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숨길수록 더 깊어지는 슬픔

박선희 기자 입력 2020-10-17 03:00수정 2020-10-1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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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유병록 지음/136쪽·9000원·창비
이런 하루, 이런 오늘. 반복되는 매일의 평범함 속에서 느껴지는 무료함, 고단함, 때로는 깊은 낙담. 유병록 시인의 두 번째 시집에는 오래 저민 차분하고 단단한 슬픔이 엿보인다.

“다 그만두고 싶지만” “보잘 것 없는 욕망의 힘으로”(‘다행이다 비극이다’) 노동의 고단함을 버틴다. “꼭 제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을 매일 하는 처지. 하지만 때로 “회사니까/슬픔을 나누는 일은 어색하니까/구원을 찾거나 함부로 조언을 주고받는 곳은 아니니까”(‘회사에 가야지’)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듯 출근길을 재촉하기도 한다. 사람들 사이에 섞이고 일로 분주할 땐 슬프지 않은 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슬픔은 “회사에서는 손인 척” “술자리에서는 입인 척” “거리에서는 평범한 발인 척” 걷기도 한다(‘슬픔은 이제’). “양말에 난 구멍”(‘슬픔은’) 같아서 들키고 싶지 않다.

시인이 억누르는 슬픔, 일상적 습관에 기대 겨우 견디는 무력감은 상처받고, 낙담한 채 삶의 무게를 짊어진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몇 년 전 어린 아들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읽어 보면, 담담하고 담백한 절제 아래 도사린 슬픔의 깊이가 더 깊고 날카롭게 마음을 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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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숲에서/어린 바람이 무릎걸음으로 기어 다닐 텐데//돌멩이를 가지고 한참을 놀다가/꽃잎을 만져보다가/개울에 슬쩍 손을 넣었다가/발을 담그기도 할 텐데 … 얼마나 컸는지 키를 재보고 싶을 텐데//너에게 꽃과 나무의 이름을 알려주고 싶을 텐데//한번 꼭 안아보고 싶을 텐데 … 너무 멀고 먼/오늘도 근처까지만 갔다가 돌아오는/널 두고 온/거기”(‘너무 멀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유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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