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 법안 사전 동의 ‘특권’ 이용”
英왕실 “잘못된 주장” 해명에도… ‘여왕의 동의’ 절차 필요성 논란

1973년 11월.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95·사진)의 개인 변호사인 매슈 파러는 런던 내 통상산업부를 방문했다. 당시 집권 여당인 보수당 출신의 에드워드 히스 총리 내각은 기업 이사회가 지분 실소유주 공개를 요구하면 신원을 모두 공개해야 한다는 내용의 투명성 법안을 추진했다.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으로 사회 불만이 커진 가운데 투자자가 차명 혹은 유령회사로 상장 법인에 투자할 수 없게 하려는 조치였다. 파러는 법안과 관련된 부처의 장관을 찾아가 “관련 정보가 왕실을 공격하려는 불순한 사람들에게 악용될 수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여왕 소유의 주식, 지분 소유 등 재산 내용이 대중에게 공개되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이다.
파러의 방문 이후 투명성 법안에는 ‘국가 지도부, 정부, 국영은행이 사용하는 법인(기업)은 재산 공개에서 제외된다’는 조항이 추가됐다. 지금까지 여왕의 실제 재산 규모는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다. 가디언은 수억 파운드(수천억 원)에 달할 것이라고 전했다.
가디언은 지난 로비에 여왕의 ‘특권’이 악용됐다고 보도했다. 영국은 입법 과정에서 의회에 법안이 회부되기 전 관련 부처 장관이 여왕에게 의례적으로 법안을 사전 보고한 후 동의를 얻는다. 이 과정을 거쳐야 의회에서 법안이 승인된다. 말 그대로 형식적인 절차로 영국 왕실은 1707년 이후 단 한 번도 법안 동의를 거부한 적이 없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여왕과 왕실의 이익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법안을 사전에 알고 대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법안 내용을 미리 볼 수 있기 때문에 왕실은 물밑에서 법안 수정에 개입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가디언은 투명성 법안이 영국 왕실에 유리한 내용대로 의회에서 가결됐고, 1977년 여왕 소유로 추정되는 주식이 비밀리에 국영 유령법인으로 이전됐다고 전했다.
가디언 보도에 영국 왕실은 “여왕이 정부 입법을 막았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며 “입법 과정의 여왕 동의권은 군주가 가지는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옥스퍼드대 헌법 담당 토머스 애덤스 교수는 “보통의 로비스트들에게는 꿈같은 일”이라며 “여왕의 동의 절차 존재 자체가 입법에 상당한 영향력”이라고 지적했다.
파리=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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