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278>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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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이를 찾아 마을로 내려온 어린 노루

사냥꾼의 눈에 띄어
총성 한 방에 선혈을 눈에 뿌렸다
고통으로도
이루지 못한 꿈이 슬프다
―유자효(1947∼)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보리 풍년이 든다’는 속담이 있다. 눈은 어디에서 봐도 눈인데 입장이 다르면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 새삼스럽다. 농부에게 겨울 눈이 보리 풍년이라면 운전자에게 대설은 재앙이다. 제설차 입장에서 눈은 일이고, 라이더 입장에서 눈은 위험이다. 에스키모가 눈 색깔을 구분하는 여러 말을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눈의 의미들을 하나씩 배우면서 나이를 먹어간다.

이 시는 눈의 뜻에 슬픔이라는 의미를 하나 더 추가한다. 눈이 쌓이면 먹이가 없겠지. 먹이가 없으면 배가 고프겠지. 배가 고프면 위험을 택할 수밖에 없지. 그래서 어린 노루는 사냥꾼의 손에 죽고 말았다. 순백색 눈밭에 흩어졌을 피는 어느 때보다 붉었을 것이다. 차가운 대기 중에 토한 마지막 숨은 어느 때보다 뜨거웠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눈과 생명과 슬픔의 의미에 사로잡혀 버린다.

사로잡히지 못할 까닭이 없다. 어린 생명, 고통, 슬픔의 단어를 묶어 놓으면 ‘정인아, 미안해’라는 말이 되기 때문에, 흰 눈밭에 쓰러진 어린 노루의 심상은 지키지 못한 작은 아가처럼 보여 마음을 괴롭힌다. 원래 아이에게 눈은 ‘신난다’의 다른 말. 재앙 같은 눈이라든가 위험한 눈은 어른만 알아도 되니, 모든 아가들은 신나는 눈만 알고 살기를. 고통이나 슬픔은 우리가 배워 둘 테니, 작고 부드러운 너희 아이들은 미리 알지 말기를. 너무 미안해서 빌어본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폭설#겨울눈#나민애#시가깃든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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