용된 욱일기를 든 쪽이 정부군. 사진 출처 구마모토시 박물관
메이지 정부군과 반란군이 맞붙은 서남전쟁(1877년). 일본에서는 이 전쟁을 끝으로 더 이상 정치 리더십의 결정적인 균열은 없었다. 당시 군기로 사용된 욱일기를 든 쪽이 정부군. 사진 출처 구마모토시 박물관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1876년 한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가 체결되었다. 그로부터 지난 150년간 겪었던 일본과의 부대낌, ‘파란만장’이라는 말로밖에 달리 표현하기 어려운 역사를 새삼 반추하려 한다. 21세기 초엽인 지금 유쾌하지도 않은 이 기억을 굳이 반추하려는 것은, 이제야 그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가능해진 이유는 대한민국의 성장이다. 세계열강에 처참하게 능욕당했던 한국이 제국주의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도 세계열강의 하나가 되었다. 이른바 ‘세계 10대 강대국’이나 ‘경제대국’이라는 나라 중 한국과 같은 과정을 거쳐 성장한 국가는 없다. 대한민국의 이런 도약에 가장 당황한 나라는 아마도 일본일 것이다. 서양 열강에 혹은 대국 중국에 느끼는 콤플렉스를 한국(조선) 멸시로 견뎌온 게 근대 일본의 민족주의다. 그 깊은 기둥이 한국의 도약으로 목하 무너지는 중이다. 혐한 정서는 그 당혹감의 적나라한 표현이다. 오늘은 이 연재를 위한 총론이다.》

18세기 동아시아를 둘러보면 청은 강희제-옹정제-건륭제, 조선은 숙종-영조-정조, 일본은 도쿠가와 요시무네-도쿠가와 이에하루-도쿠가와 이에나리로 이어지는 안정기이자 전성기였다. 같은 시기 전쟁과 혁명으로 얼룩졌던 유럽과 대조적이다. 당시 조선 인구는 1000만∼1500만 명 정도였고 일본은 3000만 명을 넘었다. 조선의 농업 생산력은 일본의 2분의 1∼3분의 2 정도였던 걸로 추정된다. 그런데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과 청은 급격히 무너진 데 비해 일본은 그럭저럭 버티다 대도약을 이뤄냈다. 도대체 19세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한국과 일본의 운명이 그토록 극적으로 갈린 것인가.

日봉건세력, 메이지유신 이끌어
먼저 정부와 정치적 리더십 문제다. 조선 국왕은 그에 견줄 만한 다른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었으나, 국가권력이 사회기층까지 촘촘히 작동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국가권력은 대개 군(郡) 단위에 머무는 경향이 있었다. 일본은 막부와 270개 정도의 번(藩·봉건국가)이 있었다. 막부권력은 번 영지에는 침투하지 못했으나 각 번의 국가권력은 영지 내 곳곳까지 파고들었다. 막부와 번으로 분산되어 있던 상층권력만 통합되면 중앙권력은 기층사회까지 쉽사리 통제할 수 있는 상태였고, 이를 이룬 것이 메이지유신이다. 이렇게 보면 ‘조선=중앙집권체제, 일본=지방분권체제’라는 도식은 일부만 진실이다. 국가권력이 사회기층을 장악한 정도에서는 일본이 더 중앙집권적이었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조선 정부의 재정은 일본 경제력의 25% 정도를 장악하는 데 그쳤던 막부 재정보다도 작았던 것 같다. 일본에 비하면 조선은 ‘작은 정부’였다. 의미심장한 것은 19세기 전반에 막부 재정이 열악해지는 데 반해 반막부파의 리더였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개혁에 성공하여 번 재정을 강화시킨 것이다. 이 힘으로 이 두 웅번(雄藩)은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유신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조선, 수십년 세도정치로 분열
정치적 리더십은 어떠했나. 흔히 우리는 조선 정치 하면 당쟁을 떠올린다. 그러나 19세기 조선에는 이렇다 할 당쟁이 없었다. 대략 8개 정도의 대가문이 권력을 과점하면서 남인을 비롯한 다른 세력들은 지방으로 배척당했기 때문이다. 유명한 세도정권이다. 수십 년간에 걸친 정치엘리트의 분열은 정치세력 간 노선을 극단적으로 갈리게 했고, 타협과 단결의 가능성을 줄였다. 격렬한 당쟁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지만, 적절한 붕당정치까지 사라진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대원군 집권(1864년) 후에도 한국 병합까지 조선 정계는 의미 있는 정치적 리더십 형성에 끝내 실패했다. 강력하고 유능한 정치력이 있으면 웬만한 환경은 돌파할 수 있다. 절체절명의 시기에 그 장기적 부재는 치명적이었다.

日 막부-反막부 근대화 경쟁
도쿠가와 시대에 일본은 막부가 전적으로 정치를 담당해왔고 주요 번들은 권력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국 페리 제독의 개항 요구(1853년)를 계기로 서양 세력의 압력이 강해지자 사쓰마, 조슈번 같은 세력들이 중앙정치에 뛰어들었다. 막부와 이들 간에 격렬한 정쟁이 벌어졌지만 그 과정을 통해 정치엘리트 간에 국가 방향을 둘러싼 광범한 논의와 합의가 진전되었다. 1860년대 이후 정쟁은 격화되었지만 양쪽 다 근대화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거부하기는커녕 막부와 반막부파의 싸움은 누가 먼저 근대화를 달성하느냐 하는 경쟁이었다. 이 과정에서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동결되어 있던 천황이 부활해 강력한 통합장치 역할을 했다.

정치엘리트 간 분열 못지않게 치명적인 것은 민중의 이반이었다. 세도정치하 환곡제도의 악용과 행정 문란이 주범이다. 홍경래의 난(1811년), 진주민란(1862년), 갑오농민전쟁(1894년), 만민공동회(1898년) 등 조선 민중은 기성 체제에 세차게 도전했다. 조선 엘리트층은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며 그 정치적, 도덕적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그렇다고 민중세력이 새로운 비전을 실현시키는 데 이른 것도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소모되었고 외세 침입에 틈을 열어 주었다. 민중의 정치적 활성화라는 전통은 20세기 들어서도 3·1운동, 4·19학생운동, 6·10민주항쟁, 촛불시위 등으로 면면히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조선 민의 외면, 日은 선제 수용
반면 일본 민중은 이 시기 반란다운 반란을 일으킨 적이 없다.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1837년)은 오사카를 불태우고 전국에 충격을 주었지만 반나절 만에 끝났다. 메이지 정부에 도전한 하기의 난(1876년), 서남전쟁(1877년) 등도 사무라이들의 반란이었지 민중은 가담하지 않았다. 민중은 막부와 사쓰마, 조슈의 싸움을 대체로 방관했다. 그 대신 엘리트층은 민중의 요구를 선제적으로 수용해 개혁을 감행했다. 재정 부족에 직면한 번 정부는 농민 증세 대신 사무라이들의 봉록을 삭감했다. 메이지 정부는 성립 직후 전국에 걸쳐 토지 조사를 실시하고 세제를 개편한 ‘지조개정(地租改正)’을 단행했지만 농민들의 이익은 크게 침해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니 거대한 민중운동으로 정치판이 바뀌어 버리는 일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20세기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본 시민들은, 특히 한국 시민들에 비교해볼 때 정치 변혁에 관심이 약하다. 양국의 정치 패턴은 그런 면에서 매우 대조적이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격동#한일#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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